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78화
전용기가 린딘에 도착한 건 4시간 뒤였다.
저번에 평범한 항공기의 비즈니스석에 탑승해 표창장 받으러 본점에 들렀을 때와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 비행시간.
하지만 항공기 안에서 보낸 시간의 질質은 그때와 달랐다.
고객이 부담스러워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제공되는 최적의 서비스.
웰컴 드링크와 간식, 호화로운 코스 요리와 주류까지 완벽하게 혀와 위장을 만족시키는 식사는 물론 아직 공개되지 않은 신작 영화를 미리 볼 수 있는 기회까지 제공된다.
게다가 승무원의 입담이 얼마나 뛰어난지.
“오. 대리님. 플랫 샤펜도라 신작 영화래. 나 이거 볼래!”
“…틀지 마아아아!!”
중간에 플루토가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이따 시사회에서 볼 예정인 플랫 씨의 신작을 미리 틀어 버릴 뻔했다는 사소한 사고가 있었지만.
어쨌든 우린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 * *
전용기에서 내린 우린 영화 배급사 스태프의 안내를 받아 차를 타고 시사회 회장으로 이동했다.
시사회 회장은 린딘 시내에서도 손꼽히는 규모를 자랑하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이었다.
“와. IMAX관 통째로 빌린 거예요?”
흥분을 참지 못하고 엘라마의 딸이 탄성을 터뜨렸다.
고작 일곱 살 정도밖에 되지 않는 모양인데 벌써부터 저런 어려운 단어까지 알고 있다니.
요즘 아이들이 대단하긴 하다.
나는 7살 때 뭐 하고 놀았더라.
잠자리채 붕붕대면서 매미 잡고 그랬던가.
“대박. 인스타 올려야지.”
꼬마는 예쁘게 웃으며 셀카를 한 장 찍더니 곧바로 능숙하게 스마트폰 자판을 두드려 SNS에 사진 업로드를 마쳤다.
평소였다면 엘라마가 호통을 칠 법했는데 별말이 없다.
이 아저씨도 결국은 딸바보인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도 조심스럽게 사진을 찍으려 했는데.
“그만두는 게 좋을 것이오.”
뜻밖에도 엘라마가 아닌 비슈티 과장이 나를 제지했다.
“은행원들이 시사회에 초대된 게 알려지면 좋을 일이 없소. 초대해 준 감독과 배우에게 폐를 끼치는 짓이 될 것이오.”
“아, 과장님. 오해입니다. 저는 SNS 같은 거 안 해서 어디 올릴 곳도 없어요.”
“그렇다면야 얼마든지. 실례했소.”
오해가 풀리자 비슈티는 다시 파트너의 곁으로 돌아가려 했다.
나는 그제야 제대로 비슈티 과장의 파트너가 어떤 사람인지 보게 되었다.
과장의 파트너는 그와 같은 종족, 그러니까 미노타우로스였다.
체격은 비슈티 과장보다 아주 작았는데, 키만 보면 머리 세 개 정도 차이가 날 정도였다.
하얀 털을 지닌 과장과 달리 그녀의 털은 전부 검은색이었는데 몸에 착 달라붙지만 가벼워 보이지 않는 어두운 색깔의 드레스를 입고 온지라 어두운 곳에 서면 잘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아이작의 약혼자가 순박한 인상을 지닌 것과 달리 이쪽은 상당히 날카로운 눈매를 갖고 있었는데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비슈티와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는 예리함이 느껴졌다.
“그쪽에 계신 분은 사모님, 이신가요?”
나도 모르게 비슈티 과장에게 말을 걸고 말았다.
과장은 뭘 그런 걸 다 궁금해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잠깐 뚱한 표정을 지었지만 뜻밖에도 바로 내 물음에 대답했다.
“…예전부터 함께 싸워 온 전우입니다.”
그 말을 들은 걸까. 근처에 있던 비슈티 과장의 ‘전우’가 잠깐 이쪽으로 눈을 흘기며 지그시 미소를 지었다.
살포시 왼손 손바닥을 이쪽으로 내보이며 손가락을 까딱이는 자태가 왠지 모르게 요염했다.
나는 그녀의 약지와 비슈티 과장의 약지에 비슷한 디자인의 반지가 끼워져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다.
비슈티 과장이 언급한 전우라는 단어에는 단순히 전쟁터에서 서로의 등을 지켜 줬다는 뜻 이상의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아무래도 저 둘은 앞으로도 인생이라는 전장을 같이 헤쳐나가야만 하는 그런 사이가 아닐까.
내가 보기에도 합리적인 추측이었다.
아직 시사회가 시작할 시간이 되지 않은지라 우린 조금 더 그 앞에서 기다려야만 했는데, 아직 밀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초조해졌다.
하필이면 이런 날에 배탈이 났을 리는 없고.
메시지를 보내봤지만 묵묵부답.
뭐, 약속을 어길 녀석은 아니다. 분명 제때 도착하겠지.
한 가지 더,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던지라 나는 재빨리 눈을 돌려 목표를 탐색했다.
바로, 라즈마 과장과 그의 파트너였다.
내가 기억하기로 라즈마 과장의 영혼은 아마도 남자였던 것 같다.
엑토플, 이라는 이름이 이쪽 세상에선 상당히 중성적으로 사용되는 이름이긴 하지만.
다만 그의 영혼은 지금 5세 여아의 몸에 갇혀 있다.
다름 아닌, 저번에 과격파 천사가 벌인 테러에 의해 구C 출신 언데드 행원들과 임원들이 전멸할 뻔한 위기에 처했던 바로 그 사건 때문에.
당시 나는 의도치 않게 사건 현장에 있던 기계와 그 안에 든 단원자 금, 그리고 경호용으로 대동했던 콜로서스의 연료로 사용되는 단원자 금의 힘을 사용하고 말았다.
정확히는, 병원 원장인 의사 선생님의 공로지만.
결과, 당시 영혼이 계속해서 부서져 새어 나가는 불치병에 걸렸던 어린 환자는 멀쩡한 몸을 얻었다.
그리고, 구C의 베테랑 은행원들 역시 그 여자아이와 완벽히 똑같은 육체를 지니게 되었고.
당시엔 그게 얼마나 큰 문제인지 자각하지 못했다.
애초에 구C의 언데드 은행원들은 육체를 잃은 지 오래된 자들이라 겉모습에 연연해하지 않고 살아간다고 들었으니까.
바로 그랬기에, 오늘은 과연 라즈마 과장이 어떤 사람을 파트너로 데려올지 굉장히 신경이 쓰이던 참이었다.
“어우.”
아까도 보고 충격받긴 했지만, 라즈마 과장의 파트너는 내 예상을 아득히 초월한 무언가였다.
-지이이잉
-삐리릭
-삐익
라즈마 과장의 파트너는 사람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 않았다.
그 모습을 굳이 묘사하자면 바퀴가 달린 짐짝, 정도로 표현할 수 있으리라. 심지어 자율운행 기능을 지니고 있다.
라즈마 과장의 곁에서 짐짝은 계속해서 움직이며 의미 모를 전자음을 발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라즈마 과장은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있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거나 이따금씩 답을 내놓고 있었다.
라즈마 과장의 말만 해석할 수 있는 나로선 그 대화 내용이 대체 어떤 것인지 자세히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굳이 추측하자면 업무에 관한 내용일 것 같다는 정도밖엔….
“저것도 생명체인 건가….”
나는 라즈마 과장이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그리고,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지안 오빠!”
예쁘게 차려입은 밀라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하도 크게 소리를 지른지라 주위에 있던 다른 시사회 참석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밀라에게 쏟아졌는데, 녀석은 잠시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는 총총 내 곁으로 달려왔다.
“뭐야. 왜 이리 늦었어.”
“아니, 그 택시가 밀려서요.”
밀라는 저번에 말한 대로 정장을 차려입고 나왔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목에 귀여운 리본과 브로치를 착용하고 있다는 것 정도일까.
아, 그리고 헤어스타일도 달랐다. 어디 미용실에서 한 건진 몰라도 멋들어진 모양새가 마치 화보에서 튀어나온 모델을 방불케 했다.
게다가 뿌린 향수의 향기는 어찌나 근사한지.
“어우, 신경 많이 썼나 보네.”
“당연하죠. 시사회 보러 왔는데.”
한편 나는 전용기의 탈의실 환복을 마치고 평소처럼 은행원다운 깔끔한 복장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 혼자 가는 게 아니라 다른 행원들과 함께 가는지라 더욱 분위기를 맞춰야겠다는 생각에 차마 다른 옷을 고를 수 없었다.
애초에 이 정장도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에서 일하게 된 걸 기념해 린딘의 유명한 테일러 샵에서 맞춘 물건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행원들이나 시사회 참석자 가운데에서도 내 옷차림은 크게 꿀리지 않았다.
물론 얼굴 자체가 개사기인 엘라마 소장 같은 사람하곤 비교할 수 없지만.
“김지안 대리. 먼저 도착했었군요.”
“오랜만이야!”
시사회 예정 시각이 5분 정도 남았을 때, 문이 열리며 서부 포독스 지점의 행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먼저 나를 향해 다가온 건 다름 아닌 그 두 사람.
“지점장님! 프레드 선배!”
내게 은행원의 업무를 처음부터 끝까지 알려 준 고마운 사람들.
바로 델 몬테 지점장님과 프레드 선배였다.
“뭐야. 안 본 사이에 왜 이리 멋있어졌어.”
프레드 선배가 냅다 다가와 나를 끌어안았다.
지점장님은 그 모습을 보며 그저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서부 포독스 지점에서 내가 처음으로 맡은 큰 안건을 진행하던 당시 두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있던 밀라가 황급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분명 오늘 서부 포독스 지점 행원들도 온다고 내가 말했는데 기억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뭐야. 둘이 언제부터 사귀는 거야? 나만 모르고 있던 건가. 하여튼, 김지안 대리 진짜 못됐어, 이런 예쁜 여자친구가 생겼으면 바로 자랑해야 할 거 아니야.”
“아니, 선배, 그런 건 아니고….”
-팡!
프레드 선배가 내 등짝을 두드렸다.
“하하하하. 됐어. 뭐, 동기랑 사귀는 거 주위에 숨길 수도 있지. 괜찮아. 소문 안 나도록 내가 다른 사람들 입단속 시켜 둘게.”
“아아… 그, 그런 게 아닌―”
내가 말을 맺기도 전에 선배와 지점장님은 다른 서부 포독스 지점 행원들과 합류했다.
“…….”
“…….”
차마 밀라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얼굴이 뜨거운 걸 보니 내 볼은 분명 발갛게 달아올라 있을 것 같다.
어쩌면 밀라 역시 그럴지도 모르고.
그래도 이럴 땐 남자가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애초에 우리 둘은 진짜 아무 사이도 아니지 않나.
이러다 괜히 소문나서 밀라가 혼삿길 막히면 내가 책임 못 진다.
“야. 밀라.”
“네, 네에? 네. 오빠.”
“아, 그. 뭐냐. 내가 나중에 선배한텐 잘 말해 둘게. 뭔가 오해가 생긴 것 같아서―”
밀라는 대답 대신 고개를 푹 떨궜다.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던 와중 플루토가 대뜸 누군가의 전화를 받는 모습이 보였다.
“어디야? 아. 다 왔어? 진짜?”
보아하니 합류하기로 한 파트너가 시사회 회장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밀라와 나 사이에 흐르기 시작한 어색한 분위기가 가시기도 전에 일개 호기심에 시선을 빼앗긴 건 좀 옳지 않은 행동이라는 자각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시선은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온 인물.
“저분이 왜 여기 오신 건데.”
그러니까, 플루토의 파트너에게 집중되었다.
“안녕하신가, 제군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다름이 아닌.
“차원신용금고 행장 오커스 디스파테르다. 금일 진행될 시사회에 가족과 함께 초대받았다. 고객님의 성공을 기원하는 자리이니 각자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초대해 주신 감독님과 플랫 샤펜도라 배우님, 그리고 현장의 모든 스태프 여러분께 실례가 없도록 하라.”
플루토의 친언니이자 차원신용금고를 이끄는 우두머리, 디스파테르 행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