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5화 (175/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75화

“음? 뭐지?”

고심 끝에 밀라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화장실을 다녀왔더니 답장이 도착해 있었다.

문제는 화면에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라고만 한 줄 적혀 있다는 것이었지만.

<뭐야. 뭐라고 한 거>

<오빠 못 봤어요?>

<어>

<아, 그거 사진 잘못 올려서 지웠어요>

<뭐야 야식이라도 먹다 쌩얼이랑 같이 셀카 찍었어?>

<아ㅋㅋㅋㅋㅋ>

예상대로 3초도 지나지 않아 낮에 찍은 것으로 추측되는 사진이 한 장 올라왔다.

밝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든 밀라의 셀카.

녀석은 이따금씩 이런 식으로 기분 좋은 날에 찍은 사진을 내게 보내곤 했다.

본인 왈, 행복을 나눠 주고 싶은 거라는데.

자신이 느낀 소소한 즐거움을 미소 지은 얼굴을 찍어 보냄으로써 소중한 사람들과 셰어한다나 뭐라나.

<어우 셀기꾼>

<아 뭐래 진짜ㅋㅋㅋ>

뭐, 녀석의 행복은 내겐 충분할 정도로 전해진 듯했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씨익 올라간 걸 보니.

아, 그러고 보니 물어봐 놓고 답을 못 들었다.

<그래서, 아까 한 얘긴데>

<응? 아? 그거?>

<응 그거>

<오….>

<시사회 갈 거?>

다시 한번 묻자 5초 후에 답장이 돌아왔다.

<진짜 저 가도 되는?>

얘가 왜 이러지. 밥 먹고 술 마실 땐 매번 좋다고 나오더니.

<오라니까>

<오빠 여친 없어요?>

<없다고>

<지금 저 꼬시는 거?>

<뭔 개소리야;;>

보아하니 좀 오해받을 만한 행동을 한 모양이다.

밀라가 친하다고 쉽게 보거나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진짜 시사회에 이성 끌고 오라는 상사 지시 못 어겨서 어거지로 어떻게든 한 명 데려가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건데, 나는.

뭐. 일단은 오해를 풀 필요가 있는 모양이다.

나는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평소보다 길게 연결음이 이어지더니 예고 없이 밀라의 목소리가 스마트폰 스피커를 뚫고 튀어나왔다.

<뭐, 뭐예요 갑자깃! 깜짝 놀랐잖아요!>

“왜 오버하고 그래. 이상한 애야 진짜….”

<아니, 그, 막 밤에 갑자기 전화 오니까….>

“너도 엊그제 이 시간대에 전화 걸었으면서, 뭔.”

<…내가? 진짜?>

“…….”

애가 좀 허당끼가 있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금붕어스러운 면모도 있는 모양이다.

아주 깔 때마다 뭔가 새로운 게 나오는구먼.

“아, 그래서 왜 전화했냐면.”

<네.>

“니가 뭘 좀 오해하고 있는 거 같아서.”

<…오해요?>

처음 들어 보는 톤으로 밀라가 말했다.

뭐지, 나 방금 지뢰 같은 거 건드렸나?

“그, 있잖아….”

다크엘프에게 역륜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들어 봤는데.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성질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해서 말해야겠다.

“나 일하는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 알지?”

<응. 알아요.>

“거기랑, 예전에 일하던 서부 포독스 지점 있잖아?”

<네. 그게 왜요?>

방금 얼핏 드러난 공격성을 감추고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밀라.

하지만 그 안엔 가시 같은 기운이 감춰져 있어 언제든 튀어나올 준비를 마친 것처럼 느껴졌다.

“두 점포에 모두, 플랫 씨가 개봉 예정인 신작의 시사회 티켓을 보냈어.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에는 전용기까지 보내 주신대.”

<오오…. 대박. 완전 출세했네요?>

“출세? 음…. 그게 그렇게 되나?”

<친절하게 대한 고객님이 실은 엄청난 대스타였고 과거의 명예를 되찾아 보답하겠다고 그러는 거잖아요. 뭔가 디게 드라마같은 느낌도 드는데.>

“내가 출세한 건 아니지.”

<에이. 다 오빠 고객님인데요, 뭘.>

밀라는 속 좋은 소리를 했다.

나로 말하자면, 음. 솔직히 착잡했다.

뭔가, 운 좋게 플랫 씨를 만나서 그 후광에 살포시 숟가락을 얹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이걸.

“쨌든, 우리 출장소 소장 누군진 알고 있지?”

<알죠. 그 유명한 슬리크 엘라마 차장님인데.>

“그 양반이 자기 얼굴에 먹칠하고 싶으면 혼자 오거나 동성을 데려오라고 하더라고.”

<헐….>

눈치 빠른 밀라는 곧바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

<그거 그 소리 아니에요? 여자 한 명 데리고 와라. 시사회 분위기 망치지 말고. 아니면 죽여 버릴 거다.>

“정확해. 바로 그거야.”

<그래서, 누구 데려갈까 고민하다가 저한테 얘기 꺼낸 거예요?>

“응.”

<헿.>

“뭐야, 그 웃음은. 지금 비웃은 거지?”

밀라는 웃음을 쉽게 참지 못한다.

수화기 너머에서 쉴 새 없이 키득대는 소리가 들려 왔다.

“똑같이 모쏠인 주제에 그렇게 사람 놀리면 못 써.”

<아…. 오빠 진짜 대박.>

“뭐가.”

내가 묻자 밀라는 잠시 머뭇거리다 답했다.

<동기들 중에 말 걸면 오빠 따라갈 애들 꽤 많은 거로 아는데, 왜 나한테 같이 가자 한 거예요?>

“왜. 맘에 안 들어?”

<아니, 당연히 갈 건데. 그냥 궁금해서.>

“음….”

뭐라고 대답할지 고민하다 그냥 속 시원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있잖아, 여자들이 가끔 착각하는 게 있는데.”

<오. 그게 뭔데요?>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말했다.

“남자들도 여자들 중에 성격 안 좋은 사람들 다 구분해서 피해갈 줄 알아.”

<푸흡!>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밀라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뜻인지 물어봐도 돼요?>

“하지 말라 해도 궁금해할 거잖아.”

<그렇긴 하죠.>

“…….”

에라이.

“걔네, 너 욕하고 다니는 거로 알아.”

<어머.>

“몰랐어?”

<아뇨. 인사 일하는데 그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죠. 공채 여자애들이 저 어떻게 보는지, 오빠를 어떻게 보는지, 그런 것쯤이야.>

“…나는 몰랐어. 남들한테 들었지.”

<아, 왜 굳이 오빠한테 그런 얘기하지 않았는지 묻진 마요. 다른 사람 욕하기 싫어서 그런 거니까, 그냥.>

밀라는 공채 신입 행원들이 내게 연락할 때에도 딱히 그들에 관한 험담을 늘어놓은 적이 없었다.

정작 그들은 뒤에서 밀라에 관해 이것저것 안 좋은 이야기를 떠들고 다녔다는 게 우스웠다.

“착하네.”

<자주 들어요. 그런 말.>

이런 점을 보아도 밀라가 정말 성격이 좋은 편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래서, 녀석 말고는 내가 아는 여자 사람 중에 꼭 한 명 골라야 하는 상황에서 크게 망설이지 않고 연락한 거다.

“아무튼 시간 내줘서 고마워. 덕분에 소장님한텐 안 혼나겠다.”

<고마우면 맛있는 거 사 줘요.>

“나 가난해.”

<농담이에요. 사도 내가 사야지. 지안 오빠 덕에 시사회 사는 건데.>

“진짜? 니가 밥 사게?”

<에이. 오빠 린딘 올 땐 원래 내가 사기로 했는데 한 번도 안 얻어먹은 것처럼 말한다, 또.>

나는 멋쩍게 웃었다.

“됐어. 우리 해물 먹자. 날 거로.”

<오. 미친. 완전 좋은데.>

다크엘프는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그래. 그럼 2주 뒤에 봐.”

<기다리고 있을게요. 오빠 옷 뭐 입고 올 거예요?>

“어… 아무래도 정장이 아닐까.”

<에이. 재미없어.>

“재미고 자시고 다른 행원들도 오는 자리잖아.”

<하긴. 그럼 나도 정장 입고 가야지.>

말이야 저렇게 하고 있었지만 밀라의 목소리는 평소의 몇 배는 들떠 있었다.

어쨌든 이로써 엘라마에게 갈굼당하는 미래는 사라졌다.

밀라가 본점 근무 중인 차원신용금고 행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서부 포독스 지점 사람들이 내가 녀석과 같이 온 걸 보고 무슨 생각을 할지 조금 걱정이 되지만, 뭐, 어쩌겠나.

그냥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누가 봐도 그냥 평범한 특채 동기다, 우린.

친한 오빠 동생. 남사친. 여사친.

그런 거.

* * *

2주일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영화 시사회라는 특별한 이벤트를 기다리게 되면 으레 시간의 흐름이 기묘할 정도로 느려지는 법이지만, 업무가 워낙에 다망해서인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주말은 그보다 더 빠르게 지나가는 기적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아무래도 시사회에 가게 되었다는 사실에 행원들의 마음가짐이 혹여라도 해이해질까 걱정한 엘라마의 특별한 ‘배려’가 아닐까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퇴근 시간 지난 다음에도 서류 작업 붙잡고 내가 낑낑댈 이유 따윈 없을 테니까.

“으아아 진짜 돌아 버리겠네.”

내가 참지 못하고 퇴근 전에 보완해야 하는 마지막 서류 위에 엎어지자 아이작이 한심하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내일이 시사회인데 오늘까진 좀 참지 그랬나.”

“왜. 뭐. 알 게 뭐야. 나 죽을래.”

“맛이 갔군….”

아이작의 말대로였다.

나는 거의 쓰러지기 일보 직전까지 혹사당한 상태였다.

실제로 이 2주 동안 나는 거의 지인과 연락하지 못하고 있었다.

밀라에게서 몇 번 메시지가 왔지만 그것도 바쁘다며 단답으로 대답했고 전화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엘라마는 진짜 인생의 지옥이 무엇인지 보여 주겠다고 작정한 것처럼 업무 폭탄을 떨어뜨렸고 나를 비롯해 라즈마 과장, 비슈티 과장, 아이작, 플루토 씨, 심지어는 엘라마 자신마저 눈 밑에 다크서클이 길게 늘어져 걸어 다니는 송장처럼 변한 상태였다.

뭘 위해 이러는 걸까.

본점에서 시사회 가는 행원들 꼬우니까 갈구라고 지시라도 내려온 걸까.

그런 생각마저 들어서 어제 참지 못하고 묻고 말았다.

‘혹시 저한테 원한 있으세요?’

‘닥쳐. 넌 머지않아 나한테 고마워하게 될 거다.’

엘라마는 그렇게 일갈하고 날 사무실에서 쫓아냈다.

아, 내일 플랫 씨 만나서 인사할 것 같은데.

이렇게 피곤하고 추레한 몰골로 가는 건 실례가 아닌가.

아니, 일단 그보다 영화 시사회인데 상영 중에 그대로 코 골면서 졸아 버리면 어쩌지.

옆에서 밀라랑 서부 포독스 지점 행원들도 다 보고 있을 텐데.

“미쳐 버리겠네, 진짜.”

일단 내일 아침 출발이니까 오늘 퇴근하면 바로 자든가 해야겠다.

짐은 아침에 일찍 싸 둬서 다행이지.

* * *

그렇게 맞이한 토요일.

나는 여행용 캐리어를 들고 키키와이 차원공항으로 향했다.

1박 2일 동안 주차비를 내긴 싫어서 업무용 차량이 아닌 택시를 픽업.

공항의 차원도약 터미널을 지나 국제선 출발 터미널에 도착했을 땐 시계가 오전 6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젠 그래도 7시엔 퇴근해서 밥 먹자마자 디비잤다.

모처럼 풀숙면을 취하고 일어나니까 몸이 지난 2주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개운했다.

물론, 눈 밑에 생긴 다크서클은 고작 하루의 숙면으로 빠지지 않았다.

공항 화장실 거울을 들여다본 내 얼굴은 건강하지만 과로로 인해 최근 상태가 좀 나빠진 직장인처럼 보였다.

누가 봐도 모범스러운 은행원.

“이 정도면 다른 지점 행원들이 보고 키키와이 범차원 출장소에서 내가 꿀 빤다는 소리는 못 하겠지….”

뭐, 엘리트 코스라니까 그야 질투할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내가 일도 안 하고 놀고먹는 낙하산이라고 욕먹고 싶진 않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욕먹어도 싸지만 나는 진짜 치열하게 이곳에서 버티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그럼, 슬슬 가 볼까.”

쨌든, 이번 린딘행은 즐기기 위한 것이다.

플랫 씨에게 고맙다고 꼭 말해야지.

나는 이동하는 동안 캐리어에 담은 정장이 구겨지지 않길 바라며 엘라마가 지정한 약속 장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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