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74화
밤이 깊었지만 밀라의 고민은 조금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 진짜 바보 아닌가. 공부는 나름 잘했는데.”
연애에 관해선 젬병인 밀라에게 있어 이 문제는 처음 마주치는 유형에 속했다.
해결법에 관해 고민하거나 생각하기만 해도 골치가 아파오는 이유는 간단했다.
밀라는 다가오는 이성을 거절한 경험은 많았어도 이성에게 먼저 다가서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효율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이성의 관심을 받고 애정을 끌어내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밀라에게 대시해 온 사람들은 대체로 연애 경험이 없고 순수하지만 외모가 특출난 그녀를 어떻게 해 보려는 자들이 대부분이었기에 내치기 바빴지, 그들이 어떤 수단을 사용하는지는 신경도 쓴 적이 없었다.
동성들을 보는 시점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밀라는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운명의 상대를 만날 거라고 믿고 있던 탓에 또래 여자들이 어떤 식으로 이성의 사랑을 쟁취하는지에 관해선 무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들의 연애관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삶의 방식을 딱히 무시했던 건 아니었다.
누군가는 미래의 반려와 누릴 행복을 위해 자신의 정조를 지키는 법이고, 누군가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쾌락을 좇는 법이다.
그게 딱히 나쁜 일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단지, 아무것도 모르고 그 사람을 인생의 동반자로 선택해 결혼해 살아가게 될 상대방이 가엾을 뿐이지.
그 외의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서로 원하는 걸 얻고 살아가는, 나름대로 행복한 삶일 테니까.
문제는, 아예 연애 경험 자체가 없는 데에다 저들에게서 무엇 하나 배우려 하지 않았던 까닭에 밀라가 흔히 말하는 ‘여우짓’을 어떻게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어머니는 열심히 노오오력하면 본능과 우주의 기운이 도와줄 거라고 했지만 밀라는 아직 단 한 번도 그런 기적 같은 순간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왜 김지안 앞에 서면, 그와 대화를 나누면,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기분이 드는 걸까.
맨날 같은 점포에서 보는 것도 아니고, 멀리서 일하고 있는 데에다 연인 관계도 아닌 평범한 특채 동기인지라 이따금 보는 게 전부인데.
“하아… 진짜 바보 같아.”
학창 시절엔 이런 문제로 고민하던 학우들이 멍청하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좋아하는 남자가 생긴 순간 밀라 자신이 그렇게 변하고 말았다.
이게 전부 업보가 아닐까. 그런 생각마저 들 따름이었다.
“그래도 나름 호감은 표현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하나 의문인 점은, 밀라 자신이 여태껏 몇 번이나 김지안과 있을 때 즐겁고 오래 시간을 보내고 싶다며 꾸준히 어필을 했음에도 김지안이 이렇다 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밀라는 바보가 아니다.
자신의 외모가 상위권에, 그것도 꽤 높은 퍼센티지에 위치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에 더해 김지안에게만 자신이 여태껏 연애를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범생이라는 것도 밝혔다.
몇 번인가 밤에 단둘이 식사하고 술을 마시기도 했고, 키키와이 여행을 핑계로 찾아가기까지 했다.
흔히 잘 노는 대학교 시절의 학우들이 말하는 ‘그린 라이트’를 계속해서 점등시킨 모양새인데.
“대체 뭐가 문제지….”
이만하면 김지안도 슬슬 무언가 액션을 취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어림도 없었다.
아직 지친 건 아니었지만 이쯤 되면 슬슬 김지안이 고자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
“…아!”
바로 그때, 번개 같은 깨달음이 밀라의 머리를 관통했다.
“맞다. 지안 오빠도 모쏠이라 아예 연애 세포라는 게 없을지도 모르겠네.”
밀라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직면하게 되었다.
김지안이 연애 경험이 없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밀라는 생각했다.
세상엔 자신과 비슷한 유형의 사람이 있었구나, 라고.
당시 느낀 감정은 몹시나 특별한 것이었다.
김지안과 대화를 거듭할수록 마침내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감동이 밀라의 가슴을 가득 채웠으니까.
하지만, ‘연애 경험이 없는데 자신의 마음에 쏙 드는 남자’의 ‘연애 경험이 전무’하다는 부분이 이렇게나 자신을 괴롭힐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엄청 숙맥인 거야. 어쩌면 아직도 내가 오빠 좋아한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지도….”
즉각적으로 상황을 인지한 밀라는 접근법을 바꿀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김지안은 연애 경험이 없다. 다만, 남성적인 매력이 떨어지는 유형이 아니기에 거기엔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게 틀림없었다.
무언가 극복하지 못한 트라우마가 있거나, 남성으로서 어딘가 고장이 났거나, 그게 아니면 자존감이 낮거나.
“이상하다. 그 세 가지는 오빠 성격 보면 절대 아닌 것 같은데.”
밀라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김지안은 인생이 트라우마에 지배당할 정도로 유약한 사내가 아니었다.
건강 상태만 보아도 충분히 남성 호르몬이 분비되고 있는 걸 짐작할 수 있었고, 자존감이 딱히 낮아 보이지도 않았다.
쓸데없이 자존심을 부리지 않지만 자신의 진가를 객관적인 시점에서 정확히 파악하는 것.
누가 봐도 자존감이 높은 사람의 행동이었다.
그러니까 위의 세 가지 가능성은 모두 잘못되었다.
다른 원인이 분명 있을 터.
“살면서 연애할 여유가 없을 정도로 바빴다든지….”
생각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가능성이 등장했다.
바로, 김지안이 삶의 풍파에 시달리며 살아왔을 가능성이다.
저번에 듣기로 김지안의 부모는 일찍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김지안은 고아원에서 자랐고.
그러니까, 스스로를 먹여 살리고 입히기 위해선 돈을 벌어야만 했으리라.
원래는 훌륭한 화가가 되는 꿈도 갖고 있어서 어떻게든 장학금을 받아 미대를 다녔다는데, 그때에도 몸을 혹사해 가면서까지 야간 아르바이트를 뛰어 생활비를 마련했다고 그랬지 않았나.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엄청난 생활력이었다.
만일 자신이 그런 상황에 던져진다면 김지안처럼 악착같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밀라는 고개를 저었다.
김지안은 강인한 남자였다.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까지 모두 먹여 살릴 수 있을 정도로 책임감 역시 특출나다고, 밀라는 그렇게 판단했다.
그리고 이 정글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한 명의 현대인으로서, 그리고 한 명의 여성으로서, 밀라는 강한 수컷에게 끌리고 있었다.
“역시 지안 오빠가 대단했던 거였어.”
그런 범상치 않은 삶을 살아왔으니, 당연히 연애 같은 것과는 거리를 두고 살았을 게 분명하다.
전신의 연애 세포가 모두 사멸해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어쩌면, 김지안은 밀라가 자신에게 호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밀라가 알기론 이런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해답은 언제나 한 가지밖에 없었다.
“아. 내가 알려 줘야 하는구나.”
밀라는 마침내 깨달았다.
이 난관을 타파하기 위해선 자신이 먼저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진짜로 모르는 거였어….”
이걸 순진하다고 생각해야 하나.
이미 콩깍지가 씐 밀라의 눈엔 김지안의 그런 눈치 없고 바보 같은 모습도 소년의 순수함처럼 비치고 있었다.
“다 큰 성인 남성이 소년처럼 보이면 끝장난 거라더니. 하아….”
그리고 밀라는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완전히 김지안에게 빠져 버렸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동갑내기 친구들에게서 배운 건 없었지만 어머니가 이따금씩 연애에 도움이 되는 조언을 건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진짜, 내가 저지를 수밖에 없는 거려나.”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밀라는 다시 한번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25세 다크엘프의 머릿속은 정말로 전통적인 가정상과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으로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러한 가정의 연애사와 결혼까지 이른 흐름을 보면 전부 남성이 주도권을 쥐고 여성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경우가 9할을 넘어서고 있었다.
남자가 여자를 쟁취하는 문화야말로 당연하다고 생각해 온 밀라에게 있어 김지안에게 먼저 직접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무리. 자신 없어. 이건 진짜 최후의 방법으로 남겨 둬야 할 것 같아….”
밀라는 침대에 털썩 엎어져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어떻게 해야 김지안이 먼저 자신에게 좋아한다고 말하게 만들 수 있을까.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밀라는 어느샌가 의식의 끈을 놓쳤고, 그대로 잠에 들고 말았다.
‘엉….’
몸을 포근히 감싸는 부유감.
잠시 후, 밀라는 자신이 완전히 잠에 빠져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게 자각몽?’
자신이 잠에 들었고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몸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피로해졌을 때 이런 일이 생긴다곤 어디서 주워들은 적이 있었지만 실제로 경험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지금 꿈을 꾸고 있으니 이젠 알게 되었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어느 쪽이든, 밀라는 혼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신의 볼을 꼬집어 보았다.
‘아파.’
그리고는 곧바로, 꿈속에서 볼을 꼬집는 게 현실과 꿈을 구분하는 데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긴 신문 기사를 떠올렸다.
“아. 나 바본가 봐, 진짜.”
꿈에서도 여전히 밀라는 자신의 숙소에 있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고 주위 환경 역시 동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이라고 인지할 수 있던 이유는 포근한 부유감이 느껴지는 데에다 시간의 흐름을 제대로 인지할 수 없던 까닭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가 한 가지 더.
-딩동
<뭐 해.>
<자니?>
밤 12시가 넘었는데 스마트폰에 메시지가 와 있다.
발신인은 김지안.
‘진짜 내가 지안 오빠 좋아하긴 하나 보네. 오빠한테서 이 시간에 톡 오는 꿈까지 꾸고.’
미쳤나 봐, 진짜.
밀라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스마트폰의 잠금을 해제하고 채팅 앱의 푸쉬 알림을 눌렀다.
자각몽은 뭐든지 자기 생각대로 풀리는 꿈이라고 한다.
어쩌면 꿈속에서라면 김지안과 달콤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는 게 아닐까.
밀라는 즐거운 상상에 저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지었다.
<네 오빠. 저 자고 있어효.>
귀여운 척, 바보 같은 얼굴을 한 이모티콘을 골라 전송 버튼을 눌렀다.
어떤 식으로 대화를 이어 갈까. 상상만 해도 즐거워질 따름이었다.
꿈을 꾸고 있어서일까, 술을 마신 것처럼 거하게 취한 듯한 기분이 든 밀라는 평소라면 생각지도 못할 대담한 행동을 떠올렸다.
“그래, 꿈속에서라면….”
밀라는 어깨를 풀고 손목 스트레치를 마친 다음 스마트폰을 들고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
-타다다닥
그리고는 자신의 애정을 전달할 수 있는 장문의 메시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다다음 주 영화 시사회 가거든.>
장문의 사랑 고백을 작성하던 와중 생각지도 못한 메시지가 도착했다.
“뭐지. 나 이런 거 상상한 적 없는데.”
무의식 쩔어. 지안 오빠가 영화 시사회 가는 것까지 상상하다니.
밀라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장문의 답장을 작성하는 걸 그만두지 않았다.
하지만.
<혹시, 같이 가 줄 수 있어?>
-툭
이어진 메시지에, 밀라는 스마트폰을 떨어뜨렸다.
“기에에엑!!”
괴성과 함께 밀라가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광경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 역시 깨달았다.
“으아악!! 전송 취소!! 전송 취소!! 모든 대화 상대에게서 삭제에에에에!!!!!!”
실수로 누른 전송 버튼과, 그 위에 보이는 장문의 메시지의 마지막 줄에 보이는 1이 사라지지 않기만을 간절히 기도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