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3화 (173/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73화

나는 고민에 빠졌다.

알고 지내는 여자 사람, 얼마나 되더라.

나는 연락처에 저장된 전화번호를 훑어보았다.

일단은 가족.

가족은 없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당연히 누나나 여동생도 없다. 나는 외동아들이었고 바로 고아가 되었으니까.

친척은?

사촌 누나나 사촌 동생이 있던가?

기억도 거의 안 날 정도로 어린 시절에 한두 번 본 듯한데 아마도 있긴 있던 것 같다.

부모님 돌아가시자마자 친척들이 죄다 손절해서 만나 볼 기회조차 없었지만.

다음은 대학 동기.

3-1차원 지구에서 지내던 시절 같이 학교 다녔던 여자애들.

응. 얘네도 군대 다녀온 이후로 연락 끊고 벌써 6년은 지난 거 같다.

“…….”

아니, 애초에 지구인을 데려가겠다는 발상 자체가 글러 먹었다.

영화 시사회 당첨되었다고 몇 년 동안 안 본 사람에게 갑자기 연락하는 것도 어색해서 미치겠는데 데려간 곳이 용산 CGV 아이맥스가 아니라 이세계의 대도시에 있는 극장이다?

일단 건너오자마자 기절할 가능성이 500%.

그 전에 차원신용금고가 미개척 차원 사람을 데려온다는 이유로 관문 사용을 허가해 줄지가 의문이었다.

면접 볼 사람 데려오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의 지인을 데려온다는데 이런 일에 차원 관문을 사용하게 두진 않겠지.

그렇다면 남는 선택지는 한 가지다.

그러니까 어… 범차원 세계의 여성을 데려가는 것.

여기서 문제.

내가 범차원 세계에서 알고 지내는 여성은 얼마나 될까.

“음….”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일단, 넓게 보자면 1년 동안 연락 끊고 사는 연수원 동기들이 있고(공채라 대부분 내게 악감정을 품고 있는 것 같지만, 주로 남자들이. 어째서인지 여자 동기들은 가끔 톡방에다 내 안부 물어보거나 간단하게 기프티콘도 보내 주고 생일도 챙겨 주고 그런다.) 그들과는 아예 사이가 틀어진 건 아니었다. 어쩌다 한 번씩 인사는 하고 지내니까.

문제는 공채 동기들에게 같이 시사회 가자고 말할 용기가 내게 없다는 사실이었다.

“배지 수여받을 때 마지막으로 보고 그다음엔 채팅방에서 가끔 인사한 게 끝이었으니….”

아니. 잘 생각해 보니 몇 명인가 그 후에도 내게 연락한 사람이 있었다.

언제였더라. 맞다. 내가 플랫 씨와 함께 찍은 사진이 신문과 인터넷 뉴스에 실린 다음 날이었던가.

“…으음.”

유명인이랑 사진 찍은 다음 날에 진짜 아무래도 좋은 인사가 수십 통인가 날아왔지.

전부 다른 점포에서 일하는 공채 동기 여성들이었다.

몇 명은 그나마 앞에선 친절하게 날 대해 줬지만 나는 그녀들에게 평범하게 답장을 하고 연락을 끊었다.

저들이 남자 공채 동기들과 달리 내게 사근사근하게 대했던 건 기억하고 있었지만 한 가지 사실이 마음에 걸렸던 까닭이다.

“그래. 그 사람들을 데리고 갈 순 없겠지.”

공채 동기, 아니, 사실 공채를 동기라고 부르기도 좀 뭣하니까 연수원 동기라고 부르자.

연수원 동기. 그중에서도 여자들은 밀라를 교묘하게 따돌려왔다.

고작 밀라가 공채가 아닌 특채로 입행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거를 사람 진짜 많네.”

밀라를 비롯해 작년에 특채로 입행한 다섯, 그러니까 나와 밀라, 아이작, 이로울, 과타노차는 흔히 공채 행원들에게 낙하산 5인방이라고 조롱당하고 있었다.

한국에선 수능 쳐서 대학 들어온 학생들이 수시로 들어온 학생들을 탐탁지 않은 시선을 보는 일이 잦은데, 어쩌면 그것과 비슷한 걸지도 모르겠다.

자신들이 고생고생해서 공채 서류 면접 합격해서 은행원이 되었는데, 밀라가 인맥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특채로 뽑혀서 파워가 세다고 얘길 듣는 인사부에서 일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거겠지.

듣자 하니 본점에서 밀라를 챙겨 주는 건 같은 인사부 행원들, 특히 사수인 폴로미 선배밖에 없다고 한다.

이런 얘길 전부 알아 버린 상태로 다른 점포의 연수원 동기들을 내가 좋게 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내가 공채든 특채든 신경 쓰지 않는 프레드 선배 같은 쿨한 행원이라면 모를까.

어쨌든, 이런 이유로 다른 연수원 동기와 함께 시사회에 간다는 선택지는 사라졌다.

그렇다면 남은 후보는 선배 행원, 아니면 다른 지인이라는 건데.

선배 행원은 폴로미 대리 말곤 아는 여자 행원이 없다.

그리고 폴로미 대리는 밀라의 말대로라면 교제 중인 연인이 있지.

“…결국은 이렇게 되나.”

남은 선택지는 두 명뿐이었다.

밀라와, 플루토 씨.

근데 잘 생각해 보니 플루토 씨도 일단은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에서 일하고 있지 않은가.

정식 행원은 아니어도 한 명만 두고 나머지만 부를 정도로 플랫 씨는 야속하지 않다.

즉, 플루토 씨도 나와 다른 행원들처럼 똑같이 전용기를 타고 시사회에 참석할 것이다.

고로, 플루토 씨를 시사회에 같이 가자고 꼬드기는 건 좀 모양새가 그렇다.

그럼 역시 남은 선택지는 밀라뿐인데.

“으으….”

솔직히 말해서 싫은 건 아니었다.

녀석과는 이미 오래 알고 지낸 사이고 특채 동기라는 끈끈한 연결 고리도 있다.

무엇보다 밀라는 내가 본점에서 일하게 될 경우 든든한 아군이 되어 줄 녀석이다.

그냥 친한 동기끼리 영화 한 편 같이 보러 가는 건데 거리낄 게 뭐가 있나.

여태껏 린딘 들를 때마다 과타노차랑 이로울이 바쁘대서 단둘이서 맛있는 거 먹으러 간 적도 여러 번 있지 않았던가.

“그거랑 이건 좀 다르… 겠지?”

이성과 밥 먹으러 가는 건 내 안에서 굉장히 허들이 낮은 축에 속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러 가는 건, 특히나 유명 스타에게 직접 초대받아 호화로운 전세기를 타고 시사회에 참석한다는 특별한 경험을 이성과 함께 공유하는 건 역시 좀, 그 뭐랄까.

신중하게 상대를 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거든 아무래도?

“아… 못 정하겠다. 증말.”

그냥 가지 말까 진짜.

아니면 당일에 연기자 고용해서 썸타는 사이인 척 연기해 달라고 해야 하려나.

“미치겠네.”

직감이 속삭였다.

여태껏 내가 은행원으로서 일하며 마주쳤던 모든 안건보다 이번 일의 난이도가 높다고.

* * *

린딘 시내 모처에 위치한 차원신용금고의 독신 행원 숙소.

인사부의 유일한 다크엘프 은행원, 밀라 레브리에는 오랜만에 통화하는 어머니의 잔소리에 한참 시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아이, 엄마.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진짜 그러네. 하아….”

그 잔소리의 내용이란 으레 결혼적령기의 다크엘프 여성들에게 쏟아지는 유형의 질문이었다.

<내가 네 나이 땐 이미 너네 아빠랑 3년째 연애 중이었다고!>

“엄마 살던 시대랑 내가 살던 시대랑 같아?!”

<다르지! 당연히 아는데! 그 정도는! 근데 너, 여태껏 한 번도 연애 못 했잖아? 진짜 내 딸 맞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엄마가 낳아 놓고선….”

<얘 좀 봐, 엄마한테 못 하는 말이 없네? 대체 누구 닮아서 이러는 거얏!>

“그야 엄마 딸이니까 엄마 닮았겠지!”

<어머어머…!>

“그리고 나 연애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거거든?!”

-꾹

밀라는 전화기에 대고 쏘아붙인 다음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하아….”

밀라의 모친, 아멜로나는 딸의 연애사에 관심이 많았다.

자신이 젊은 시절 꽤나 놀았다는 게 그녀의 주된 레파토리였는데 밀라 역시 이를 믿지 않는 건 아니었다.

어머니의 젊은 시절 사진은 확실히 외모 평균치가 높다고 불리는 다크엘프 중에서도 빼어난 축에 속했으니까.

밀라 역시 어머니를 닮아 외모에 관한 칭찬을 어릴 적부터 질리도록 들어왔다.

하지만 그에 수반하는 문제 또한 있었으니.

바로, 결혼 전까진 자유분방한 삶을 살던 어머니가 연애 경험이라곤 한 번도 없는 딸에게 어서 시집가서 애 낳으라고 종용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 이제 스물다섯인데….”

하지만 밀라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벌써 스물다섯이라고.

“결혼은커녕 연애도 못 해 봤다고….”

밀라는 머리를 싸매고 책상에 엎어졌다.

어머니의 걱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밀라의 어머니는 스물여섯 살에 결혼해서 스물일곱 살에 밀라를 낳았다.

자기 딸의 나이가 스물다섯인데 아직 연애 한 번 하지 못한 걸 보면 서두르라고 재촉하고 싶어지는 것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엄마 말이 틀린 건 아니지. 그래.”

밀라 역시 모친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에 자신의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 백년해로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밀라가 오래전부터 꿈꿔 왔던 행복이었으니까.

은행에 들어와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이유는 사실 별거 없었다.

그냥, 밀라는 고등학생 때부터 열심히 공부했고.

성적에 맞춰 좋은 대학에 들어간 다음.

제일 높은 연봉을 받을 수 있는 곳에서 제안이 와서 특채로 차원신용금고에 입행했을 뿐이다.

이 모든 건 아버지가 말한 대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인생을 살다 보면 멋진 반려자를 만날 기회가 생길 거란 말을 믿고 노력한 결과였다.

그렇기에 밀라는 충분히 자신이 걸어온 인생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고, 필요하다면 언제든 커리어를 내려놓고 가정에 충실한 삶을 보낼 생각이 있었다.

원하는 건 단 하나.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할 남자를 찾고, 그와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

“…너무 말이 심했나.”

밀라는 어머니의 말에 반대한 적이 없었다. 그녀 역시 똑같이 초조했을 뿐.

그저, 자신이 어떻게든 행복해지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와중에 어머니가 프레셔까지 가하자 참지 못하고 폭발했을 분이다.

“나중에 사과해야지….”

밀라는 침대에 드러누워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며칠 전에 연락하던 특채 동기, 김지안과의 대화 내용을 계속해서 반복해 곱씹어 보고 있었다.

“헷.”

마지막 메시지는 김지안이 보낸 인사말이었다.

<잘 자.>

<네, 오빠.>

김지안의 메시지에 귀여운 이모티콘까지 붙여서 답장을 보냈는데, 스스로 느끼기에도 주책이다 싶었다

이상적인 결혼생활을 위해 연애와는 담을 쌓고 살아오던 지난날들이 밀라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에 대한 보상심리는 아니었지만, 결혼은 타협이 아닌 자신이 정말로 존경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남자와 하고 싶다는 게 밀라의 진심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김지안은 처음으로 밀라의 눈을 사로잡은 남자였다.

연애라곤 한 번도 한 적이 없었고 데이트는 장래를 약속한 결혼 상대하고만 하는 거라고, 시대착오적이라는 소리까지 들어온 오래된 연애관을 고수해 온 밀라는 남자를 보는 눈이 높았다.

딱히 조건을 따진다는 건 아니었다.

신장, 자산, 자가와 차의 유무. 그딴 건 하등 상관이 없었다.

돈이야 밀라도 벌 자신이 있었다. 계속 노력해 왔으니까.

그저, 밀라는 앞으로 결혼할 상대가 서로 좋아하고 존경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으면 좋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누구에게도 나눠 주지 않고 온존해 왔던 헌신과 사랑의 크기만큼 상대도 자신만을 바라봐 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바라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밀라는 이 기준을 만족하는 상대를 본 적이 없었다.

세상 사람들은 상상 이상으로 방탕했고 젊은 시절, 가장 빛나는 시절의 자신을 남에게 스스럼없이 내어 주었다.

그게 장래를 함께할 반려에게 해선 안 되는 짓이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역으로 밀라에게 ‘네가 말하는 사랑은 너무 무거우니까 좀 더 가볍게 생각하라’는 둥 말도 안 되는 조언을 늘어놓기만 했다.

그런 면에서, 여태껏 연애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데 밀라가 좋아하는 성품을 모두 갖추고 있는 김지안이라는 남자는 완벽에 가까운 상대였다.

“…어떻게 해야 지안 오빠가 알아주려나.”

다만, 연애 경험이 없던 밀라는 어찌해야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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