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2화 (172/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72화

다음 날, 평소보다 일찍 출근한 나는 엘라마의 사무실을 찾았다.

“음? 김지안인가. 무슨 일이지.”

평소였다면 노크도 없다며 물건부터 던졌을 법한 인간이 살갑진 않아도 평범하게 맞아 주니 기분이 묘했다.

“어… 뭐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플랫이 시사회 티켓과 전용기를 준비했다고 하더군.”

“예?”

개 뜬금없이 무슨 소린가 싶어 나는 입도 뻥긋 못 하고 굳어 버리고 말았다.

플랫, 까지 들었을 때 일단 든 생각은, 엘라마가 아무리 막 나가는 인간이라 해도 소중한 고객님한테 씨든 님이든 안 붙이고 그냥 이름으로 부르는 게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름을 들었을 때, 구체적으로는 시사회 티켓과 전용기 이야기가 나오기 전이지만.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서 휘몰아쳤다.

아 X됐다.

혹시 플랫 씨가 마키나와 나에 관한 이야기를 이것저것 엘라마에게 털어놓은 게 아닐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마저 하고 말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플랫 씨와 엘라마 사이엔 아무 연관이 없다.

최소한 나는 여태껏 그리 알고 있다.

혹시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둘 사이에 있는 건가? 그런 건가?

보아하니 티켓과 전용기는 나를 위해 플랫 씨가 준비해 준 것 같은데, 그 얘기가 왜 엘라마 소장을 통해 들리는 거지? 대체 왜?

그냥 나한테 직접 연락하면 되는 게 아닌가?

그렇게 오만가지 생각이 해마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는데, 엘라마가 무언가 뒤늦게 떠올렸다는 듯 말했다.

“네놈과 다른 출장소 행원들도 태우고 오라더군. 서부 포독스 지점 쪽에도 얘기 전해 달라고 들었다.”

“…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뭐지. 진짜 이 양반 플랫 씨랑 친한 사이인가?

결국 나는 꺼내려던 얘긴 한 글자도 말하지 못하고 엘라마에게 다른 것부터 물어보게 되었다.

“그, 혹시 플랫 씨랑 잘 아는 사이십니까?”

“아. 말한 적 없던가?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냈다고.”

“아뇨, 단 한 번도.”

“흥. 네놈에게 알려 줄 의리는 없었지. 그러고 보니.”

아니 댁이 방금 말한 적 없냐고 물어 놓고 왜 그따구로 말을 싸가지 없게 하세요.

하여튼 상사만 아니었으면 밖에서 만나서 한 번 귓방맹이 날렸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나에 관해 뭔가 들은 게 있나 보군.”

“없진 않죠. 저도 귀가 달려 있다 보니.”

나는 그제야 키키와이에 오기 전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엘라마, 분명 몇백 년인가 오랜 역사를 지닌 전통극 전문 배우 가문이라고 그랬나.

어린 시절부터 혹독한 수련을 쌓는 그들은 전통극 외에도 영화, 연극, 뮤지컬, 드라마, 광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다고 그랬지.

분명 아역 시절부터 힘들게 연예계에서 굴렀을 테니 같은 처지였던 플랫 씨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엘라마의 경우 가업을 잇지 않고 혹독한 노력과 타고난 재능을 발휘해 차원신용금고 역대 최연소로 차장을 달았다고 그러던데.

맨날 머리 셀프로 매끌매끌하게 밀면서 만나는 고객 따라 가발 갈아 끼워 동질감 만드는 기괴한 수법을 쓰는 이 인간의 연기력을 보면 그 경력이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잘 알 수 있었다.

성격이 더러워서 그렇지, 업무를 추진하거나 본점 관계자 설득해서 나와 다른 출장소 행원들의 업무를 돕거나 이따금씩 찾아오는 큰 고객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 그럴 만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 자체는 명백했다.

가끔 권총을 꺼내 들거나 재떨이를 던지는 게 문제지.

그냥 오늘처럼 내가 노크 없이 대뜸 문 열고 들어와도 이렇게 평범하게 이야기할 수만 있다면 엘라마보다 좋은 상사를 찾기 어려웠다.

아니다. 주말에도 빡시게 굴리고 휴가라곤 거의 갈 수 없게 만드는 걸 생각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겠다.

수당이야 일한 만큼 챙겨 주고 인사고과에도 반영해 주긴 하는데 사람 사는 것 같지가 않아서 말이지.

출장소에서 일하기 시작한 이래로 체중이 5kg은 족히 빠진 것 같은데 이게 전부 엘라마 탓이다. 나쁜 놈.

“플랫 씨랑은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신 건가요?”

어쨌든, 둘의 관계에 관해 추측만 하고 있긴 좀 그래서 일단 직접 물어봤다.

“그렇다만.”

“그럼 플랫 씨는 왜 절 찾아와서 대출을 받은 걸까요. 그냥 소장님 계신 본점에 문의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비겁한 짓은 하기 싫었다고 그러더군. 대출금 다 갚고 나서 몇십 년 만에 연락이 왔다.”

“아… 그런 거였구나.”

이 이야기만 들어도 얼추 플랫 샤펜도라라는 배우의 인품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절대 지름길을 가지 않고 자신이 지닌 것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식으로만 정직하게 승부를 보는 유형.

과연, 어린 시절의 짧은 방랑을 마치고 돌아와 여전히 스타로서 활동할 수 있는 데엔 이런 올바른 마인드셋이 필수인 모양이다.

“그럼, 그때부턴 서로 자주 연락하시겠네요?”

“가끔은. 오랜만에 연락받은 다음엔 가족 동반으로 같이 놀러 간 적도 있지. 출장소에 오기 전의 이야기지만.”

“와. 대박.”

엘라마는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니 진짜일 것이다. 굳이 부하직원 앞에서 스타와 친하다고 허풍을 늘어놓을 인간이 아니지, 그래.

“저였으면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녔을지도 모르겠는데요?”

“네가 그러니까 아직 대리밖에 안 되는 거다. 난 네놈 나이 때 이미 과장 승진 얘기 나오고 있었다.”

“그야, 저보다 일찍 입행하셨을 거 아녜요.”

“시끄러워. 패배자.”

“…….”

아 진짜 제발 딱 한 대만 저 밋밋한 뒤통수 실컷 후려치고 싶다 제발.

그나저나, 출장소 오기 전엔 가족들 다 데리고 플랫 씨랑 놀러 갔다는 얘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소장님이 제대로 쉬는 걸 본 적이 없네요.”

“…네놈들 굴리려면 내가 쉬면 안 되지. 출근해서 월급만 축내지 못하도록 감시를 해야 할 게 아니냐.”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엘라마는 출장소가 영업을 시작한 이래로 단 한 번도 휴가를 신청한 적이 없었다.

아니, 휴가는커녕 주말에도 쉬지 않고 매일같이 출근해 업무를 수행해 왔다.

그러니까, 단 한 번도 낮부터 밤사이의 시간을 집에서 보낸 적이 없다는 뜻이다.

“소장님 가족분들 키키와이에 사는 거 아니었어요?”

“그렇다만, 네놈이 그걸 왜 신경 쓰는 건데?”

“아뇨, 그냥. 궁금해서.”

“앞으로는 그딴 쓸모없는 질문은 하지 말도록.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다.”

또 효율 타령인가.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엘라마의 평소 생활을 생각하니 도무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맨날 엘라마가 우릴 빡세게 굴린다고 아이작에게 투덜대고는 있었지만 우리 모두는 그가 출장소의 누구보다 성실하게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굳이 그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출근하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아도 그가 누구보다 이른 시간부터 점포에 나와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요즘 들어 결혼이나 자식, 가정에 관한 생각을 자꾸 하게 된 탓일까.

또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오지랖을 부리고 싶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고액의 연봉을 받는다 해도 그렇지, 아버지가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밖에서 일하다 돌아오는 걸 부인과 자식들이 좋아할까?

다만 이런 얘길 함부로 꺼냈다간 진짜로 모처럼 즐거운 기분을 누리고 있는 엘라마를(물론 표정엔 평소와 어떠한 차이점도 보이지 않지만 오랜 근무를 통해 나는 저 모습이 좋은 일이 있을 때 엘라마가 보이는 얼굴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자극해 자동 재떨이 투척기로 진화시키고 말 터.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마저 시사회에 관한 이야기를 물어보기로 했다.

“그나저나 시사회, 저한테 따로 연락이 올 줄 알았는데.”

“아마 하겠지. 나한테 미리 연락한 건 주말에 네놈이 일하지 않도록 배려해 주기 위함일 거다.”

“아. 그런 거였구나.”

나는 다시 한번 플랫 씨의 배려심에 감탄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플랫 씨는 내가 주말에도 일할까 봐 미리 엘라마한테 얘기해 그를 포함한 출장소 행원 전원이 쉴 수 있도록 부탁한 모양이었다.

나랑 엘라마만 원래는 부르고 싶지만 짬이 모자란 대리가 소장과 단둘이 린딘에 영화나 보러 갔다간 선배 행원들에게 눈치가 보일까 봐 자신이 융자를 받은 점포인 서부 포독스 지점만이 아니라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의 행원들도 싹 다 불러들인 거겠지.

평일이 아닌 주말 시사회라.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복귀 후 플랫 씨가 처음으로 쏘아 올리는 신호탄이 아닌가.

심지어 감독은 바로 그 베르게네프 매스터한트.

서부 포독스 지점을 떠난 이래로 나는 몇 번인가 프레드 선배의 추천대로 블루레이를 빌려 매스터한트 감독의 예전 영화를 감상해 보았다.

그는 다양한 장르를 누비며 모든 작품을 흥행시킨 자타공인 범차원 세계 최고의 영화 천재.

성장해서 아버지가 된 왕년 최고의 아역과 로렐트리의 전설적인 감독이 합을 맞춘 이번 작품에서 플랫 씨는 납치된 아이를 구하기 위해 자신이 버린 과거와 마주하는 자상하지만 강인한 아버지를 연기한다고 하니 기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엘라마 소장이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참고로 말해 두지만 모든 시사회 티켓은 페어다. 2주 남았으니 그사이에 같이 갈 사람을 구해 두도록.”

“…네?”

아니, 여기서 갑자기?

“혹시, 네놈은 그것도 없는 건가.”

“그게 뭔데요.”

엘라마는 대답 대신 주먹을 꽉 쥐고 내 눈앞에 내밀었다.

“이거 말이다, 이거.”

그리고는 새끼손가락만 얄밉게 쭉 폈다.

“…없는데요?”

“스물여덟이 되도록 그 꼴이라니. 인생 허투루 산 모양이군.”

-빠직

“내가 네놈의 나이였을 땐 이미 약혼식을 끝낸 상태였다.”

“…….”

“그 전엔 동시에 다섯 명의 여성과 교제하고 있었지.”

“아… 네….”

당신은! 어?! 몇백 년 동안 예쁜 여자만 데려와서 결혼하며 유전자 개빡시게 개조한! 배우 집안에서! 역대급 얼굴 천재 연기 천재라 불리면서!! 카메라 마사지 빡시게 받고 온갖 좋은 거 먹으면서 관리하고 관리받던 인간이잖아!! 나는 그냥 평범한 인간이라고!!!

진짜 상사 아니었으면 진즉에 귀 잡고 흔들면서 이런 식으로 소리 질렀을 거다.

아 시발.

그냥 은행 때려치울까.

“아무튼, 당일에 네놈만 혼자 오는 꼬라지를 보였다간 내가 직접 엉덩이를 걷어차 주지. 누구든 좋으니까 데려와라. 오해받고 싶다면 남자를 데려와도 상관없지만.”

“제가 미쳤다고 그러게요?”

“싫다면 여자를 데려와라. 벌레. 정 없으면 어머니라도 모셔 오든가.”

“…….”

“왜. 아니꼽나?”

“그, 저는… 어머니가….”

“어머니가 어쨌다는 거지?”

“저는 어머니가 안 계시는데요.”

“…….”

기분 나쁜 침묵이 나와 엘라마 사이에서 흘렀다.

“미안하게 됐군.”

엘라마는 민망하다는 듯 얼굴을 가리고는 황급히 사무실을 나갔다.

“아, 시발.”

누구 데려가지?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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