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71화
그로부터 며칠 후, 마키나와 필로아는 키키와이로 돌아왔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하며 둘을 만났고, 아이들은 린딘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신나게 떠들어 댔다.
다만 한 가지, 나는 마키나의 정체가 인공 지능인 걸 모르고 있다는 ‘설정’인지라 필로아는 마키나가 차에 치여 다쳤다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냥, 바늘로 꿰맨 자국을 보여 주며 넘어져서 팔이 찢어졌다고만 말했지.
어쨌든, 내가 보기에 린딘에서 돌아온 필로아는 어딘가 후련해 보였고 예전보다 훨씬 밝게 웃고 있었다.
아마도 기계에 대한 트라우가 마키나와의 관계를 통해 해소된 게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조만간 후리텐 본토로 이주한다고?”
“맞아요. 마키나랑 같이 가기로 했어요.”
“오. 친척이라도 있는 거야?”
“아뇨, 그건….”
“차원신용금고의 행원 중 한 분이 빈방이 있다고 하시더군요. 그곳에 하숙집처럼 묵게 되었습니다.”
“아 진짜?”
나도, 마키나도, 능청스럽게 연기를 이어 갔다.
마키나는 필로아가 나를 보는 사이 작게 눈짓했는데 안 본 사이에 정말 거짓말이 많이 늘었다.
하여튼, 애들은 진짜 잠깐만 안 봐도 금방금방 성장한다니까.
“그럼 마키나는 따로 집을 구하게?”
“네. 괜찮은 매물이 있어서 포독스에 단독 주택을 한 채 구매했습니다. 필로아가 언제든 놀러 올 수 있도록 정원도 가꿔 보려 합니다.”
“대단하네. 나도 아직 집이 없는데.”
“저는, 뭐. 조금 운이 좋았을 뿐이죠.”
겸손한 말투로 대답하는 마키나를 향해 필로아가 고개를 돌리고 싱긋 웃었다.
벌써부터 장래를 약속한 약혼자를 보는 듯한 눈빛.
요즘 아이들이 조숙하다는 이야기는 자주 들어 봤지만 아예 3세와 5세 꼬마가 약혼한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아니, 뭐, 정식으로 약혼식을 치른 건 아니지만 마키나가 사진 보내고 상견례니 뭐니 하는 걸 보니 마키나의 성격상 이 관계를 이미 진지하게 약혼이라고 정의 내린 게 틀림없다.
“포독스 가서도 둘이 사이좋게 지내고, 나도 어쩌면 조만간 린딘으로 이근할 수도 있으니까 시간 되면 그때 또 만나서 맛있는 거 먹자. 내가 살게.”
“김지안 대리는 저보다 벌이가 적지 않습니까? 제가 사야죠.”
“애들은 많이 벌든 말든 어른이 사 주는 거 맛있게 먹으면 돼.”
“그동안 돌봐주신 데에 감사 인사드리는 겸 좋은 곳으로 모실 생각이었는데.”
“아 진짜? 그럼 가야지. 나 술 마셔도 돼?”
“몹쓸 어른이었군요. 방금 한 말은 취소하겠습니다.”
“아악! 안 돼!”
내가 과장된 리액션을 보이자 필로아와 마키나가 폭소를 터뜨렸다.
두 아이는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저대로 어른이 된다면, 내가 꿈꾸던 안정된 생활을 보내고 있겠지.
어지간히 큰 사고나, 그에 준하는 불행, 예를 들자면 불치병에 걸린다든지 그런 일만 없다면 둘은 서로를 아끼며 계속 이대로 살아갈 것이다.
“아유 부럽다. 나도 좋은 사람 만났으면.”
“진지하게 하는 얘깁니까, 그거.”
“왜. 소개해 주게?”
“아뇨, 그건 아닙니다만.”
마키나는 무어라 말하려다 말꼬리를 흐렸다.
뭐지. 그냥 진지하게 내가 부러워하는 걸 보고 그냥 뭘 말하든 기만이 될 것 같아서 입을 다문 걸까.
“어쨌든, 싸우지 말고 하던 일 잘되길 바라. 진짜 조만간 나도 올라갈지도 모르니까, 정해지면 연락할게.”
“알겠습니다. 본점 근무, 할 수 있다면 좋겠군요.”
“야. 그건 어떻게 알고―”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마키나와 필로아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 카페를 나섰다.
델 몬테 지점장님이 뭔가 말해 준 거려나.
“하아….”
그러고 보니 지점장님이 저번에 조만간 소식이 있을 거라 말했나.
아무래도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본점 근무는 기정사실이 되어 버린 모양이다.
문제는 언제, 어떤 방식으로 본점에 불려가는지인데.
“…대리 단 지 1년 될까 말까라 승진은 아닐 테고. 부서 이동하려면 다른 이유가 필요할 텐데.”
머릿속이 다시 한번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 * *
카페에서 나선 마키나는 필로아와 각자 집으로 돌아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다만, 린딘으로 떠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맛보는 두근거림을 느끼는 동시에 마키나는 방금 만난 김지안 대리와 나눈 대화 내용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유 부럽다. 나도 좋은 사람 만났으면.’
‘진지하게 하는 얘깁니까, 그거.’
‘왜. 소개해 주게?’
‘아뇨, 그건 아닙니다만.’
사실을 말하고 싶었지만 이는 프라이버시의 침해에 해당되는 일이라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마키나는 차원신용금고의 전산망을 관리하는 인공 지능이었고 전산 관리 솔루션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은행 컴퓨터에 저장된 모든 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마키나는 인사부의 비밀문서에도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어지간한 인사이동에 관해선 만난 적 없는 행원에 관한 정보까지 전부 파악할 수 있었다.
다만, 이번에 마키나가 발견한 건 인사이동에 관한 정보와는 거리가 멀었다.
“역시 여자들이 김지안 대리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 모양입니다.”
마키나가 찾아낸 건 인사부의 한 다크엘프 대리의 비밀 폴더였다.
밀라라는 이름의 대리는 김지안의 특채 동기였는데 그녀의 폴더 안에는 김지안이 술자리에서 방심하고 있을 때 찍은 사진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마도 김지안은 자신의 얼굴이 촬영당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 정도로 교묘하게 이 다크엘프는 김지안의 얼굴을 집요하게 찍어 기록하고 있었다.
연수원 시절부터 최근까지, 계속해서.
“빅 데이터를 통해 분석한 결과 밀라 대리의 용모는 빼어난 축에 속하는 모양이군요. 업무 실적은 인사부라서 탁월한지 어떤지 잘 드러나지 않지만, 사람의 감정을 파악하는 직무권능으로 행내 불륜 등을 잡아내는 등 활약하고 있고….”
마키나는 마치 시누이라도 된 것처럼 밀라에 관한 정보를 모아 뜯어보고 있었다.
김지안 대리는 호감이 가는 잘생긴 남자로 분류되는 유형의 인간이었고 밀라 역시 외모에선 꿀리지 않았다.
다만, 김지안의 업무 수행 능력과 올바른 심성은 여러 행원들 사이에서도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연애 대상만이 아니라 결혼 상대로 남자를 판단하려 드는 여성은 상승혼 성향이 강하고 육각형 인재를 선택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 시대상을 반영한다면 상당수의 여성이 김지안 대리가 완벽한 신랑감이라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상승혼 성향을 지닌 여성들이 원하는 건 남편의 집안이 제공해 주는 든든한 자금력.
천애고아인 김지안 대리에겐 든든한 뒷배경이 없다.
그러니까, 아마도 김지안의 능력이나 돈만 보고 뜯어먹으려는 욕심쟁이는 애초부터 접근하지 않을 터.
논문에 따르면 3-1차원 지구의 대한민국에선 시집살이 문화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대한민국에선 시집살이를 시키지 않는 가정에 시집을 가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을 지닌 여성도 다수 있다고 한다.
다만 3-1차원은 어디까지나 미개척 차원.
당연히 범차원 세계에선 저들의 문화에 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사항을 고려했을 때 밀라가 김지안에게 접근한 건 정말로 순수하기 이를 데 없는 호의일 가능성이 높았다.
“김지안 대리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상대가 자신에게 이성적 호감을 품고 있다는 사실까진 눈치채지 못한 모양입니다만….”
그 말은 사람의 감정을 파악하는 직무권능을 지닌 인사부의 밀라가 김지안이 자신에게 딱히 호감을 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고달픈 짝사랑을 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요즘 들어 찾기 힘든 인재로군요. 이 정도로 순수하게 한 사람만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사람은 흔치 않을 텐데.”
곧바로 밀라의 스마트폰의 GPS 데이터를 해킹해 낸 마키나가 탄식을 발했다.
밀라는 차원신용금고 본점과 근처에 있는 숙소를 왕복하는 것 외엔 이렇다 할 외출을 하지 않고 있었다.
또래 동성 친구들이 다들 해외나 다른 차원으로 여행을 가는 동안에도 밀라는 월급을 차곡차곡 쌓아 두고 있었고 값비싼 가방을 구매하는 등 자신을 치장하는 데엔 거의 돈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한 번씩 근교의 온천으로 가서 몸을 담그고 오는 게 고작.
통장 잔고는 어지간한 전문직 남성만큼 쌓아 두고 있었다.
보아하니 딱히 그녀가 집안을 먹여 살려야 할 만큼 부모가 가난한 것도 아니다.
밀라의 부모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지만 그 농사라는 게 드론과 소형 비행기까지 동원한 대규모 농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부농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이었다.
“둘이 이어진다면 은퇴한 다음에도 밀라 대리의 친정으로 가서 귀농한다는 선택지도 있겠군요. 그렇다면 노후 걱정은 없겠습니다.”
아직 밀라라는 사람을 직접 만나 본 게 아닌지라 완벽한 판단을 내릴 순 없었지만 다양한 조건을 살펴보기만 해도 마키나는 벌써 흥미가 동하고 있었다.
조건과 밀라의 검소한 생활 방식, 그리고 주위 동료들과 사수, 그리고 상사가 평가한 인품. 마지막으로 인사고과까지 감안했을 때 이 사람과 김지안 대리가 맺어진다면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거나 쓸데없는 비밀이 생겨 서로에게 심려를 끼치는 일이 없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직접 만나 보는 수밖에 없겠군요. 김지안 대리를 설득해서 어떻게든 자리를 마련해야겠습니다. 다만, 직접 밀라 양이 적합한 상대라고 조언하는 건 주제넘은 짓이니….”
마키나는 생각에 잠겼다.
이런 일은 남자가 먼저 나서야 한다. 김지안이 밀라에게 호감을 보이지 않는 이상 감정을 강요할 수는 없는 법.
“두 분이 잘된다면 좋겠지만, 김지안 대리에게 다른 생각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혹시 모르는 일이지 않나. 자신이 태어나기 전, 김지안 대리가 고향인 3-1차원에서 지내던 시절 오랫동안 짝사랑해 온 상대가 있을지도.
“…그래도 한 번쯤은 떠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마키나는 해석 중이던 데이터베이스를 닫고 결심했다.
김지안 대리가 했던 말로 미루어보아 그가 린딘의 차원신용금고 본점에서 일하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터.
만일 린딘으로 오지 못한다면 원거리 연애는 영 권하기 껄끄러우니 밀라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걸 포기하면 된다.
일단은 린딘에 김지안이 온 다음 다음 한 수를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고, 마키나는 그렇게 판단했다.
혹시 모를 경쟁자나 변수가 생길지도 모르니, 그러한 것들도 전부 계산에 포함시키지 않으면 정확한 결괏값을 도출할 수 없다.
“서른이 다 되어 가는 남자가 혼자서 쓸쓸하게 지내는 건 좋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이 문제는 밀라에게도 화두를 꺼내 보는 게 좋겠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창조자이자 김지안의 특채 동기인 과타노차 대리에게도 도움을 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