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54화
“안정된 가정에서 남편과 자식 둘과 함께 여성의 행복을 누리고 싶다더군요.”
“그… 뭐라고? 미안한데 다시 말해 줄래?”
“그녀는 안정된 가정에서 남편과 자식 둘과 함께 여성의 행복을 누리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마키나는 혼기를 앞둔 30대 회사원 같은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고작 3세 유아로밖에 보이지 않는 외견을 지닌 녀석이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하는가 싶었다.
“어어…. 아예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닌데. 그러니까, 전업주부로서 가정에 헌신하고 남편과 아이들과 행복한 생활을 보내고 싶다는 거야?”
“네. 그녀는 몹시나 가정적인 여인입니다. 또한 프로그래밍에도 일가견이 있어 창조자님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수익이 부족하다면 자신 역시 집에서 프리랜서로 틈틈이 외주 업무를 받아올 생각이라고 하더군요.”
“…….”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녀석은 태어나서 3개월밖에 되지 않은 주제에 진지하게 누군가와 가정을 이루고 아빠가 되는 걸 생각하고 있다는 건가?
아니. 잠깐. 애초에 이 녀석의 몸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당연한 소리지만 정자나 그런 건 녀석의 체내에 일절 존재하지 않는다.
즉, 무슨 수를 쓰든 여성을 임신시킬 수 없다는 뜻이다.
운 좋게 녀석을 가엾이 여긴 범차원 세계의 신적 존재가 힘을 빌려준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이 시대의 마도 공학의 수준 갖고는 불가능한 일.
아니, 그보다 마키나의 몸은 3살배기 어린아이다.
이 녀석에게 가정을 이루고 여자의 행복을 누리고 싶다는 이야길 꺼낸 여자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냥 마키나가 겉보기보다 어른스러우니까 어디 공원에서 혼자 술 마시던 여성 프로그래머가 취한 김에 이런저런 고민거리라도 주책맞게 털어놓은 걸까.
“좀 어지러워서 그런데 음료 한 잔 더 시켜도 될까?”
“제건 스트로베리 벨벳 프라푸치노 벤티 사이즈로 부탁드립니다.”
“왜 내가 사야 하는 건데.”
“3세 아동이 29세 은행원과 단둘이 카페에 있는데 아동 쪽이 결제하는 걸 사람들이 보면 김지안 대리를 어떻게 볼지 걱정되어서 그렇습니다. 음료값은 김지안 대리의 계좌로 곧바로 이체하겠습니다.”
“…됐어, 짜샤. 제일 비싼 메뉴 고르길래 그냥 해 본 소리야. 내가 불러냈으니까 당연히 내가 사야지.”
아무래도 꺼내기 부끄러운 화제에 관해 이것저것 캐물은 내게 소소하게 보복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걸어가 주문을 마쳤다.
추가한 음료가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로 했다.
“진짜 미치겠네….”
몇 번을 생각해 봐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대체 왜 겉만 보면 3살짜리 어린애인데 저런 얘길 늘어놓을 수 있는 걸까.
마키나 녀석의 신경 구조가 어떻게 되어 먹은 건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다.
아니, 누가 그걸 보여 줘도 나는 이과 출신이 아니라 알아보지도 못하겠지만. 말이 그렇다는 소리다.
“…….”
마키나도 마키나지만 녀석에게 저런 소리를 해댄 여자도 어떻게 생겨 먹은 건지 면상이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시집가고 싶은데 주위에 괜찮은 사람이 없다며 옆집 꼬마에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하다 잠시 푸념이라도 한 걸까.
그게 아니면 정말 내가 상상한 대로 그저 술에 꼴아 어린아이에게 할 말 못 할 말 구분하지 못하고 헛소리를 질질 늘어놓은 걸까.
“마키나가 그걸 일일이 받아 줄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
두 가설 모두 신빙성이 없었다.
아무리 자아와 감정을 지니고 있다 해도 마키나의 본질은 인공 지능.
본인에게 1도 득이 되지 않는 타인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 줄 만큼 그 합리성은 너그럽지 않다.
마키나에게 있어 세상의 대부분은 흥미로운 학습 대상이긴 해도 아직 연애라든지 결혼 같은 건 아무래도 좀 이르다고 개인적으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내 생각이 착각에 지나지 않았고 마키나는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쳐 둔 걸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래도 시집가고 싶다는 여자가 힘들다고 몇 마디 징징댄다고 마키나가 그녀에게 반해 저런 소리를 하게 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만일 그게 가능하다면 상대는 인공 지능마저 홀딱 빠져들게 할 마성의 매력을 지녔다는 소리일 텐데.
그런 여인이 뭐가 아쉬워서 3세 유아에게 페로몬을 흩뿌리고 다니겠나.
아이가 귀여워 미칠 지경이라면 그냥 괜찮은 남자 찾아서 결혼한 다음 직접 낳거나 그게 어려워도 입양을 하겠지.
“으음….”
아무리 고민해 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과타노차 녀석이라면 뭔가 알고 있으려나.
듣자 하니 한동안 마키나의 사고 회로를 모니터링하고 그걸 토대로 영혼이 없지만 마키나처럼 효율적으로 학습하고 움직이는 새로운 인공 지능을 만든다고 했는데.
“아니, 왜 주말인데 대답이 없어 얘는.”
메신저 앱으로 연락해 봤지만 반응이 없었다.
상태 메시지에 방해하지 말라고 적혀 있길래 대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곤 예상했다만.
뭐, 이것도 이해는 간다.
지난 몇 주 동안 본점 업무 외에도 바리타스 제국의 전함을 마비시키는 데에 필요한 백도어를 마키나와 함께 설계하고 만드느라 꼬박 밤을 새웠으니까.
한술 더 떠서 전함과 연결된 바리타스 우주군의 예산이 든 계좌도 해킹했다는데, 남아 있던 자투리가 쓸려간 건 바리타스가 쪽팔려서 발표조차 하지 않은 덕에 무사히 세탁을 마치고 과타노차의 역외은행 계좌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지금쯤 아마 어디 휴양지에서 느긋하게 시간이나 때우고 있겠지.
예를 들어, 키키와이라든지.
“……어?”
그러고 보니 과타노차의 프로필 사진이 좀 신경 쓰이는데.
“설마.”
칵테일을 든 촉수와 선베드에 올린 촉수, 그리고 모래사장과 바다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잔과 선베드, 그리고 파라솔의 디자인 등이 묘하게 눈에 익다.
“혹시 모르니 아이작한테 물어볼까.”
“고객님 주문하신 스트로베리 벨벳 프라푸치노 벤티 사이즈랑 유자 패션푸르트 티 그란데 사이즈 나왔습니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점원이 음료가 준비되었음을 알렸다.
“감사합니다.”
음료를 들고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테이블에 앉은 마키나가 청승맞은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인공 지능이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내 안의 고정관념과 편견을 실시간으로 박살 내고 있었지만 굳이 티를 내진 않았다.
녀석은 영혼을 지닌 특별한 존재고, 나와 다를 바 없이 인격과 감정을 지니고 있는 지성체.
계속 놀라기만 했다간 실례가 될 게 틀림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동요했던 마음이 조금은 차분해지는 게 느껴졌다.
“이러고 있으니까 친한 동생 연애 상담해 주는 것 같네.”
“호오. 김지안 대리가 그쪽 방면에 능숙한 사람인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내가 어때서.”
“교육 목적을 위해 김지안 대리의 개인 정보, 특히 연애 전적 분야의 데이터를 개시開示해 주셨으면 합니다.”
“…….”
“제가 곤란한 질문을 한 겁니까?”
나는 입을 다물었다. 모태솔로라고 말하는 건 좀 쪽팔린다고.
“그렇군요. 김지안 대리의 연애 경험은 null. 잘 알겠습니다.”
“코딩하는 것처럼 말하지 말아 줄래?”
“실례. 이 버릇은 디버깅의 필요가 있어 보이는군요.”
방금 디버깅이라고 말한 것부터 디버깅하자, 부탁이니까.
“있잖아, 내가 아무리 연애 경험이 없어도 나름 29년 동안 여러 사람 보고 지내왔다고. 못한 게 아니라 개인적으로 성취해야 하는 목표가 있고 바쁘고 무엇보다 환경이 연애보단 다른 일에 집중하는 쪽이 효율이 좋아서 안 했을 뿐이야.”
“그렇군요. 김지안 대리의 피드백을 반영할 때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뭐지. 나 얘 괜히 불러냈나. 듣고 있자니 꽤 빡치는데.
“일단 지금 몇 가지 신경 쓰이는 게 있는데, 너는 그 여자… 분이랑 잘되고 싶은 거야?”
“그렇습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이 관계를 몹시 진지하게 대하고 있습니다.”
“상대는 널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데?”
“지성체의 감정 표현에 관한 논문과 분석 자료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 상대 역시 제게 이성으로서 호감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성적인 끌림과는 거리가 있지만 이는 제 육체가 3세 유아의 것이어서 일어난 일일 뿐입니다.”
“허….”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람의 호감이라는 거, 데이터로 분석 가능한 거였구나.
미세한 제스처나 눈썹의 움직임, 안면 근육의 운동.
그런 것부터 시작해서 상대의 감정을 파악하는 수법이 있다는 이야긴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걸 살아 있는 생명체의 눈과 뇌로 일일이 이론적으로 접근해 파악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무의식이 알아서 상대의 언행과 표정 등을 보고 유전자에 새겨진 판단 기준을 따라 상대의 호감을 측량하는 거야 자주 있는 일이지만, 마키나처럼 저렇게 분석해 내는 건 어마어마한 컴퓨팅 파워를 지니고 있는 인공지능이기에 가능한 일이겠지.
근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마키나를 이성으로 보고 호감을 품는 거, 정상적인 여성이라면 문제가 좀 있는 게 아닌가.
범차원 세계에 제아무리 다양한 종족과 문화가 공존하고 있다 해도 결혼적령기의 여성이란 사전적 법적 의미를 모두 따졌을 때 아무리 어려도 18세를 넘는다.
18세도 충분히 어린 나이지만, 18세가 3세 유아를 보고 신랑이 되어 줬으면 좋겠다고 느끼다니.
이거 완전 범죄 아닌가?
만일 연령이 정반대고 18세 남성이 3세 여아와 결혼하자고 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쉬이 상상이 갔다.
굳이 대한민국이 아니더라도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려서 조리돌림당한 끝에 경찰 조사를 받고 범죄자의 낙인이 찍혀 인생이 종 치는 스페셜 코스가 기다리고 있을 터.
마키나가 그런 나쁜 여자한테 엮여서 피해를 보게 둘 순 없다.
아직 이성에 관해선 경험이 아닌 학습을 통해서만 정보를 습득한 순진한 인공 지능 꼬마를 꾀어내려 하는 사악한 암여우는 이 김지안 대리가 가만두지 않겠다.
일단은, 적에 관해 좀 더 알아봐야겠지.
지금 당장 마키나가 좋아하는 사람을 범죄자라 부르면 거부감을 느끼고 대화 자체를 그만둘 가능성도 있다.
그랬다간 내가 말리고 싶어도 말릴 수 없게 된다.
최대한 정보를 수집해 마키나를 설득할 방법을 찾아보는 게 지금은 상책일 터.
“네가 인공 지능이란 건, 벌써 얘기했어?”
“사실, 그건 아직 말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일단 현재의 제 신분은 난민이다 보니, 함부로 정보를 유출했다간 가짜 신분을 마련해 준 차원신용금고는 물론 그동안 절 돌봐주었던 델 몬테 지점장 부부에게 민폐를 끼치게 되다 보니.”
“다행이네.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데 다음에 그 사람 만날 때 내가 근처에서 지켜보거나 그러면 안 될까?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사람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보니까 유용한 조언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사실은 걱정이 좀 되어서 그래.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꾹 참았다.
“잘됐군요. 마침 저녁에 단둘이 보기로 했거든요. GPS 좌표를 전송하겠습니다. 저녁 7시 정각까지 오시죠.”
뜻밖에도, 마키나는 흔쾌히 승낙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