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46화
‘아비아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전함을 낙찰해야만 했을 텐데….’
우뢰같은 박수가 쏟아지는 경매장에서 푯말을 든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제2우주군 군단장.
그의 귀에 주위 사람들이 축하하는 소리는, 비웃음처럼 들리고 있었다.
“…….”
대체 무슨 생각으로 마지막 순간에 상위 입찰을 포기한 걸까.
군단장은 천천히 입찰을 포기한 아비아노의 홉고블린 대리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어?”
상대는 이미 자리를 뜬 다음이었다.
‘정말 돈이 모자라서 입찰을 포기한 건가. 아니야, 그럴 리는 없어. 직전까지 계속 경쟁을 이어갔는데. 아비아노는 행성의 모든 자금을 동원해 전함을 낙찰해야만 했다….’
오랜 세월을 전장에서 보낸 군인의 날카로운 직감이 경고하고 있었다.
“설마….”
자신과 바리타스는 함정에 빠진 걸지도 모른다고.
“맙소사.”
군단장은 그제야 어차피 자신들이 낙찰할 일이 없을 거란 생각에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던 화면의 숫자를 보았다.
18조 2,000억 굴덴.
충분히 나라 하나가 기울고도 남을 만한 금액.
당장 아비아노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바리타스 제국은 이번 경매를 계기로 크나큰 짐을 지게 되었다.
이미 군단장은 황제와 의회에게 예정된 예산보다 훨씬 적은 금액으로 이번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선언한 참이었다.
그런데, 일반적인 우주 전함의 몇 배는 되는 가격으로 전함을 낙찰하고 말았다.
이 사실은 이미 생중계로 본국에 알려졌을 터. 자신의 처우가 어찌 될지는 쉽게 상상이 갔다.
“경매 결과는 번복되지 않으며 낙찰자는 반드시 낙찰가의 절반을 금일 지불하셔야만 합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전함을 직접 가까이에서 구경해 보시죠.”
경매 진행자가 선언하자 총 든 경호원들이 다가와 군단장을 밖으로 안내했다.
군단장은 이러한 에스코트가 진짜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낙찰가의 절반이 금일 입금되지 않는 이상 리베르토티를 떠날 수 없다는 경고라고 생각했다.
“큭….”
포기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자신 없이는 제2우주군은 움직이지 않는다.
전함 역시 어쨌든 낙찰하게 된 이상 실전에서 제대로 써먹어서 뽕을 뽑아야 옳다.
“빌어먹을 아비아노 자식들….”
고뇌하던 군단장은 기어이 스마트폰을 꺼내 본국에 기별을 넣었다.
9조 1,000억 굴덴의 입금을 부탁하는 연락.
당연히 일주일이 지나도록 연락은 오지 않았고, 리베르토티 측은 우주군 군단장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호텔에 ‘정중히’ 모셨다.
* * *
바리타스 제2우주군 사령관이 고통받는 동안에도 세상은 돌아가고 있었다.
리베르토티를 상대로 바리타스 제국 의회가 낙찰을 취소해달라고 사정 사정 했지만, 주 바리타스 리베르토티 대사는 누가 칼 들고 입찰하라고 협박했냐고 되물었다.
여론은 이미 바리타스에게 등을 돌렸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리타스 황제와 의회의 무한 팽창주의와 과욕에 오만 정이 뚝 떨어졌다고 말하는 중이었다.
바리타스에서 주로 채굴되는 대체 에너지 원료인 아벨바늄 역시 불매운동이 일어나며 시장에서 외면받기 시작했다.
다만 모두가 바리타스를 비웃는 와중에도 제국을 향해 무한한 감사와 존경을 표하는 이들은 아직 상당수 남아있었다.
물론, 그들이 딱히 바리타스 제국의 전쟁광 기질을 사랑하는 건 아니었다.
그들이 바리타스에게 감사하는 이유는 단 하나.
<아ㅋㅋㅋ미친 놈들 거기서 상위 입찰을 박아버리네ㅋㅋㅋ>
<ㅋㅋㅋㅋ그만 웃어ㅋㅋㅋㅋ쟤네 우주군 군단장인가 하는 양반이 18조 2,000억 입찰하는 상남자라서 우리가 오늘도 스테이크 코스 디저트까지 달달하게 먹고 배 두드릴 수 있는 거다ㅋㅋㅋㅋ>
바로, 그들이 온라인 베팅 사이트에서 바리타스가 우주 전함 머큐리 유니콘 호를 낙찰할 거란 쪽에 돈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바리타스 제국과 아비아노 공화국 중 전쟁의 승패를 결정할 우주 전함을 낙찰하는 쪽을 맞추는 승부는, 범차원 세계에 온라인 베팅이 자리잡기 시작한 이래로 가장 많은 금액이 집계된 내기였고, 많은 사람들이 돈을 잃거나 땄다.
경매 당일 경쟁률을 살피면 아비아노 공화국의 낙찰에 베팅된 금액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내막을 아는 이들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잘 알고 있었다.
바리타스 우주군에서부터 퍼지는 ‘돈 되는 정보’는 순식간에 정부 고위 관료와 황족, 귀족들에게까지 퍼졌고 그들은 거액을 들여 아비아노의 낙찰에 베팅했다.
우주군 내부에서 승인된 작전으로 인해 바리타스 제국이 전함을 낙찰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게 VIP들에게 돈 정보였던 까닭이다.
이러한 인사이더 정보의 유출 정황을, 근거는 없지만 오래된 도박꾼의 직감으로 캐치해낸 사람들 역시 그 뒤를 따랐다.
경매 당일, 정보를 얻은 이들은 우주군 군단장이 적극적으로 입찰을 이어가는 것 역시 낙찰가를 최대한 끌어올려 아비아노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주기 위한 페이크라고 생각했기에 그저 안심하고 있었다.
바로 그랬기에, 18조 2,000억 굴덴이란 말도 안 되는 가격까지 낙찰가가 올라가도 그저 남의 일이려니 하고 아비아노가 쓸모없는 고철덩이를 비싼 값에 강매당하는 꼴을 보며 비웃어줄 생각이었다.
이대로 가면 아비아노 정부는 20조 굴덴이 넘는 가격에 우주전함을 사야만 할 것이고, 그래봤자 전쟁은 바리타스의 승리로 막을 내릴 것이다. 바리타스는 이미 고작 몇 조 굴덴의 대가로 아비아노의 차원 결계를 관리하는 이들을 매수하는 데에 성공했으니까.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
18조 2,000억 굴덴에 바리타스 우주군 군단장이 입찰한 직후, 아비아노의 대리인은 그대로 상위 입찰을 그만두었다.
마치 어디까지든 따라가겠다는 기세로 푯말을 들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아비아노의 대리인을 맡은 정체불명의 홉고블린은 낙찰가가 예상한 고점에 도달하기 직전에 하차를 선언했고, 홀로 남은 바리타스 측이 모든 것을 짊어지게 되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사태.
아비아노의 낙찰에 베팅한 이들은 모든 돈을 잃었고, 이유야 어찌됐든 바리타스의 낙찰에 돈을 건 이들이 판돈을 몇 배로 불렸다.
하룻밤 만에 범차원 세계 여기저기에서 졸부와 벼락부자가 여럿 탄생했다.
초반과 후반 모두 경매에 출품한 매물의 낙찰가가 예상보다 훨씬 낮게 나와 고뇌하던 리베르토티 정부는 기대 이상의 가격으로 팔린 전함을 보고 슬픔을 떨쳐냈고, 무슨 일이 있어도 경매 결과를 번복하지 않겠다며 범차원 세계 전체에 선언했다.
최대한 상위 입찰을 따라가다 포기한 그림도 아니고, 아비아노가 먼저 나가떨어진 상황.
만일 여기서 선금 9조 1,000억 굴덴을 입금하지 않는다면 아비아노가 자신들의 속셈을 눈치챌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깨달은 바리타스 의회는 장장 일주일하고 하루에 달하는 회의와 심의를 거친 다음에야 뒤늦게 리베르토티에게 돈을 건넸다.
그제야 리베르토티는 바리타스 최강을 자랑하는 제2우주군의 군단장을 우주 전함에 태워 바리타스에 배송했다.
그리고, 일련의 코미디를 지켜보던 이들 중엔 이 모든 상황을 예견하고 있던 자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차원신용금고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의 대리 김지안과 그의 동료들 말이다.
* * *
“완벽하게 계획대로 흘러갔네요.”
경매가 끝나고 일주일하고 하루가 지난 오늘, 마침내 리베르토티 정부가 선금 9조 1,000억 굴덴을 받고 우주 전함을 바리타스 본국으로 보냈다.
온라인 베팅 사이트에서 집계된 판돈은 모두 수수료를 제외하고 승자에게 분배된 상황.
이 과정에서 나와 주위 사람들, 그러니까 아비아노의 대리인 자격으로 경매에 참여한 클렛이라든지, 아비아노 정부라든지, 래리어트 가문 등은 상당한 수익을 올리는 데에 성공했다.
그 방법은 당연히 너무나도 정직하게 바리타스의 낙찰 성공에 베팅하는 것이었다.
“생각한 대로 움직여주었군.”
짭짤한 부수입을 올린 게 마음에 드는지, 엘라마 소장 역시 사나운 미소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건 사전에 그의 직무권능을 사용해 아비아노의 결계를 관리하는 이들이 배신을 결심했다는 사실을 알아챈 덕분이었다.
“소장님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아비아노 측이 진짜로 전함을 낙찰해야 했을지도 몰라요.”
“고객이 허튼 데에 돈을 쓰게 하지 않도록 조언하는 것도 은행원의 일이라고 할 수 있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만일 창구에 순박한 할머니가 와서 보이스 피싱범에게 갖다 줄 현금을 인출하려 하면 나였어도 말렸을 테니까.
그리고.
리베르토티에게 굳이 비싼 돈 주고 전함을 사지 않아도 전쟁을 막을 방법이 있는데, 굳이 큰돈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이다.
바리타스가 방공 사령부의 모 대대 지휘관과 휘하 장교들을 매수하려 한 정황은 이미 파악했고 증거 수집도 끝났다.
그들이 바리타스에게서 받아낸 수조 굴덴의 뇌물은 절반이 아비아노의 국고에 환수될 것이고, 나머지 절반이 차원신용금고가 바리타스에게 빌려준 채 돌려받지 못하고 있는 원금과 이자에 해당하는 손실을 채우는 데에 사용될 것이다.
굳이 바리타스가 접근할 때까지 이를 방치해둔 건 미리 알아챘다고 티를 냈다간, 바리타스가 경계하게 될 게 뻔했던 까닭이다.
바리타스는 리베르토티에게 9조 1,000억 굴덴을 뜯겼고 잔금을 치를 돈이 국고에 남아있지 않다.
잔금은 2주 내로 치러야 하니까 그들은 곧바로 우주 전함을 끌고 와 아비아노를 수탈해 필요한 돈을 얻으려 할 것이다.
침공을 서둘러야 하는 이상 놈들은 우주 전함의 시스템을 꼼꼼하게 살펴 안에 심겨진 마키나의 조각까지 발견할 정도로 여유롭진 않을 터.
침공 당일에야 놈들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협조하기로 한 아비아노의 군인들은 결계 개방 직전에 체포될 것이고.
기껏 비싼 돈 주고 가져온 우주 전함은 이미 정체불명의 해커의 손에 떨어져 제대로 운용할 수 없는 상태에 처하게 되었음을.
“기대되네요. 예상할 수 있는 손실 금액만 벌써 25조 가까운데.”
“전쟁 배상금까지 생각하면 못해도 도합 35조 굴덴은 토해내야겠지.”
무슨 짓을 해도 이미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막대한 군사력을 자랑하며 주변 국가를 위협해오던 바리타스 제국이라는 거대한 배는 평화와 상업을 중시하는 경제대국과 그들에게 협조 중인 은행원, 그리고 브로커 몇몇의 손에 의해 침몰 직전까지 내몰려 있었지만.
“아직 위기 의식도 뭣도 없는 걸 보니 그냥 헛웃음만 나오네요.”
우습게도 제국 측은 사태가 어찌 흘러가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행장님께는 이달 말까진 모든 게 끝날 거라고 보고해두도록 하지.”
“고생 많았소.”
“나름대로 즐거웠습니다.”
소장과 두 과장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다.
장장 한 달에 걸친 야근이 마침내 막을 내리려 하고 있었다.
“어우, 드디어 귀가인가.”
돌아가면 오랜만에 맥주 한 캔 따고 푹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