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6화 (136/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36화

“오랜만입니다, 지안 형제님.”

몇 달 만에 만난 이로울은 얼굴이 많이 핼쑥해져 있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던 윤기 나는 황금색 장발 역시 은행원다운 깔끔한 단발로 변해 있었는데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나로선 그러한 변화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것이었다.

“어어. 오랜만이야. 근데 괜찮아? 몸 상태 좀 안 좋아 보이는데.”

내가 묻자 이로울은 말없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괜찮다며 날 안심시키고 싶은 모양인데 전혀 그리 보이지 않는 걸 어떡하나.

밀라한테 듣기로는 한 달 정도 근신 처분당했었는데 그게 영향이 컸나 보다.

물론, 충분히 이해는 갔다.

아무래도 이로울을 포함한 감사부의 천사들은 도덕적으로 고결한 족속들이고 과거 대전쟁 시대의 기억을 트라우마처럼 여기고 있다 보니.

이로울은 저번에 출장 갔을 때 테러리스트의 공격에 자극을 받아 심판의 천사로서 지닌 권능을 해방하고 도시 하나를 괴멸시키기 직전까지 폭주했다.

만일 때마침 콜로서스에 탑승한 정령들이 이로울을 막지 않았더라면 나도, 엘라마도, 구C 행원들도, 의사 선생님도, 여자아이도, 그 지역에 거주하는 수많은 언데드들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로울은 자신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일어난 폭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워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차라리 무거운 벌을 받았다면 그의 마음도 편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로울이 받은 처분은 고작 한 달 동안의 근신.

이유는 당연히 이 모든 일이 구E 파벌의 행원들이 꾸민 거란 사실을 이사회가 참작해 준 까닭이다.

물론 구E가 일을 저질렀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기에 책임을 물을 수는 없었지만.

어디까지나 나 개인의 예상이긴 한데 구E 이사들은 이로울에게 덤터기를 씌우기 위해 강력한 처벌을 요구했을 것이다.

그것이 무산된 이유는, 이를 반대하는 이들이 이로울에게 중도의 징계를 내렸다간 이로울이 본점 건물과 린딘 시가지를 잘게 썰어 버릴 거라고 주장한 덕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예상해 본다.

“모처럼 주말인데 우울한 모습 보여서 죄송해요.”

이로울은 애써 부드럽게 웃으며 내게 사과했다.

“괜찮아. 힘들었던 거 다 알아. 완전히 이해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커피잔을 들이켰다.

우리가 있는 곳은 키키와이 차원 공항의 커피숍.

이로울은 본점 감사부의 지시로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의 비정기 감사를 지시받고 혼자 항공기를 타고 내려온 참이었다.

물론 이는 이로울에게 맡길 진짜 업무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아직 이로울은 이 사실을 모르지만, 곧 알게 될 것이다.

“정말로 알고 계신가요?”

“힘든 거지? 본인의 실수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뻔했던 게.”

“네.”

고개를 떨군 이로울의 표정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자꾸만, 그날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분노가 저를 잠식하는 감각이 떠오릅니다. 잠에 들 때마다 대전 시절 제가 정의라고 신봉했던 이름 아래 휘두른 검에 베인 이들의 원한 어린 눈동자가 저를 노려봅니다. 그들은 눈을 감지도, 깜빡이지도 않아요. 말을 하진 않지만 자꾸만 제게 묻습니다. 그들의 피로 이뤄낸 평화가 그리도 감미로운지.”

이 정도 되면 정신과 상담부터 받아 봐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한시가 시급한 이 시점에서 중요한 전력인 이로울을 보내 줄 수는 없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신은 내게 있다.

이번 일은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니, 이로울의 죄책감을 덜어 줄 수 있을 거란 나이브한 확신이.

“편해지고 싶어?”

“…네.”

“그럼, 잘됐네.”

“무슨 뜻이죠?”

“금방 알게 될 거야. 슬슬 출발하자.”

나는 이로울을 태우고 업무용 차량을 몰았다.

* * *

다음 날.

더 래리어트 키키와이에 묵게 된 이로울은 호텔에서 출퇴근 중인 우리의 모습을 기괴하다는 듯 쳐다보며 함께 다차원 출장소로 향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출장소의 일 처리는 깔끔하다.

나랑 아이작도 짬이 꽤 쌓인 데에다 두 과장과 엘라마까지, 업무 면에서 트집을 잡을 곳이라곤 하나도 찾을 수 없던 덕에 아이작의 감사 업무는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이 정도면 경이롭다고 해도 되겠군요.”

“그래?”

“다른 지점에선 상상도 못 할 일입니다. 다들 무언가 하나쯤은 감춰 둔 문제가 나오는 법이거든요.”

이로울은 어제보다 훨씬 밝아진 표정으로 말했다.

모처럼 동기인 나와 아이작을 만나기도 했고, 굳이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에 관해 좋지 않은 이야기를 보고서에 적을 필요도 없어져서 저러는 게 아닌가 싶었다.

물론, 이대로 이로울을 린딘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다.

그는 5일 동안 이곳에 머무를 예정이다.

그동안 이번에 바리타스의 마수에서 아비아노를 구하기 위한 작전의 골자를 설명한 다음 작전에 실제로 참가하도록 설득해야만 한다.

천사의 윤리관을 고려하면 다른 업무를 위해 입행했는데 전혀 상관없는 목적을 위해 무력을 휘둘러야 하는 상황이니 거절할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비밀병기라고는 생각하고 있지만 당사자인 이로울이 동의해 주지 않으면 작전의 난이도가 큰 폭으로 상승할 터.

어떻게든 이로울을 설득해야만 한다.

우리 중에 폭탄 설치 같은 잔재주를 부리지 않고 전함을 일도양단할 수 있는 건 태생이 강력한 생체병기인 그 정도밖에 없으니까.

“이로울, 이따 밤에 시간 돼? 같이 밥이나 좀 먹으러 가려는데.”

“음… 감사 업무차 나온지라 본래는 지점과 출장소의 행원과 식사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긴 합니다만….”

“에이, 그냥 동기끼리 밥 먹는 건데. 뭐.”

“대리님 나도 끼어도 돼?”

그때였다. 아까부터 어딜 갔는지 코빼기도 비추지 않던 플루토가 얼굴을 드러낸 건.

그녀를 마주한 이로울은 얼빠진 표정으로 입을 한동안 벌리고 있다가 우리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 김지안 형제님.”

“갑자기 무슨 일이야.”

“어째서 플루토 여신님이 이런 곳에 계신 거죠?”

“…어어, 그건 사정을 설명하면 조금 긴데.”

“대리님, 나도 가도 괜찮은 거지?”

“음, 어어, 응. 플루토 씨도 와도 돼. 그치? 아이작. 이로울.”

이미 이로울이 플루토의 정체를 알아 버린 이상 거절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왜 우리끼리 모처럼 즐거운 시간 보내고 상사 뒷담도 까겠다는데 여신이 끼어드는 거야.

분위기 좀 편해져야 이런저런 얘기 꺼내기도 쉬운데.

* * *

그런 내 걱정은 저녁이 되자 전혀 쓸모없는 것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도와줄 거지?”

“예. 신께서 분부하신 일을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뜻밖에도 이로울은 순순히 제안에 응해 주었다.

신의 명령이어서인지, 아니면 새로운 침략전쟁의 민간인 피해를 줄여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서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이미 이로울은 이번 작전에 참가하겠다고 흔쾌히 승낙해 주었다.

“감사부 선배 형제자매님께선 어째서 제가 혼자 키키와이로 건너가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던데, 과연 이런 사정이 있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감사부장도 자세한 건 모를 거야. 언니 지시를 따라 행동했을 뿐이니까.”

플루토의 말에 이로울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울이 도와주겠다고 하니까 든든해지네.”

“별말씀을요. 그런 우주 전함이 존재한다니. 만일 바리타스가 경매에서 그걸 낙찰한다면 아비아노는 불바다가 될 겁니다.”

“맞아. 결사 항전을 표명한 상황이니까 전면전에 돌입하면 쌍방에 굉장한 피해가 일어날 거야.”

“대전을 한 번 경험한 사람으로서 그런 일이 생기게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든 전함의 차원 결계 해제 기능을 망가뜨려 보죠.”

“아예 전함 자체를 부숴 버려도 돼.”

“능력이 닿는다면 시도해 봐야겠죠, 그건.”

“그래.”

층 하나를 통째로 사용한 바에서 우린 술잔을 치켜들었다.

“아비아노의 평화와 안전한 대출금 회수, 그리고 고객의 자산 보호를 위하여.”

이미 과타노차와 마키나가 리베르토티의 거짓 수리 요청을 낚아채 군수 업체인 척 AS를 접수하고 수리기사팀을 파견하겠다고 답변했다.

결행은 모레. 기회는 단 한 번뿐.

-쨍

“위하여.”

이 바보 같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선, 합법이든 위법이든 가릴 생각은 없다.

* * *

과타노차가 특정한 번호로 건 통화를 전부 중간에서 가로채 음성변조와 함께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하루.

마키나가 통신망에 심은 백도어의 성능 역시 탁월하기 그지없어 그다음 날엔 곧바로 리베르토티의 영토 전체에 통화를 납치하기 위한 준비가 끝났다.

이틀 동안 구축된 함정에 리베르토티의 관료는 곧바로 걸려들었다.

그는 정기 점검이랍시고 AS를 부탁했고 심각한 기능 고장이 발생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모든 것은 군수 업체의 수리팀을 서둘러 불러들이기 위한 행동.

AS 일정을 잡자마자 우리는 서둘러 수리기사로 변장해 파괴 공작을 진행할 팀을 짰다.

과거 대전쟁 시대 군 출신 용병으로 악명을 떨치던 하얀 사신 불파사 비슈티.

여전히 그 정체를 알 수 없지만 비슈티를 비롯해 구E 행원들이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는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의 수위 영감님.

감사부 대리이자 역시나 대전쟁 시대의 영웅인 심판의 천사 이로울.

그리고 마지막이, 바로 얼마 전 은행에 대출을 받은 신혼부부를 쫓아다니며 끔찍한 테러를 자행했던(그것이 비록 누군가에게 속아 벌인 것이라고 해도) 사상 최악의 살인청부업자, 요하네.

“반가워, 다들.”

저번에 봤던 것과는 또 아예 달라져 버린 요하네는 싱글벙글 웃으며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와 한 번 전투를 겪어 본 비슈티는 공동 전선을 펼치는 게 영 껄끄러운지 철저하게 인사를 무시하고 있었다.

“당신이 요하네 형제님이시군요. 악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대전쟁 시절에도 저희 군의 상층부에도 침투해 암살을 일삼으셨던가요?”

“너무 그렇게 땍땍대지 말라고. 나는 그냥 돈을 받고 일했을 뿐이라니까.”

보아하니 요하네와 악연이 있는 건 비슈티 과장만이 아니었던 듯하다.

이로울 역시 옛날에 요하네가 벌인 일로 인해 곤란한 상황에 처해 본 듯한데,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활동했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유전자 레벨로 몸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그 능력, 확실히 편리하긴 한 모양이다.

물론, 내게 그런 힘을 준다 해도 전혀 기쁠 것 같진 않다.

변신 과정이 얼마나 징그러운지는 저번에 봐서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그, 혹시 몰라서 말해 두는 건데. 절대 우리끼리 싸워선 안 되는 거 다들 알고 있는 거 맞죠?”

“그럼요, 지안 형제님. 아무리 역겨운 상황이 닥치더라도 저는 사람을 해할 생각이 없습니다.”

“나야 돈 받는 거 아니면 딱히 누구 멱 따고 싶지 않아 하는 평화주의자인 거 잘 알잖아.”

“…….”

비슈티의 안광이 벌써부터 날카롭다.

정말 이 멤버들을 보내도 괜찮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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