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33화
“뭐, 이 정도면 합격으로 쳐도 괜찮으려나.”
클렛은 특유의 짐승 같은 웃음을 내비쳤다.
일전에 눈치챘던 대로 그는 상당히 음험하고 계획적인 구석을 지니고 있었다.
절대, 껄렁대는 태도와 날티가 물씬 나는 외모만 보고 되는 대로 사는 멍청한 사내라고 짐작해선 안 되는 상대.
만일 우리 중 하나가 별생각 없이 도움을 청했다면 클렛은 우릴 잠재적 파트너가 아니 그냥 섬에 관광 온 손님 정도로 취급하며 밥 몇 끼 먹이고 카지노 칩을 적당히 쥐여 준 다음 돌려보냈으리라.
“거기 있는 형씨가 짬으론 제일 아래인 거 같은데, 생각보다 눈치도 잘 보고 나쁘지 않네. 좀 치는 행원들만 모인 출장소라서 그런가.”
칭찬인데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좋아지진 않았다.
아마도 클렛의 목소리에 벤 오만한 태도와 기타 등등이 원인일 테지.
“감사합니다.”
그래도 어쩌겠나. 꼬우면 내가 때려치워야 하는 것을.
일단은 고객님 칭찬이니까 감사히 리액션 취해야지.
내 월급은 고객님이 예금해 주시고 금융상품 사 주시고 프라이빗 뱅킹 관련 수수료를 내주시기에 존재할 수 있는 거니까.
“근데 형씨, 혹시 나랑 일할 생각 없어?”
“…네?”
“형씨 지금 직급이 뭐야.”
“대리… 입니다만.”
“이름이 뭐랬지?”
“김지안입니다.”
“김지안 씨 대리 월급이라고 해 봤자 쥐꼬리만큼도 안 될 텐데 그냥 내 밑에서 일하는 게 어때. 모르긴 몰라도 여기 청소부 월급이 거기 있는 언데드 과장 급여 비슷할걸? 아. 미안. 이젠 언데드가 아니었지?”
딱히 도발할 의도는 없어 보이지만 그냥 말하는 본새 자체가 남들을 자극하는 클렛의 화법 탓에 나는 화를 참아야만 했다.
딱히 라즈마 과장에게 정든 것도 아니지만 같은 행원으로서 저런 소리를 하게 놔두는 건 상당한 스트레스였기 때문이다.
“고객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외람된 말이면 하지 마. 좋은 날인데 왜 굳이 스트레스 주려고 그래.”
“…….”
대놓고 꼽을 주는 걸 보니 거저 도움을 받으려 했던 우리에게 면박을 주어 관계를 재정의하려는 모양이었다.
“착각하지 마. 댁들이 그때 위조지폐에 관해 알려 준 건 나를 배려해서가 아니잖아. 서로 최대한 이득을 보기 위한 행동이었어, 그건. 결과적으로 내가 위기를 모면한 것도 사실이니까 이 정도로 끝내 두는 거야. 그때 진 신세는 댁에 예금 계좌 개설하고 현금 4조 굴덴을 맡긴 거로 갚았어. 아직 내 진짜 자산은 움직이지도 않았다는 걸 명심하라고. 날 움직이기 위해선 상응한 대가가 필요해. 이건 내 욕심도 뭣도 아니야. 그 누구도 알 아이프 가문을 가벼이 보아선 안 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어도 그건 달라지지 않아. 우린 범차원 세계 최고의 중재자이고 모든 비밀스러운 거래를 수호하는 이름. 나라 하나를 지키고 싶다면 댁들이 아니라 국가 원수를 데려오라고.”
분위기를 파악한 라즈마와 내가 입을 다물자 클렛이 느긋한 어조로 우릴 성토했다.
베테랑 중의 베테랑인 라즈마 과장도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얼떨떨한 표정으로 듣고만 있었다.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표정을 살필 수 없던 예전보단 훨씬 지켜보는 맛이 생겼다.
강제 포커페이스 해제. 이쪽이 훨씬 사람 냄새가 나는군.
“알겠어. 우리가 경우가 없던 건 인정할게.”
한편, 우리 중에서 가장 고귀한 혈통을 지니고 있는 플루토 여신께선 여전히 싱글벙글 웃으며 클렛과 대화를 이어 가려는 중이었다.
“내치지 않아 줘서 고마워. 차원신용금고 행장 오커스 디스파테르를 대신해서 감사를 표할게.”
“알면 됐어, 여신 아가씨. 식사 끝나면 섬 한 바퀴 돌면서 놀다 가라고. 비서한테 깍듯하게 수행하라고 지시해 둘 테니.”
클렛은 어디까지나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우릴 대했다.
아무래도 그가 굳이 이런 자리를 마련한 건 주도권 싸움을 위해서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아비아노의 대통령에게서 무언가 보수를 뜯어낼 생각이었는데 왜 굳이 우릴 여기까지 불러냈나 궁금했는데, 단순히 우릴 시험하는 것 외에도 앞으로 우릴 길들이려 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우리 중에서 직무적으로 가장 강한 발언권을 지니고 있는 건 라즈마 과장.
하지만 그(그녀라고 불러야 하려나, 솔직히 모르겠다. 살아 있을 당시의 성별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알 수가 없으니.)는 아까부터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유는 쉽게 짐작이 갔다.
철저히 고객의 요구에 맞춰 필요한 솔루션을 간구하던 그의 입장에선 먼저 주동적으로 나서서 무언가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애초에 주도권 싸움이 어떻게 흘러가든 그로선 클렛의 협조만 얻어낼 수 있다면 일을 마치는 셈이다.
라즈마 과장은 굳이 필요 없는 말을 짜내는 유형이 아니다. 지금도 조용히 마음속으로 계산을 마치는 중이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피식
라즈마 과장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무언가를 확신하고 있는 듯한 얼굴.
아까 봤을 땐 클렛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굴더니, 설마 전부 연기였던 걸까.
“에이, 됐어. 성의 표시를 해야 하는 건 이쪽이니까.”
“아가씨가 뭘 줄 수 있다고 그런 얘길 하는 거야?”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클렛과 플루토 씨는 계속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라즈마의 얼굴에 걸린 미소는 계속해서 진해지고 있었다.
설마, 전부 라즈마가 세운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는 걸까.
“이미 부자니까 딱히 필요할 것 같진 않지만 신언神言으로 축복을 내려 줄까 해.”
“……?!”
다음 순간, 플루토의 입에서 나온 말에 클렛이 반응을 보였다.
“방금 신언이라고 했나.”
“응 맞아.”
“허….”
클렛은 웃고 있었다.
아까 보인 사나운 미소와는 다르다.
정말로 무언가를 기대하며 드러낸 웃음.
“그래. 처음부터 이랬어야지. 신언으로 축복해 준다고? 차원신용금고는 이번 일에 명운까지 걸어 버린 모양이군.”
무슨 뜻인지 정확히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하나 확실해진 게 있다.
우리가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하던 클렛이 저렇게 눈을 빛내고 있다는 건 큰 흥미를 느꼈다는 거다.
이쪽이 활용할 수 있는 패가 늘어났다는 뜻.
‘신언…. 저번에 경험한 그 힘인가.’
세계수 담보 대출 당시 나는 신언의 힘을 체험했다.
당시, 나는 오커스 디스파테르 행장님이 적어 준 메모를 소리 내서 읽었다.
내 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날 여신이 적은 글자에 깃들어 있던 힘이 세계수의 뿌리에 작용했고, 거기서 힘을 얻은 바람의 정령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다.
하지만 이번엔 평범한 인간인 내가 남이 적은 신언을 읊는 게 아니라 신의 혈통인 플루토 디스파테르,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에서 텔러로 근무하는 여신님께서 직접 신언으로 축복을 내리신다지 않나.
“…….”
그게 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그동안 우리에게서 기대할 게 없다는 듯 굴며 아비아노의 스틸레토 대통령에게서 이것저것 뜯어낼 생각만 하던 클렛이 눈을 반짝이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필시 대단한 일이 틀림없다.
“그렇군. 여신이 굳이 여기까지 온 건 내게 축복을 내리기 위해서인가. 오커스 행장도 대단한 카드를 꺼내 들었군. 이 정도 성의를 보인다면 나도 마땅히 보답을 해야겠지.”
“이쪽 요구를 받아들이기 전까지 축복은 없어.”
“그럼. 당연한 소리를. 나도 그 정도 상도덕은 있다고.”
나는 클렛의 눈동자에 탐욕스러운 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이 사람, 틀림없이 예정대로 스틸레토 대통령 털어먹은 다음 거기에 추가로 축복까지 받아 갈 생각이다.
근거는 없지만 본인이 챙길 수 있다면 뭐든지 탐욕스럽게 낚아채는 유형의 인간.
물론, 우린 은행원이니까 그런 욕심 앞에서도 꼿꼿하게 윈윈 가능한 방안을 내놓아야만 하고.
“대가는 스틸레도 대통령께 받으신다니 다행입니다. 저희 ‘플루토 여신님’께서 무려 신언으로 축복을 내리심으로써 성의를 보이신다 하시니 클렛 고객님께서 이번 사태를 해결하는 데에 있어 충분한 도움을 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하…. 사람 애태울 줄 아네, 형씨.”
굳이 직감이 날카롭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주도권은 이미 우리에게 천천히 넘어오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한 보상을 플루토가 제시한 순간, 클렛은 자신이 그것을 탐낸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드러냈다.
이미 속내를 내비친 이상 포커페이스는 무용지물.
클렛 역시 더는 자신이 축복을 원한다는 것을 감추려 들지 않는 눈치였다.
“하여튼 협잡꾼이 따로 없다니까. 누구 그림인지는 잘 알겠군그래. 구C 행원들이 그렇게 음험하다고 주의하라 들었는데, 나도 아직 멀었군그래.”
클렛은 억울하다는 듯 퍽퍽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 시선은 정확히 라즈마를 향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있었군. 날 아비아노의 대리인 자격으로 경매에 세우는 것 외에도 다른 식으로도 써먹으려 한 거야. 그렇지?”
“써먹다니, 말이 지나치십니다.”
장난스럽게 묻는 클렛의 말을 받아친 건 엑토플 라즈마 과장이었다.
작은 몸뚱이에 날카로운 흉계를 지닌 오프쇼어 뱅킹의 총아.
음험하다 소문난 구C 행원 중에서도 가장 고객을 자유자재로 구워삶는 데에 특화된 그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계를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저는 어디까지나 고객님께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오프쇼어 뱅커. 그리고 범차원 세계가 제아무리 넓다 해도 여신의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안배할 수 있는 건 차원신용금고의 프라이빗 뱅킹 서비스 외엔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상호 간의 이익을 위한 이야기니까 천천히 고민해 주시죠.”
“…뭘 원하는 건데.”
“아까 말씀하셨죠? 진짜 자산은 아직 움직이지도 않았다고요.”
“그래. 4조 굴덴은 어디까지나 현금 자산. 당신네 차원신용금고에 모든 걸 맡긴 게 아니라는 거지.”
“잘됐군요. 그 ‘4조 굴덴만으로도’ 이번에 충분히 큰 수익을 내실 수 있으실 듯하니.”
“무슨 뜻이야, 그게.”
“말 그대로입니다.”
잠시 뜸을 들이던 라즈마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반년 내로 4조 굴덴을 5조로 바꿔 드리겠습니다.”
* * *
다음 날.
차원신용금고의 프라이빗 뱅킹 섹터에선 40년 만에 새로운 기록이 탄생했다.
기록을 수립한 건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의 엑토플 라즈마 과장.
조력자는 동 출장소에 근무 중인 정식 행원 김지안 대리와 텔러, 플루토 디스파테르.
그리고 기록의 내용은―
[대외비.]
[비공식 전쟁 채권 매입.]
[액수: 4조 굴덴.]
[매입자: 알 아이프 클렛.]
이는 다른 구C 행원이 과거 세운 기록보다 몇 배는 높은 액수.
앞으로 백 년은 족히 깨지지 않을 신기록이 수립되었다.
이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 토대가 되어 줄 종잣돈.
차원신용금고와 아비아노 공화국의 탄창에 4조 굴덴의 거금이 장전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