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2화 (132/200)

ㅅ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32화

승강기를 타고 도착한 곳은 호텔 꼭대기 층의 사무실이었다.

알 아이프 집안의 사람들은 딱히 래리어트 가문 구성원들처럼 호텔의 스위트룸을 거처로 사용하는 건 아닌 듯했는데, 아무래도 그들이 맡고 있는 일의 특수성을 고려해 테러에 취약한 고층 빌딩 최상층을 피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벽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없고 층 전체를 통유리가 감싸고 있는 사무실은 태양 빛으로 인해 더울 법했지만 강력한 냉방이 적절한 기온을 유지해 주고 있었다.

쾌적하기 그지없는 환경. 무슨 냄새인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좋은 향기가 공기 중을 감돌고 있었는데 사람을 릴랙스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오랜만이군, 은행원.”

멀리서 부하들을 거느린 알 아이프 클렛이 손을 흔들었다.

그는 고작 서른에서 마흔 사이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은행에 현금만 4조 굴덴을 예금할 수 있는 거부.

재수 없는 말버릇이 트레이드 마크였지만 그때 우리의 도움을 받고 충분한 의리로 답했던 사람이었던지라 나는 깍듯이 예의를 지켜 인사를 했다.

“언제나 당행의 서비스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알 아이프 클렛 님.”

우리 중 선두에 선 라즈마 과장 역시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클렛에게 고개를 숙였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어. 일단 앉아. 뭐든 먹어야 할 거 아니야.”

“기내식 먹었는데?”

클렛이 권했지만 눈치라곤 하나도 볼 줄 모르는 우리 플루토 여신께선 한 손으로 배를 두드리며 대답했다.

“…실례했습니다. 좀 저희랑 사고방식이 달라서….”

“아. 맞다, 그쪽에서 일하는 여신이랬지? 행장 사촌이라던가 뭔가.”

“여동생 되시는 여신님이라고 합니다.”

클렛의 곁에 있던 비서가 목소리를 낮춰 정정했다.

“그래, 동생. 오케이. 어쨌든 뭐 좀 들어. 요깃거리랑 간단하게 이것저것 준비해 뒀으니까.”

“디저트도?”

“당연하지.”

플루토는 디저트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순순히 클렛이 시키는 대로 근처의 소파에 앉았다.

-딱!

클렛이 손가락을 튕기자, 대기하고 있던 장갑 낀 사용인들이 테이블을 설치하더니 수레를 끌고 와 음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아까 클렛이 준비해 준 전용기에서 꽤나 호화로운 조식이 준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몇 입 먹지 못했다.

부자 손님을 만나러 가는 게 긴장되어서가 아니라, 그를 만나 협상에 성공하지 못하면 이번 계획의 가장 중요한 단계에서 넘어지게 될 거란 생각에 밥이 넘어가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클렛이 이렇게 시간을 내준 것에 더해 식사까지 준비해 주었는데 거절한다면 어떻게 될까.

모르긴 몰라도 대접해 준 입장에서 상당히 기분이 나빠질 가능성이 높겠지.

나란히 앉은 우리 셋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보아하니 플루토를 여신 취급해 주며 리무진까지 의전용으로 준비한 건 클렛의 지시에 의한 게 아니라 그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알잘딱’ 한 결과.

냉철한 비즈니스 홉고블린 클렛은 여신이 직접 찾아왔다고 해서 딱히 자신의 결정을 바꾸거나 특별 대우를 해 줄 것 같진 않았다.

저번에 우리가 그에게 위조지폐에 관해 알려 준 건 그에게 있어 상당히 의미 있는 도움이었을 것이다.

차원신용금고에 계좌를 만든 건 그 나름의 의리 표시겠지만 제대로 보답을 받은 기억은 없다.

클렛 역시 우리에게 신세를 졌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이렇게 부탁하고 싶다는 연락을 했을 때 흔쾌히 자신의 근거지로 우릴 불러들인 거겠지.

…근거지라고 표현하니까 갑자기 그가 악의 수괴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어쨌든.

“그래. 오늘은 무슨 볼일이 있어서 찾아온 거야? 그쪽, 오프쇼어 뱅커야 우리 영감님이 살아 있던 시절부터 계속 들락날락하던 건 알고 있지만. 여신님이랑 신입 행원이 같이 따라온 이유가 뭔지 도대체 짐작이 가지 않아서 말이지.”

전채 요리를 빠르게 비운 클렛은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누런 눈동자를 빛내며 물었다.

그동안 나도 나름 은행원으로서 짬이 쌓인 덕에 클렛의 얼굴만 보아도 몇 가지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 있었다.

식사하는 손이 빠른 건 그가 지금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주었거나 평소부터 시간을 아끼며 살고 있다는 뜻.

돈이 저 정도로 많으면 급할 것 없이 타인을 자신의 스케줄에 맞출 수 있을 테지만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

아무래도 그의 아버지에게서 이 섬을 물려받으며 처리해야 할 승계 작업을 비롯해 기존 인맥의 관계 정립, 배신한 동생과 그 파벌을 처리하는 등 여러 가지 골치 아픈 일들이 그를 괴롭히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돈이 많으면 으레 시간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왔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클렛은 그 흔치 않은 예외 중 하나에 해당되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그 외에도 또 하나, 내가 눈치챈 것이 있었는데.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건가요?”

“…저번에 만났을 땐 몰랐는데 형씨 은근 눈치 빠르네? 어떻게 안 거야.”

클렛은 엘라마를 방불케 하는 사나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야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바쁘신 분이 굳이 시간을 내준 건 저희한테 고맙다고 사례하기 위한 게 아닐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의전 관해서도 비서나 다른 사람 시키는 분이 그냥 선물 전하고 끝났으면 되는 일을 직접 만나서 대화하려 하신 점에서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죠.”

감정을 감추는 일 없이 흐뭇하다는 듯 웃는 클렛.

딱히 뭔가 말하려 하는 눈치는 아니어서 나는 그대로 말을 이었다.

“대충 알고 계신 거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째서인지 일견 불손해 보일 수도 있는 나의 언사를 제재하려 들지 않는 라즈마 과장.

보아하니 여기선 이 정도 태도를 유지하는 게 정답인 모양이었다.

“맞아. 형씨가 말한 대로야. 차원신용금고와 아비아노, 상당히 재밌는 건수를 물었더라고?”

이곳에 오기 전까지 확신하지 못했던 가설이지만 이렇게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니 알 것 같았다.

이 남자, 자신이 다스리는 왕국에 갇혀 사는 오만한 왕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양아치처럼 껄렁대는 언사와 행동은 어디까지나 자신을 경계하는 이들을 방심하게 만들기 위한 위장막.

클렛의 아버지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진 몰라도 라즈마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차분하고 냉철한 사람이었다고 들었다.

알 아이프의 가풍이 어떤지 정확하게 알 순 없어도 그들이 이 섬을 수백 년 동안 후리텐 정부의 간섭과 다른 여러 위협에서 지켜오며 어둠 속의 브로커로 활동할 수 있던 건 오랜 역사를 통해 완성된 위기 대응 매뉴얼과 기회를 잡기 위한 안목, 그리고 후계자를 양성하는 시스템이 완벽에 가깝다는 뜻이다.

고로, 클렛이 자신을 가벼운 사람으로 위장한 데엔 틀림없이 목적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흥미 분야 외에는 그 어떤 일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굴었지만 내가 직감한 대로 섬 밖의 세상 곳곳에 자신의 눈과 귀를 심어 둔 영민한 야수였다.

아비아노의 건은 행내에서도 절대적인 보안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아비아노가 바리터스에게 침공당하고 있다는 건 주지의 사실.

클렛과 그의 참모들은 이번 전쟁으로 인해 누가 이득을 보고 손해를 보게 될지 꼼꼼하게 분석해 아비아노와 운명공동체의 관계에 놓인 차원신용금고가 무언가 액션을 취할 것이라고 내다본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연락을 취한 시점에서 귀찮다고 내쳤거나 뭐든 적당히 호의를 보내고 이야기를 마쳤겠지.

자신의 시간을 무엇보다 우선시하며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철저히 돈으로 해결해 집중력을 잃지 않는다. 그것이 가진 사람들의 방식이니까.

“기왕 거기까지 추측해냈다면 내 대답도 이미 짐작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데. 어때, 형씨. 내가 지금 무슨 생각 하는지 맞혀 보는 건? 정답이라면 좋은 일이 생길 거야.”

“어려운 질문을 하시는군요.”

생각보다 상황이 곤란한 쪽으로 흘러갔다.

옆을 보니 라즈마 과장이 어째서 클렛이 자신에게 질문하지 않는 걸까 궁금하다는 듯 나와 고객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러게 말이다. 지금 알 아이프 클렛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도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일단 자기 사무실로 불러내 굳이 겸상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건 시간과 집중력을 우리에게 허락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일단 무슨 부탁을 해도 막무가내로 거절할 생각은 없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그가 정말로 위조지폐 건으로 진 신세를 우리를 도와줌으로써 갚으려 생각하고 있을까?

이 질문에는 쉽게 답할 수 없었다.

그동안 고객들, 특히나 법인 고객을 상대해 보며 느낀 일이었지만 탁월한 능력을 지닌 비즈니스맨의 사고방식은 일반적인 사람과 궤를 달리했다.

평범한 사람들, 개중에서도 선량한 이들은 호의를 호의로 갚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기브 앤 테이크는 세상의 법칙.

굳이 선량하지 않더라도 상대가 준 것에 비해 자신이 돌려준 것이 너무나도 적으면 관계의 파탄으로 이어진다는 건 유치원생이라도 알고 있는 진리.

하지만, 지배자의 위치에 선 이들의 사고방식은 전혀 달랐다.

그들은 언제나 준 것 이상으로 거두는 것을 즐겼고, 약간의 도움과 선물을 거창하게 포장해 상대에게 큰 선심을 쓰는 것처럼 위장하는 데에 능했다.

그들에게 있어 모든 것은 가치를 매길 수 있는 영역에 속해 있었고 호의는 더욱 큰 것을 수확하기 위한 투자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부유층의 진실을 염두에 두고 고려했을 때.

그들이 남의 호의를 평가 절하하고 자신의 보답에 과한 가치를 매긴다는 사실을 전제로 생각했을 때.

동생이 폭발 마법을 건 위조지폐를 사용해 꾸민 음모에서 클렛의 목숨을 살리고 4조 굴덴의 현금을 지키는 데에 우리가 준 도움은.

아비아노를 구하는 데에 필요한 그의 협조는.

과연 그의 마음속 저울 위에서 균형을 이룰 수 있을까?

‘손해 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지….’

클렛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이번 일에 엮이게 됨으로써 자신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게 될지 까다롭게 따질 것이다.

그리고, 고작 은행원에 지나지 않는 우리의 결정으로는 아비아노를 도울 경우 얻을 수 있는 보상을 감히 책정할 수 없을 거란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을 터.

그렇다면, 이 남자가 지금 나에게 자기 생각을 맞혀 보라는 질문을 던진 건 어째서일까.

이자의 마음속 저울이 대체 얼마나 자신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져 있을지 나로선 상상이 가지 않았다.

클렛이 대가 없이 아비아노를 도울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우리가 저번에 그에게 준 도움 갖고 이끌어낼 수 있는 보답은 그의 시간과 집중력, 그리고 약간의 호의를 얻어내는 게 한계.

본격적으로 그의 자본과 능력을 빌리기 위해선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고, 우리의 재량으로 정할 수는 없다.

“…….”

어쩌면 우린 이미 클렛에게 실수를 범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내게 질문을 던진 건 관계를 재정립하고 비즈니스를 시작할 기회를 주겠다는 의도일지도.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보나 마나 거짓과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이것은 일종의 테스트.

고객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고려해야만 한다는 기본 원칙으로 돌아간 나는 마침내 답을 찾았다.

내가 내놔야 할 답은 단 하나.

“감히 중간에 끼어 있는 은행원 주제에 고객님께서 얻을 수 있는 잠재적 이익을 훼손할 뻔했군요. 아비아노의 대통령을 설득해 만남을 주선하겠습니다. 이번 일을 도와주시는 대가로 얻게 되실 구체적인 대가는 두 분이 직접 정하시는 게 고객님께 가장 좋은데, 저희 생각이 짧았습니다.”

“잘 알고 있군.”

시험 통과. 클렛은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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