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1화 (131/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31화

드래곤 팰리스 아일랜드.

그레이트 후리텐의 수많은 해외 영토 중에서도 이상하리만치 낮은 지명도를 지닌 섬.

이 섬은 본토에서 비행기로 4시간 떨어진 키키와이 군도에서 출발해 남쪽으로 4시간을 더 비행해야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있었는데 놀랍게도 면적도 그리 넓지 않은 섬에 공항이 두 곳, 항구가 네 곳이나 있었다.

신기하게도, 행정 구역상 드래곤 팰리스 아일랜드는 린딘의 일부로 간주되고 있었다.

8시간 동안 날아가야 겨우 도착하는 곳인데 그런 장소가 어째서 수도의 면적에 포함되어 있는지는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지구에도 비슷한 케이스가 아예 없는 건 아니라 어떻게든 납득할 수는 있었다.

이런 연고로 섬에는 딱히 구청이나 그런 건물이 없었는데, 섬 전체가 특정 가문이 오랫동안 소유하고 있는 사유지였기에 가능한 일인 모양이었다.

애초에 섬 면적이 번듯한 정부 기관이 들어가기 애매하기도 하고.

이런 까닭에 드래곤 팰리스 아일랜드는 완전히 알 아이프 가문의 왕국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외부의 간섭이 차단된 사유지에선 거액의 자금이 오가는 모든 어둡고 밝은 거래가 진행되었다.

이 섬은 표면적으론 관광지로 위장되어 있는 데에다 리조트와 별장, 카지노가 존재하고 있어 인지도가 낮음에도 상당한 숫자의 부유층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었다.

이 섬에 진짜 큰 건수를 들고 찾아오는 이들은 그사이에 섞여 있었고, 후리텐 당국은 그들을 검열하거나 검문할 법적 타당성을 지니지 못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국가 정부 간의 거래에도 이 섬은 사용되었다.

범죄를 저지르고 망명 혹은 도주한 이의 신변을 양도하거나, 장관급 인사가 외교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등.

후리텐의 일부이되 후리텐이 아닌 이 섬은 완벽한 치외 법권이었고, 법 대신 어둠의 브로커 일가이자 드래곤 팰리스 아일랜드의 지배자인 알 아이프 가문이 모든 것을 통제했다.

신원이 확인된 VVIP만이 출입할 수 있으며 완벽한 보안이 유지되는 곳.

전용기와 전용 크루즈만이 출입할 수 있는 범차원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은밀한 회의실.

이곳에 출입을 허락받았다는 징표를 지니는 일 자체가 높은 등급의 신원 보장이자 비밀스러운 상류층의 네트워크에 파고들 자격을 갖춘 것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일개 은행 대리인 내가 드래곤 팰리스 아일랜드의 공항에 발을 들인 사실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긴 했다.

“잠시 소지품을 확인해도 괜찮을까요?”

“네.”

나와 플루토는 각각 남성과 여성 보안요원에게 다가가 소지품 검사를 마쳤다.

반면, 라즈마 과장은 딱히 그런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는 일 없이 공항의 검문대를 통과했다.

“과장님은 어째서 검사받지 않는 거야?”

플루토가 묻자 라즈마가 평소의 뚱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야 저는 두 분과 달리 이 섬에 오는 게 처음이 아니니까요. 알 아이프 클렛 씨와 예전부터 직접 면식이 있던 건 아니지만 여러 거래를 중개하기 위해 이곳에 출장 나온 횟수만 벌써 세 자릿수를 넘었습니다.”

“당시랑 외견이 꽤 바뀌셨는데 보안요원들이 별말 안 하는 게 신기하긴 하네요.”

“누구 탓에 이리된 건데….”

“네?”

뭐라 작게 중얼거리는 게 들렸는데 정확하게 알아듣지 못했다.

“저번 사건이 일어난 직후 현장에서 육신의 부활을 겪은 구C 출신 임원진은 전원이 곧바로 서류를 갖추고 드래곤 팰리스 아일랜드를 방문해 영파靈波 등록을 마쳤습니다. 구D의 애매한 신입 대리처럼 허술하지 않다 이 말입니다.”

구D의 애매한 신입 대리? 뭐지, 혹시 내 욕인가?

무표정한데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육신이 생긴 이후로 예전보다 훨씬 사람다워진 느낌인데 동료의 인간성(언데드가 되기 전의 육신이 인간인지 아니면 다른 종족인지 도저히 알아낼 방법이 없긴 하지만 일단은 지금 모습이 인간이니까 인간성이라고 해야 하려나)이 회복된 사실을 기뻐해야 하는 건지 슬퍼해야 하는 건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물론 아무리 땍땍거려 봤자 외견이 6세 여아인지라 예전처럼 쓸데없이 무섭다거나 압박감을 느끼는 일은 없었지만.

그나저나, 잃어버린 지 오래된 육신을 되찾은 결과 감정에도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로울 따름이었다.

역시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옛말은 참이었던 걸까.

그건 그렇고, 정정해야 하는 게 하나 있으니 짚고 넘어가야겠다.

“저어… 과장님, 조금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무슨 일이죠, 김지안 대리.”

“그냥 여기 소장님 안 계시니까 말씀드리는 건데요, 저 딱히 구D 파벌이라거나 그런 식으로 어디 소속되어 있다거나 라인 타고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흠….”

라즈마 과장은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한동안 날 노려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플루토를 향해 고개를 틀고 물었다.

“김지안 대리의 말이 사실입니까? 디스파테르 여신.”

왜 저러는 거지? 플루토 씨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게다가 여신이라는 칭호, 진짜 적응 안 된다.

“제 문제를 왜 플루토 씨에게 물으시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야, 신은 저 같은 피조물을 상대로 거짓을 고하지 않는 법이니까요.”

아, 그런 문제였구나. 왜 저러나 싶었는데.

“으음, 다 좋은데 여신이라고 부를 거면 님을 붙이는 게 옳지 않을까? 과장님.”

“일개 텔러에게 그 호칭은 과분한 듯해서요. 저희가 행장님을 행장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꼬우면 차장급 이상으로 올라가시든가.”

“뭐야. 재미없어.”

플루토는 그렇게 대답한 다음 실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방금 들은 대로야. 김지안 대리는 어느 파벌에도 속해 있지 않아. 구C가 아닌 건 당연히 알고 있을 테고, 구E가 아닌 것도 곱상하게 생긴 걸 보면 알겠지. 대리님이 빠릿빠릿하고 일머리 잘 굴러가는 건 맞긴 한데 다른 구D 출신들처럼 실무의 베테랑이거나 엘리트인 것도 아니잖아?”

“하긴, 듣고 보니….”

아니, 왜 내 앞에서 그런 얘길 하는 건데.

납득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사실이긴 한데 은근히 듣는 사람 상처받는다고.

“두 분 다 제 욕은 그만하시고, 슬슬 이동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약속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내가 말하자 그제야 플루토와 라즈마 과장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대리님 근데 불편한데 계속 예전처럼 반말해 주면 안 돼? 나도 대리님한테 반말하는데. 라즈마 과장님도 꼬꼬마로 변했으니까 육체 연령에 맞게 대해도 될 거 같은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플루토 씨.”

나도 모르게 존댓말을 몇 번 썼던 게 자존심이 상해 곧바로 반말로 시프트했다. 물론 플루토에게만.

과장님께 반말하는 건 무리다. 대리가 어디 하늘 같은 과장님께 감히.

여신님이자 오커스 행장님의 친동생이라고 들으니까 잠시 나도 모르게 위축되어 존댓말을 쓰고 말았는데, 어쩌면 이 일을 플루토 씨가 두고두고 놀려 먹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어쨌든, 플루토의 장난을 무시하고 공항 도착 로비로 진입하자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따로 숙박업소나 편의시설을 운영하는 기업이 섬에 들어와 있는 건 아닌가 보네요.”

공항 로비엔 그 흔한 커피숍 체인이나 편의점 같은 게 단 한 곳도 보이지 않았다.

존재하는 건 싹 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를 갖추고 비싼 메뉴를 파는 가게뿐.

“그게 알 아이프 가문의 방침이니까요.”

이미 수백 번은 족히 드래곤 팰리스 아일랜드를 방문해 본 라즈마 과장은 나와 플루토에게 자세한 내막을 들려 주었다.

듣자 하니 이곳의 공항과 항구, 기타 시설은 전부 사유지에 세워졌으며 알 아이프 가문 사람들은 동전 한 닢도, 정보 한마디도 자신들의 관할 밖으로 흘리려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식재료는 모두 알 아이프의 농장과 목장에서 생산되는 최고 등급을 자랑하는 고급품.

그 외에도 생필품을 포함해 이 섬에서 소비되는 모든 것들이 알 아이프가 보유한 공장과 기타 시설에서 생산되고 있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우리가 로비로 나선 지 30초도 지나지 않아 다가온 검은 옷의 사내들.

그들은 곧바로 라즈마 과장을 보고 깍듯하게 인사를 하더니 우릴 주차장으로 안내했다.

주차되어 있던 건 어지간한 국가 원수들의 의전에나 사용될 법한 대형 방탄 세단.

차 유리 두께만 보아도 총알이 통과하긴커녕 튕겨져 나올 것만 같이 생겼다.

저런 차를 평생 타 볼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된 건지 서른도 되기 전에 뒷자리에 앉게 되었다.

의전 차량급 방탄 세단의 문을 남이 열어 주다니. 그것도 고작 은행 대리밖에 되지 않는 나에게.

“여신님은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보아하니 방탄 세단 옆에 있던 기다란 리무진은 우리 플루토 디스파테르 여신님만을 위해 준비된 것이었던 듯했다.

물론 이런 부분에서 차별당한다는 생각이 들어 비참해진다거나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애초에 이런 차에 타 보는 것도 다 복에 겨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오래 살았고 신의 핏줄을 타고났으면 은행 비정규직 텔러든 뭐든 대접받는 게 맞지, 뭐.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부와 저승의 신 오커스 디스파테르의 여동생이 아닌가.

사실 그녀는 차원신용금고에 있을 때에나 반말 찍찍 해 대는 어지러운 텔러여도 밖에서 충분히 대접받을 만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 아니 신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 그 차이를 실감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당신이 절대 어떻게 해 볼 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녀는. 아시겠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개 뜬금없이 라즈마 과장이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은 탓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언제 그런 생각을 했다고….”

“아니었나 보군요. 흠. 제가 감정을 되찾으니 타인의 감정을 읽는 게 오히려 어려워지고 말았습니다. 한탄스럽군요. 전부 당신 탓입니다, 김지안 대리.”

“…….”

대체 뭐라는 거야, 이 양반.

“출발하겠습니다.”

플루토가 리무진에, 나와 라즈마 과장이 세단에 타자 운전수가 매끄럽게 차를 몰기 시작했다.

15분의 드라이브 후 도착한 곳은 간판이 없는 거대한 리조트 호텔.

아마도 이 섬의 유일한 숙박시설인 이곳은 건축가의 노고가 느껴지는 화려한 디자인과 고급스러운 건자재가 인상적이었는데, 카지노를 안내하는 간판을 보고 있자니 정말로 관광 목적으로 이곳을 찾는 부유층도 많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래리어트 더 키키와이와 비교해도 손색이 있긴커녕 여태껏 범차원 세계에서 보아온 그 어떤 건축물보다 더욱 웅장한 자태는 섬의 면적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지만 이곳을 지배하는 가문과 그들의 고객들이 지닌 사회적 지위를 고려한다면 이 정도 스케일이 적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지하주차장에서 내린 우린 호텔 로비로 이어진 승강기가 아닌 전용 통로로 향했는데, 그곳에 존재하는 단 한 대의 엘리베이터는 백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이 문턱을 넘은 다음 무언가를 녹음하거나 녹화하는 건 금지되어 있습니다. 발각될 경우 신변의 안전을 보장드릴 수 없으니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협박 같은 경고를 들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앞으로 나아갔다.

알 아이프 클렛에게서 저번에 준 도움에 대한 보답을 받을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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