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27화
“요약하자면, 바리터스가 절대로 거대 전함을 낙찰할 수 없도록 유동성을 바닥내야 한다는 거네.”
65차원의 경제 대국 아비아노가 침공당하면 주식회사 밸류가 바리터스 황제와 의회의 손에 의해 국유화될 것이고, 차원신용금고가 빌려준 막대한 자금은 회수가 불가능해진다.
바리터스에게 빌려준 돈을 모두 돌려받더라도 밸류에게 빌려준 돈이 훨씬 많아 손해가 발생하는 상황.
아니, 애초에 두 곳 모두 은행 돈을 빌려줬던 거니까 양쪽 모두 돌려받아야만 한다.
그뿐인가, 아비아노 정부의 공공사업 부문에게 융자해 준 자금도 결코 적지 않다.
거기에 더해 아비아노에 본사를 둔, 밸류만큼은 아니더라도 덩치가 상당히 큰 기업에게 빌려준 돈은?
전부 사라진다.
바리터스 제국 새끼들은 점령지에 있는 알짜배기 기업은 ‘국유화’해 버리거나 경매를 통해 제국 본토의 고위 귀족이 경영하는 대기업에게 팔아 치우는 거로 악명 높다.
오커스 행장이 바리터스에게 빌려준 돈을 회수하는 게 아니라 놈들의 자금줄을 말려 버리라는, 아무리 생각해도 일개 은행원에겐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를 맡긴 건 대체 무슨 생각일까. 솔직히 말해서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만일 그녀가 원하는 대로 우리가 이번 일을 성사시킨다면 바리터스는 어떻게 될까.
유동성을 빼앗겨 전함을 낙찰할 수 없게 된다면, 바리터스는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될 거다.
우린 무사히 아비아노 정부와 본성의 경제 특구에 본사를 둔 기업들에게 융자해 준 원금과 이자를 회수할 수 있을 테고.
문제는, 누가 봐도 이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라는 것이다.
구E가 싸지른 똥을 치운다는 수준의 일이 아니다.
구E가 대출해 준 돈으로 숨통이 트인 바리터스는 아벨바늄을 발견한다는 엄청난 행운을 얻게 되었고 그대로 부활에 성공했다.
놈들은 기술적 우위와 막강한 경제력을 이용해 주변국들을 압박하거나 침공하며 더욱 영토를 늘려 갔다.
현대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전근대적 사고방식을 갖춘 우주제국은 계속해서 탐욕스럽게 덩치를 불려 갔고 귀족을 필두로 한 견고한 지배 집단의 힘을 통해 내정의 안정을 꾀했다.
흔히 말하는 스노우볼이 굴러간 상황.
결국 놈들은 우리가 돈을 빌려준 다른 기업과 국가를 위협하는 시한폭탄으로 자라났다.
70년 전, 아직 세 은행이 합병되기 이전에 대출 승인 과정에서 부정을 저지르고 규칙을 어긴 놈들 탓에 범차원 세계에서도 손꼽는 초대형 은행인 차원신용금고가 막대한 손해를 계상하게 된 것이다.
그딴 일이 벌어지게 두어선 안 된다.
이미 책임자를 처벌한다고 어찌 되는 일이 아닌 건 알지만, 이번 안건을 수습한 다음엔 절대로 행장의 이름으로 은행에 막대한 손해를 안긴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어야만 한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해결하면 좋담.”
다만 여전히 내 머릿속에 이 사태를 해결할 만한 마땅한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누군가를 무너뜨리는 건 은행원의 업무가 아니다.
게다가 바리터스는 국가. 그것도 거대한 제국이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놈들이 사용 가능한 현금을 고갈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물론, 행장님께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것이 합법이든 불법이든 상관이 없다고도.
“놈들이 경매에서 전함을 낙찰할 수 없도록 막는 방법… 무엇이 있을까.”
이미 차원신용금고는 비밀리에 차원문 기술을 사용해 아비아노 정부에게 필요한 도움을 제공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아비아노의 본성은 현재 바리터스의 제1 우주함대에 의해 포위당한 상태다.
그들의 별은 각종 금융 기업과 빅테크 강자, 기타 컨설팅 업체나 법률 사무소 등 오피니언 리더들이 이끄는 법인들의 존재로 유명했지만 1차 산업과 2차 산업의 경우 다른 행성에 농장 목장, 공장을 두고 있어 한 번 우주를 점령당하면 국민들이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식료품이나 기타 공산품을 들여올 수가 없었다.
그런 연고로, 차원신용금고는 최대한 아비아노가 오래 버틸 수 있도록 차원문을 통해 필요한 물자 등을 수송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물론 6-2차원에서 차원문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곳은 적도 부근에 위치한 섬 중에서도 차원 역장이 가장 얇은 키키와이뿐이다.
행장은 이미 이사회를 시켜 키키와이 본도 북부 해안가에 위치한 토지에 가건물을 세우고 있었다.
저번에 나노이를 도울 당시에도 이동형 차원 관문을 설치했던 자리.
이번엔 훨씬 커다란 차원 관문을 설치해 물자를 아비아노로 실어 나를 생각인 것이다.
필요한 자원은 마도 공학에 의해 압축되거나 구E가 애용하는 아차원 격납고 등에 수납된 채 해상과 키키와이 공항의 화물기를 통해 이송될 예정이었다.
섬 북부의 대형 차원 관문을 지나 아비아노로 이동한 물자는 아비아노 전역에 공급될 것이고, 이는 아비아노가 더욱 오래 전쟁에서 버틸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물론, 이건 전부 아비아노 정부가 거액의 예산을 사용해 구매한 것들이다.
이사회는 현재 가치가 폭락하고 있는 아비아노의 통화를 받고 대신 물자를 구매해 주기로 한 행장의 결정을 반박하고 나섰지만 행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번에 그대들이 안건을 해결하기만 하면 아비아노의 화폐는 금방 다시 가치를 되찾을 것이다.’
‘물자 구매를 이유로 지금도 가치가 계속해서 폭락 중인 화폐를 대량으로 받아들이는 게 손해를 보는 것처럼 보일진 몰라도 아비아노가 바리터스의 공세를 계속해서 버텨 낼 수 있다는 사실만 증명이 되면 차원신용금고는 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보게 될 테지.’
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미래를 알 순 없다.
하지만 오커스 디스파테르는 그 와중에도 차원신용금고가 최대한의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상정해 전력으로 베팅했다.
그녀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다면 나로서도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
인도적인 관점으로 보아도 이건 침략전쟁을 막아 피해자를 줄이고 범차원 세계의 평화 유지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필요하다면 아비아노 정부와 대화하며 사태를 타결할 해결책을 논의하는 것도 허락하도록 하지. 슬리크 엘라마는 이번 안건 한정 나의 전권 대리인이다. 모든 권한을 위임할 테니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행장님은 파격적인 조치를 내놓았다.
안건 자체가 상식적인 방법으로 해결이 불가능한 만큼 사령탑에 미치광이를 앉혀 놓아야 한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슬리크 엘라마 차장은 선 넘은 게 아닌가.
벌레 잡겠답시고 은행에서 총 쏴 재끼는 사람인데 저 인간, 진짜 믿어도 되는 거야?
“하아….”
내가 걱정하든 말든 이미 사태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이상 최선을 다해 방법을 찾아보는 수밖에.
“단 거 땡기네.”
그리고 술도.
기껏 린딘에 왔으니 밀라나 과타노차, 아니면 이로울이나 프레드 선배라도 오랜만에 만나 술이라도 한잔하고 싶지만 이번 표창은 비밀리에 진행된 거라 그것도 불가능하다.
인사 쪽 일하는 밀라조차 아무 낌새도 채지 못한 걸 보니 어지간히 은밀히 진행한 모양이다.
“후우.”
나는 하는 수 없이 룸서비스 메뉴를 확인하고 전화를 걸었다.
“네, 여기 1435호실이요. 모둠 아이스크림이랑 위스키 온 더 록으로 한 잔, 네, 그 보통 많이 주문하는 거로요. 네. 네. 부탁드립니다.”
잠시 후, 호화로운 토핑이 흩뿌려진 2색 아이스크림과 술잔이 도착했다.
“잘 먹겠습니다.”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안을 당분과 알코올로 달랜 다음에야 잠이 들 수 있었다.
* * *
다음 날, 키키와이로 돌아온 우린 영업 시간이 끝나자마자 긴급 회의에 돌입했다.
장소는 아이작의 가족이 운영하는 7성급 호텔 래리어트 더 키키와이의 회의실.
우리 여섯 명은 모조리 이곳의 객실로 짐을 옮겨 숙식하며 필요할 때마다 마라톤 회의를 진행할 예정이었다.
하루 이틀이 아닌, 사태가 해결될 때까지 매일.
주말도 공휴일도 휴가도 없다.
쉴 수 있는 건 식사 시간뿐.
수면 시간 역시 보장되지 않을 예정이었다.
“앞으로 전원 출퇴근은 래리어트 더 키키와이에 묵으며 진행한다. 이곳, 회의실은 아이작이 사안이 해결될 때까지 비워 줄 테니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밤이든 새벽이든 상관없으니 각자 뭐든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회의실로 달려가 다른 놈들을 소집해라. 단, 내 잠을 깨워도 될 정도로 괜찮은 아이디어가 아닐 경우엔 재떨이가 날아가겠지.”
엘라마의 살벌한 선언에 나도 모르게 기가 죽을 뻔했다.
어쨌든, 중요한 건 평소 하던 업무에 더해 긴급 사태에 대처하는 방법에 관해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짜내야 한다는 거다.
경매가 시작되는 건 6주 후.
2주 동안 입찰을 받고 8주 후에는 전함을 낙찰받는 사람이 정해질 것이다.
즉,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두 달.
60일 동안 거대 제국 바리터스의 돈주머니가 줄줄 새어 나가 거대 우주 전함을 낙찰하지 못하게 막지 못하면 아비아노 공화국의 차원 결계는 최신형 우주 전함의 새로운 기능에 의해 공략당할 것이고, 바리터스는 공화국을 점령해 차원신용금고에게 막대한 손해를 입히게 될 예정이다.
“일단은 최대한 시간을 끌어보기 위해 아비아노 측의 예산을 대신 집행해 경매에 참가할 대리인을 구하기로 했다. 어떻게든 경매가 진행되는 2주 동안 가격을 끌어올리며 바리터스의 자금줄이 끊어지기까지 시간을 벌어야 하니까 말이지.”
엘라마가 선택한 첫 번째 수는 보험을 드는 것이었다.
바리터스가 입찰한 가격을 상회하는 금액을 다른 참가자가 제시하지 못할 경우 경매는 2주는커녕 하루 만에 끝이 나고 말 것이다.
그랬다간 우리에게 주어진 타임 리밋이 8주에서 6주로 줄어들고 만다.
고로, 아비아노의 예산을 들고 경매에 참석할 대리인을 찾는 건 주어진 시간을 최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생명줄을 확보하는 일과도 같았다.
“반대는?”
“없습니다. 타당한 계획이라고 생각해요. 그 과정에서 아예 바리터스가 살 수 없는 가격까지 경매가가 올라간다면 더없이 좋겠군요.”
“거기까지 바란다면 욕심이겠지. 너무 희망적인 관측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놈들이 전쟁에 편성하는 예산은 언제나 주변 국가의 상상을 넘어서는 것이었으니까. 대리인을 찾는 건 어렵지 않겠지. 그럼, 주어진 시간을 8주로 상정한 다음 이 시간을 어떻게 유효하게 활용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도록 하지.”
엘라마가 제시한 화두. 남은 다섯이 조용히 머리를 싸매고 침묵에 잠겼다.
“으음….”
행장님은 바리터스가 전함을 낙찰하지 못하도록 자금줄을 끊으라고 했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자금줄을 끊는 게 아니라 전함이 낙찰되지 않도록 막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방식이 굳이 바리터스의 돈주머니에 구멍을 뚫는 것 외에도 존재하지 않을까?
“어어?”
“무슨 일이지, 김지안.”
“그, 어쩌면 말이죠, 소장님―”
괜찮은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말았다.
나, 천재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