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26화
나는 케이스 스터디를 통해 암기한 바리터스의 안건을 떠올렸다.
70년 전, 구E는 확장한 영토를 관리하지 못해 자꾸만 예산이 새어 나가 내정에 문제가 발생했던 바리터스가 요청한 거액의 대충을 승인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바리터스는 액수에 합당하다고 느껴지는 정상적인 상환 계획을 제시하지 못했다.
물증은 없지만, 높은 확률로 구E의 간부가 은행에 손해를 끼치면서까지 대출을 승인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마도 바리터스와 모종의 거래가 있던 게 아닐까.
예를 들어 대출이 성사되면 금액의 일부를 대출이 승인되는 데에 도움을 준 구E 간부에게 건넨다든지, 그런 더러운 뒷거래 말이다.
내가 보기에 이것이 현실일 가능성은 말도 안 되게 높다.
대출 계약서는 척 봐도 개판이었다. 상환 기일이 적혀 있었지만 여러 조항이 바리터스 측에만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짜여 있는 것만 봐도 이걸 승인한 놈이 얼마나 ‘대출 고객을 우선하는’ 은행원인지 알 수 있었다.
문제는 바리터스에 빌려준 돈 역시 다른 고객이 은행을 믿고 맡긴 돈이라는 사실이다.
돈은 사회를 흐르는 피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개인의 목숨과도 다를 바 없다.
그런 소중한 자산을 개인의 욕심을 위해 말도 안 되는 상대에게 회수 계획도 제대로 세우지 않고 빌려주다니.
같은 은행원으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죄악이 아닌가.
물론 그 후에 바리터스는 영토에서 차세대 에너지원인 아벨바늄을 발견해 새로운 전성기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들은 돈을 갚긴커녕 대출 만기 연장 신청을 반복해 왔다.
그야말로 국가 권력과 무력을 앞세워 양아치 짓을 하고 있는 상황.
지금도 바리터스 제국의 광활한 영토에는 수많은 차원신용금고 지점이 영업 중이고 세제 혜택을 받고 있긴 하다.
나름대로 은혜를 갚겠답시고 저러는 걸지도 모른다만.
그렇다고 해서 놈들이 빌려 간 돈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했다.
엘라마가 사전에 준 자료를 읽던 내내, 계속, 한순간도 빠짐없이.
당연히, 그 생각은 지금 역시 달라지지 않았다.
바리터스에 대한 적개심도, 대출을 승인한 다음 높은 확률로 뒷돈을 받아 챙겼을 구E의 은행 간부 역시도 그대로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엘라마의 자료에는 바리터스를 상대로 진행한 대출의 회수를 우리가 맡게 되고 이를 성공시킬 경우 구E 파벌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지도 모른다고 적혀 있었다.
그 결과 행 내 파벌 간의 균형이 무너져 구C의 세력이 과도하게 힘을 키우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하지만, 그게 내 알 바인가.
잘못된 짓을 하는 놈이 있었다면 마땅히 감사부의 천사들을 불러 징계위원회에 회부하고 연관된 놈들과 덮어 준 놈들, 모른 척한 놈들을 모조리 찾아내 조져 놓는 게 정상이다.
은행이란 부패와 가장 거리가 먼 집단이어야만 한다.
대출과 상환, 예금과 출금.
이 모든 것이 성립할 수 있는 건 은행과 고객, 그리고 은행과 사회를 묶는 단단한 신뢰 관계 덕분이다.
신뢰는 은행의 핵심 가치.
이것을 훼손하는 자가 은행에서 일하는 건 절대로 허용되어선 안 되는 일이다.
이를 올바르게 고치는 과정에서 파벌 간의 균형이니 뭐니 그런 사소한 일은 어찌 되든 상관이 없다.
그게 내가 배운 올바른 은행원의 자세였으니까.
이러한 연고로 자료를 통해 확인한 안건 중에서도 특히나 정도가 심각하고 의분마저 느끼게 하는 바리터스의 대출이야말로 은행장이 우리에게 맡길 것 같은 골치 아픈 일감이 틀림없을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리고, 나의 예상대로 서류에는 바리터스 제국의 이름이 있었다.
문제는 거기 적힌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의 담당 업무가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는 사실이다.
“…바리터스를 상대로 대출 원금과 이자를 회수해야 하는 게 아니었군요.”
“그래.”
잠자코 나를 쳐다보고 있던 오커스 행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들이 맡아야 하는 일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바리터스의 국가 예산을 바닥내는 것이다. 원금과 이자를 돌려받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한 목적이지.”
* * *
식사를 하며 자료를 통해 일련의 사정을 확인한 우린 호텔로 이동해 각자 1인실로 향했다.
충격적이었던 서류의 내용은 여전히 내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다.
“바리터스의 채무를 상환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아예 유동 자금을 싹 다 빼앗아 오라니….”
행장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우리에게 맡긴 데엔 이유가 있었다.
바리터스의 황제와 의회는 지금도 여전히 왕성한 정복욕을 보이며 79차원의 은하계에서 여러 행성을 닥치는 대로 침공하고 있었다.
바리터스의 군사력과 자금력은 상당했지만, 공격받는 행성 중에는 항복 대신 용기 있게 결사 항전을 진행 중인 곳 역시 있었다.
예를 들어, 범차원 세계에서도 손에 꼽히는 동영상 스트리밍 플랫폼 밸류티브이를 운영 중인 주식회사 밸류의 본사가 위치한 아비아노 공화국이라든지.
아비아노 공화국은 보유한 영토 자체는 별 볼 일 없는 곳이었지만 범차원 세계 최대 규모의 빅테크 기업인 밸류가 내는 막대한 세금으로 발전한 곳이었다.
그리고 밸류는 최근 10년 동안 차원신용금고에게서 대출을 받아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사업을 전개해 흑자 전환을 마친 천재 오너 아이크롬 헬런시가 이끄는 기업.
당연히, 아비아노가 함락되고 바리터스가 밸류 본사를 점거해 국유화하는 경우 차원신용금고가 받아 낼 예정이었던 막대한 대출 원금과 이자는 공중에서 분해되고 만다.
하나 다행인 점은, 아비아노 공화국 정부가 위치한 본성本星은 강력한 차원 결계를 펼치는 최상급의 행성 방어 장비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바리터스는 쉽사리 아비아노 공화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지 못하는 중이었다.
왜냐하면 바리터스의 주전력은 거대한 전함을 필두로 한 우주함대였고, 이런 함대는 차원을 왜곡시키는 결계를 통과해 아비아노 본성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바리터스는 아비아노 침공을 포기한 듯싶었다.
하지만 행장이 보여 준 자료에 따르면 얼마 전 상황이 달라진 모양이었다.
“이런 일이 진짜 생기는구나.”
우연한 계기를 통해 아비아노가 사용 중인 행성 방어 장비를 제작한 군수 기업이 시험적으로 제작한 최신형 우주 전함의 존재가 범차원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사건의 시작은 65차원의 독재국가 리베르토티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리베르토티는 국가 원수 아이히만이 매일같이 예산을 허비하며 걷어 들인 혈세를 사용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곳으로 악명이 높았다.
아이히만이 싫어하는 것은 세 가지였다.
첫째가 국외로 망명한 자신의 정적.
둘째가 자신의 통치에 반발하는 국민.
그리고 셋째가 내정 간섭을 시도하며 범차원 세계의 경찰을 자칭하는 강인한 국가.
예를 들어, 아비아노라든지 말이다.
아이히만은 상당히 단순한 뇌세포를 지니고 있었고 아비아노를 겁줄 수 있는 무기가 자신의 수중에 있다면 감히 아비아노 정부가 밸류티브이의 영향력을 사용해 국제 사회에서 자신을 압박하는 여론을 끌어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아이히만이 일으킨 행동은 어이가 없었다.
놈은 아비아노를 지키는 행성 방위 장비를 개발한 군수 기업에게 리베르토티의 국가 예산의 상당 부분을 쥐여 주며 차원 결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아비아노에 접근해 그들의 의회 건물을 파괴할 수 있는 궁극의 전함을 주문했고, 아이히만 직속 암살 부대를 두려워한 업체 대표는 이를 수락했다.
아이히만은 비밀리에 전함의 부품과 업체 기술자를 리베르토티로 들여보냈고, 측근에게조차 존재를 알리지 않은 지하 공동에서 전함의 건조를 완료했다.
“편집증 환자가 권력을 쥐면 이런 일도 가능해지는 건가….”
문제는 그다음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이히만은 죽었다.
해외로 도망친 정적의 사 주를 받은 군인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종신 독재를 선언한 육중한 체구의 독재자는 집권 40년 만에 폭발에 휘말려 먼지로 화했다.
10여 년 동안 비밀리에 준비된 계획이었던지라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은 아이히만의 측근을 모두 사전에 파악해 단번에 제거하는 데에 성공했고, 그 덕에 해외로 도망쳐 숨어 살던 계획의 수립자 나나모르는 리베르토티로 금의환향해 국민들의 손으로 진행된 투표에 의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하루아침에 정부 수반이 된 그는 과감한 개혁을 통해 리베르토티 국민들의 삶의 질을 부단히 개선해 왔고 그동안 독재자를 비판하고 리베르토티 국민들의 해방을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던 외부의 민주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를 개선하며 리베르토티가 국제 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문제는, 취임 당시에 이미 그의 나이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리베르토티의 위대한 국부 나나모르는 본인이 계획했던 개혁의 절반밖에 이루지 못한 채 숨이 끊어져 영면에 들었다.
국장이 진행된 날, 장례에 참여한 국민들은 눈물로 그의 마지막을 배웅했고 하늘 역시 울고 있었다.
리베르토티의 불운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명석한 두뇌와 올곧은 양심, 인지도, 현실 감각, 그리고 대국민적 인기까지 모두 갖춘 정치가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일은 범차원 세계의 역사를 통틀어 몇 없는 행운이었기에.
리베르토티의 제2대 대통령 바비론은 나나모르와 비교하면 월등히 능력이 떨어지는 자였다.
나나모르의 측근이었던 덕에 그래도 선대가 남긴 계획을 수반하는 것에 집중한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을까.
더뎌진 개혁의 속도. 부족한 국가 예산.
바비론은 이 사태를 타개하기 위해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특급 기밀로 취급되던 아이히만의 거대 우주 전함을 경매에 부치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이 나라가 독재자에게 고통받던 시절 유일하게 손길을 내밀던 아비아노의 등에 비수를 꽂는 것과 진배없는 행위라는 걸 잘 알 수 있었지만, 바비론은 제1대 대통령보다 훨씬 멍청한 사람이었다.
바비론은 별생각 없이 전함의 카탈로그 스펙은 물론 그 전함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전함을 팔아치우는 데에 필요한 데이터를 범차원 세계 전역에 뿌렸다.
본인들에게 해가 될지도 모르는 위험한 물건이니까, 돈 많은 아비아노가 알아서 사 주겠지.
그런 짧은 생각으로 인해, 눈앞의 이익을 위해 선대가 구축한 외교 관계를 날려 버리게 되었다.
사실 전쟁 중반까지 아비아노는 충분히 전함을 구매할 돈이 있었다.
조금 무리를 한다면 지금도 필요한 자금을 짜낼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바리터스에 의한 행성 포위망이 좁혀지고 있는 지금, 아비아노는 돈이 있어도 경매에 참가할 인원을 밖으로 내보낼 수가 없다.
즉, 필사적으로 이를 낙찰하려는 건 바리터스뿐이라는 뜻.
만일 아비아노와 정상적으로 경쟁을 붙였다면 훨씬 더 좋은 값을 받고 아비아노에게 팔 수 있었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바리터스가 전함을 비교적 싸게 낙찰해 갈 가능성이 커졌다.
이미 한 번 예고한 경매를 취소했다간 바리터스에게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
리베르토티는 외통수에 처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멍청한 대통령 탓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