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25화
비행기를 타고 오는 내내 들던 위화감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었다.
플루토에게 자꾸 시선이 가고, 오른쪽 눈이 자꾸 뜨거워지는 기묘한 현상.
그건 내가 여신의 첫 번째 신도가 되며 앓은 일종의 ‘신병神病’ 같은 것이었다.
“왜 여태껏 얘기해 주지 않은 거야.”
“굳이 그걸 티 내고 다니면 내가 은행장님 동생이라고 자랑하는 꼴이 되잖아.”
“아….”
듣고 보니 이해가 간다.
만일 플루토가 행장님 여동생이라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드러나 있었다면 그녀는 적잖게 귀찮은 일에 휘말렸을 거다.
행장에게 잘 보이려고 알랑방귀 뀌는 놈들이 주위에 꼬이는 건 물론 차원신용금고나 저승과 부유함의 신 오커스 디스파테르에게 개인적으로 원한이 있거나 업무상의 이유로 배제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플루토를 납치해 인질극을 벌였거나 아니면 더욱 심한 짓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순진하게도 자신이 플루토 디스파테르라는 개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일 없이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처신해 온 것이다, 이 여자는.
“꼴에 신이라고 이제 와서 역할을 다하려 하는 건가.”
오커스 디스파테르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보아하니 내가 플루토에게 던진 질문만 듣고도 내가 동생의 신도가 된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핀잔이라도 주듯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얼굴에 옅은 미소를 드리우고 있었다.
“언니랑 상관없잖아. 나도 나름 여신인데 슬슬 신도 한두 명은 만들고 신답게 살아야지.”
“조금은 어른이 된 모양이라 다행이구나.”
두 여신 사이에 대화가 오가는 중에도 내 머릿속에선 그동안 플루토를 보며 느낀 위화감이 하나씩 해소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동안 플루토가 사용하던 분신 능력은 직무권능 따위가 아니었다.
그건 그녀가 여신으로서 지니고 있는 힘이었다.
정규 행원만이 오커스 디스파테르가 지닌 권능을 나눠 받아 직무권능을 행사할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는 융통성을 발휘하긴 해도 그녀는 기본적으로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유형의 우두머리다.
아무리 친동생이라고 해도 플루토 디스파테르는 정규 은행원이 아닌 비정규직 창구 담당자.
동생이라고 해서 직무권능을 주는 등 특혜를 주진 않았을 거다.
안 줘도, 여신인 이상 알아서 권능을 사용할 수 있으니 아무 문제도 없다고 생각했겠지.
실제로 플루토는 많을 땐 수십 명까지 분신을 늘려 창구 업무는 물론 잡무까지 도맡아 처리했다.
그녀가 여신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절대로 여신이 하지 않을 것 같은 일까지 전부.
어떻게 버틴 거지. 내가 만일 신이었다면 자존심 엄청 상했을 거 같은데.
안 그래도 다른 신들이 사회에서 그 능력을 활용해 한 자리씩 꿰차고 있는 상황이지 않나.
물론 그건 전부 고대와는 달라진 현대 사회에서 권능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는 방법을 그들 나름대로 탐구한 결과긴 하다.
영화의 도시를 만드는 등 범차원 세계의 예술 전반을 후원해 사람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든다든지.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해안가와 강어귀마다 발전소를 세워 에너지 공급을 해결하거나.
거대 은행을 이끌며 사회 전반에 유동성을 공급하며 돈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등.
고대와 달리 신들은 자신들이 만든 피조물을 지배하고 군림하는 대신 그들 사이에 섞여 들어가 세상의 웃어른으로서 사람들을 이끌고 있었다.
인격이 존재하는 이상 신 역시 실수할 수 있겠지만 평범한 사람들과 비교하면 그들은 무지막지하게 뛰어난 재능과 판단력을 지니고 있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높은 자리를 양보하는 대신 그들은 사업과 여러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며 그들의 존재 가치를 증명했다.
신이 아닌 한 명의 인격체로서, 필멸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다.
이 세상을 만든 주제에 가장 좋은 것을 차지하려 욕심을 부린다는 소리도 할 수 없도록 벌어들인 돈의 대부분을 기부해 가면서.
이를 통해 그들은 존중과 선망, 새로운 형태의 신앙을 얻어냈다.
그들의 능력과 권능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면서 그 대가로 사람들의 소원과 믿음을 받아 내고 있었다.
고대와 형태는 다르지만 여전히 신으로서 이 세상과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해 플루토는 어떤가.
평범한(분신을 만들어 낼 수는 있지만) 창구 담당자인 그녀는 고객 응대와 이런저런 잡일을 하며 나쁘지 않은 급여를 받고 살아가고 있다. 딱 그뿐이다.
언니의 그림자 아래에서 그냥 그런 삶에 만족하며 세상을 돌보지도, 위대해지지도 않는 삶을 보내고 있던 그녀가 처음으로 신도를 만들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지른 일이었을까. 얼마만큼의 각오가 필요했을까. 아니면 일시적인 충동이었을까.
“…….”
신의 신도가 된다는 게 이쪽 세상에서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애초에 차원신용금고의 모든 정규 행원이 직무권능을 지니고 있는 건 배지를 달며 자동으로 오커스 디스파테르를 모시는 사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였던 내가 플루토의 신도가 되었다.
중복신앙. 이쪽 세상에선 썩 흔한 일이 아니긴 해도 도덕적으로 비판받을 만한 일도 아니다.
근데, 내가 플루토의 신도든 사제든 그런 게 되었다면 오커스 디스파테르 행장에게서 직무권능을 나눠 받은 것처럼 뭔가 따라오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며 플루토를 쳐다보았는데 그녀가 작게 입 모양만으로 ‘나중에’라고 말하는 게 보였다.
딱히 무언가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이야기는 들어 봐야겠다.
어쨌든, 지금은 당장 눈앞에 놓인 상황에 집중해야겠지.
“플루토에게 신도가 생긴 건 기념할 만한 일이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사라고 할 수 있으니 넘어가도록 하지. 이미 눈치챘겠지만 금일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 근무자들을 불러낸 건 단순히 표창을 진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커스는 근엄한 얼굴로 서랍을 열어 누런 봉투를 하나 꺼냈다.
실로 동여맨 봉투는 흐릿한 아지랑이에 감싸여 있었다.
평소 접하던 마도 공학 기기에서 느끼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기운.
나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이미 신들과 몇몇 예외에게만 허락된 힘, 가장 오래된 형태의 신비인 마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쓸데없이 분위기가 무거워졌군. 그냥 업무 이야기일 뿐인데. 예약 시간이 가까우니 식사라도 하면서 마저 하도록 하지.”
오커스 행장은 눈을 감고 짧게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우린 그 뒤를 따라갔다.
* * *
15분 후.
차를 타고 이동한 우린 린딘 모처의 유명 레스토랑의 프라이빗 룸에 모여 있었다.
긴 테이블의 상석에 앉은 오커스 행장과 좌우에 배석한 엘라마, 라즈마, 비슈티, 나, 아이작, 그리고 플루토.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일곱 명의 뱅커는 차례차례 나오는 코스 요리를 천천히 음미하고 있었다.
도수가 약한 포도주를 곁들인 전채 요리의 접시를 모두 비우고 웨이터가 그릇을 정리한 즈음, 행장님이 아까 봤던 봉투를 다시 한번 꺼냈다.
-톡
오커스가 말없이 그걸 건드리자 저절로 종이봉투의 입을 묶고 있던 실이 풀렸다.
허술해 보이지만 마법으로 봉인되어 있던 서류.
과연 저 안에 어떤 안건에 관한 정보가 들어 있을까.
“다들 식성이 좋군. 체할 일은 없어 보여서 다행이야.”
다음 요리가 나오기 전까지 남은 인터벌을 틈타 침묵을 지키던 오커스 행장이 말문을 열었다.
그녀의 말대로 우린 사전에 상당한 부담감이 가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문제없이 요리를 맛보는 중이었다.
당장 나만 해도 여유롭게 고급 식재료로 만든 비프 타르타르를 음미하며 감탄하고 있었으니까.
“높으신 분 뵙고 일 얘기 좀 듣는다고 소화 불량에 걸릴 머저리들을 뽑진 않았으니까요.”
“내가 헛소리를 했군. 사과하지.”
근데,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엘라마를 비롯해 각 파벌의 에이스 셋이 비범한 이들인 건 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다.
당장 슬리크 엘라마만 해도 가장 오래된 전통 연극배우 가문의 후계자였던 사람이다.
그는 무대 위에서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냈던 사람이고 가주의 자리를 마다하고 은행업에 몸을 던지며 가족과 여론의 비판을 견뎌 냈다.
엑토플 라즈마는 어떠한가.
이쪽 역시 잔뼈가 굵은 구C의 실세.
죽음마저 그의 업무를 막지 못했다.
언데드의 몸으로 계속해서 오프쇼어 뱅킹 섹터의 실적 기록을 경신해 왔던 그는 다시 어린아이의 몸으로 살아난 지금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고객들을 상대하고 있다.
열 살도 안 된 여아의 몸뚱이에 갇힌 베테랑의 영혼. 외견이 주는 편견이 무색하게 그는 계속해서 고객들에게 무시당하는 일 없이 거액의 자금을 관리하며 고객에게 필요한 조언을 내놓았다.
불파사 비슈티는 전쟁의 달인.
용병으로서 수많은 이들의 피를 손에 묻힌 그는 무장은행의 수호자가 되어 자산을 지켜왔고 지금은 방카슈랑스를 비롯한 금융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당연하지만 끊임없이 죽음에게 등을 맡기고 살아온 그 역시 죽음을 겪고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라즈마 과장과는 다른 유형의 수라修羅.
짬이 부족한 아이작은 또 어떠한가.
듣자 하니 이쪽 역시 굴지의 대기업인 래리어트 그룹의 후계자로서 제왕학과 경영 노하우를 어린 시절부터 주입당하며 살아온 엘리트가 아닌가.
플루토에 이르러선 아예 몇천 년 동안 살아온 여신이다. 그녀가 일 좀 시킨다고 해서 자신의 친언니 앞에서 긴장할 리가 없다.
제일 평범한 사람인 나조차도 그동안 끔찍하리만큼의 중압감에 시달려 왔다.
고대 엘프 종족의 명운이 달린 대규모 대출을 진행하다 세대 갈등에 휘말려 죽을 뻔하거나 암살자나 은행강도와 마주쳤고, 저번엔 아예 치명적인 독을 지닌 외계 생물에게 살해당할 뻔했다.
삐끗했다간 입행 동기인 심판의 천사에게 썰려 도시와 함께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상황까지 겪은 적도 있다.
그러니까.
행장이 시키는 일이 어떤 것이든 나는 쫄지 않고 임할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이젠 이 기묘한 은행의 일원으로서 충분히 업무에 익숙해졌다.
짬도 좀 쌓였겠다 무슨 일을 시키든 겁먹기는커녕 담대히 소화해 내고 말 것이다.
애초에 행장이 지금부터 우리에게 할당할 일은 엘라마가 우리에게 달달 암기시켰던 케이스 스터디 중의 하나일 터.
“정확히 여섯 부 복사해 왔으니 읽고 돌려주면 된다.”
행장이 내민 서류는 저절로 허공을 날아 우리 모두의 손에 안착했다.
나는 일급 기밀이라고 적힌 첫 번째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부터 내용을 추리하기 시작했다.
케이스 스터디로 확인한 가장 골치 아픈 안건은 바로 바리터스 제국에 관한 일.
70년도 더 지난 안건으로 구E가 합병되며 차원신용금고가 관리하게 된 대출이다.
행장이 우리에게 일을 맡긴다면 아마 높은 확률로 구E의 똥을 치우는 임무를 내릴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이건.”
하지만 다음 페이지에 적혀 있던 정보는 내 예상을 크게 빗나가는 것이었다.
우주 제국 바리터스가 연관된 안건이 맞지만, 단순히 돈을 회수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복잡한 업무.
“가능합니까? 이런 게.”
“그대들이 가능하게 만들어야지. 은행장인 나로선 이런 거액의 손실을 상계하고 싶진 않으니까.”
아무래도 제대로 엿 된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