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화 (121/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21화

다음에 볼 때 꼭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 달라고 마키나에게 당부한 나는 곧바로 출장소로 향했다.

인공 지능의 설익은 연애 감정에 관한 이야기는 몹시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었고 삼촌 미소를 유발하는 유형의 화제였지만 일단은 업무를 잘 마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업무라는 것이, 본점에 표창받으러 가는 것이고 지금 시계가 퇴근 시간을 한참 넘어선 시각을 가리키고 있다는 게 문제였지만.

“하아, 인생 쉽지 않네.”

출장소에 도착했을 땐 이미 6시 반이었다.

약속 시간은 40분. 10분 정도 먼저 왔는데 이미 회의실엔 나 말고 다른 행원들이 모조리 모여 있었다.

아이작과 라즈마, 비슈티, 거기에 이번 사태를 해결하는 데에 가장 큰 공을 세운 플루토까지.

엘라마와 나를 포함해 여섯 명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아, 참고로 경비 아저씨는 안 계셨다.

“어… 늦어서 죄송합니다?”

왠지 이렇게 말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여서 사과부터 했다.

“브리핑은 40분부터다. 서두를 필요 없으니 일단 앉도록.”

뜻밖에도 엘라마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는데 아무래도 업무 시간이 지난 다음 추가로 불러낸 상황이라 작은 걸 문제 삼지 않으려는 듯했다.

게다가, 기분도 꽤나 좋아 보이고.

“출장소의 평가가 요즘 들어 나날이 상승하고 있다. 본점의 높으신 분들은 물론 월급 도둑 놈팡이들 사이에서도 말이다. 못난 놈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지.”

근데 말하는 본새는 여전히 저따구라 정이 안 가네.

“본점의 실적이 제자리걸음 하는 동안 우리는 돌파구를 찾아 다양한 차원의 고객을 차원신용금융지주 생태계 안으로 끌어들였다. 본점 놈들은 자신들의 지원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주장하지만 네놈들도 알다시피 이 점포를 개설하는 아이디어는 내 머리에서 나왔다. 따라서, 나는 우리의 실적에 놈들이 숟가락을 얹게 두지 않을 생각이다.”

벌써부터 호전적인 태도.

아무래도 최연소로 차장 달은 사람이라 그런가 본점 근무 시절부터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다.

“본점에 싫은 사람 많으신가 보네요.”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하이에나 자식들에게서 네놈들 인사고과를 지켜 내는 게 누군지 생각해 봐라. 너희 머저리들 챙기는 게 내가 좋아서 하는 짓인 줄 아나? 다 본점의 등신 새끼들 엿 먹이려 하는 거다.”

“…….”

아무래도 이 인간이 다차원 출장소 세우자고 건의한 이유, 자꾸 지 실적을 다른 놈들이 채가려 하는 게 꼬와서 왕국을 건설하려 한 게 아닐까.

차원신용금고 실적에 기여하는 건 어디까지나 겸사겸사하는 거고.

“뭐, 그런 나의 노력이 차츰 빛을 발하고 있다는 거다. 네놈들의 근무 실적이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건 전부 내가 방패 역할을 하고 있어서 가능한 거다. 늘 감사를 잊지 말라 이거다.”

“슬슬 못 들어 주겠소. 집에 돌아가도 괜찮겠소?”

“자존감이 낮으셨나요? 굳이 부하들 모아 놓고 왕초 놀이하며 인정받으려는 꼬락서니를 보니 구D 출신들이 전부 안쓰러워 보이는군요.”

예상대로 집요한 엘라마의 지랄을 견디지 못하고 소머리와 강제 성전환 겸 부활을 당한 전직 언데드가 불만을 토로했다.

“…이 점포, 정말 괜찮은 걸까.”

“글쎄.”

아이작과 나는 세 파벌의 에이스들이 유치하게 으르렁대는 모습을 지켜보며 한숨을 쉬었다.

“소장님, 그래서 브리핑 진행 안 해?”

“반말하지 말라고 했다.”

다행히, 플루토가 제때 어그로를 끌었다.

이럴 땐 엘라마의 분노 내성이 한없이 낮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출장소가 정당한 평가를 받는 걸 방해하던 자식들이 마침내 백기를 들었다. 이번 표창은 그 증거지. 물론, 위조지폐에 한 번 속은 거랑 은행에 강도가 들이닥쳤다는 사실이 공개되면 안 되니까 표창 자체는 주말에 진행될 예정이다.”

“외부에 아예 이야기가 새어나가지 않는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요? 이사회에도 은근슬쩍 정보 빼돌리는 사람 있다는 얘기도 돌던데.”

“증거도 없이 감히 그런 이야길 씨부리고 다니는 자식은 없을 거다. CCTV 기록은 물론 경찰 내부 기밀문서까지 전부 파기를 마쳐 뒀으니까. 키키와이 의회가 우리 뒤를 봐주고 있어.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렇군요.”

그나마 전산에 아무 데이터도 올라가지 않았던 게 다행인가.

이렇게 보면 또 사건이 차원태풍이 불어닥칠 때 일어나서 다행이다.

물론, 태풍이 북상하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이런 일은 생기지도 않았겠지만.

병 주고 약 주고, 인가.

“타이밍이 조금 뜻밖이긴 하네요. 여태껏 실적 낸 것만 생각해도 진즉에 이런 자리 마련해 줬어도 이상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여태껏 출장소가 차원신용금고에게 벌어 준 돈은 어마어마하다.

나와 엘라마가 몇 번씩이나 성사시킨 거대한 규모의 대출 안건의 이자 수입은 전례가 없을 정도의 액수였고 아이작 역시 계속 건실한 기업과 개인을 대상으로 대출을 진행하며 계속 실적의 바닥을 든든하게 지탱해 왔다.

비슈티 과장은 또 어떤가.

평범한 개인 고객만이 아니라 인플루언서를 비롯해 엄청난 인맥과 발신력을 지닌 이들에게 금융 상품을 판매함으로써 일반적인 점포를 아득히 뛰어넘는 실적을 남겼다.

그리고 그 이상의 돈을 은행 금고로 끌어온 것이 바로 라즈마 과장.

이번에 클렛이 가져온 현금이 너무 어이가 없는 액수여서 그렇지, 평소 라즈마 과장을 찾아오는 고객들의 자산은 비상식적인 자릿수를 자랑하고 있었다.

애초에 라즈마는 프라이빗 뱅킹을 주된 업무로 삼는 오프쇼어 뱅크였던 초차원넵튠은행 출신이었고, 평범한 중산층이 아닌 자산가만을 상대해 온 사람이었다.

당연히, 자산가들은 여러 은행에 돈을 분산하는 법이지만 상류층 사람들은 끈끈한 네트워크를 지니고 있어 자산 관리에 관한 정보 역시 서로 공유하고 있었다.

고구마 줄기를 잡아당기는 것처럼 한 명의 고객이 또 다른 고객을 소개하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여러 부유한 고객이 차례차례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를 찾아와 라즈마의 고객이 되었다.

그리고, 프라이빗 뱅킹은 고객의 자산을 공격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조언을 주고 프라이버시 역시 더욱 강력하게 보호해 주는 서비스다.

달리 말하자면 이미 부유하고 자산을 더욱 불리고 싶어 하는 부자들에게 최적의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뜻이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투자 정보 등을 제공함은 물론 아예 투자 상품을 따로 만들어 프라이빗 뱅킹 이용자들에게만 소개하기도 하니 평범한 은행 업무보다 더욱 높은 수수료를 챙길 수 있는 것이다.

그에 더해 이따금 전용 컨시어지 서비스를 통해 해외 부동산 매입을 돕거나 여행에 필요한 프라이빗 제트를 수배하는 등 평범한 은행의 업무 범주를 넘어선 일까지 처리하니 일반적인 행원은 생각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실적을 뽑아내는 것도 가능한 곳이 프라이빗 뱅킹 섹터였다.

커튼에 가려진 비밀스러운 세계인 만큼 합법과 탈법을 오가는 치밀한 수 싸움과 다방면에 걸친 지식을 필요로 하지만 그 리턴만큼은 확실한 곳이라는 거다.

그렇게, 정규 행원 3인방이 각자의 전문 분야에서 막대한 수익을 은행에 벌어다 주고 있으니 아무리 본점이 밀어주는 전략점포라고 해도 우리의 실적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숫자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인제 와서 표창을 진행한다는 건 조금 웃긴 일이었다.

애초에 다른 점포 행원들 표창이 진행된 게 저번 달이었으니, 같은 타이밍에 진행했어도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텐데.

모르긴 몰라도 엘라마의 말대로 우릴 눈엣가시로 여기는 이들이 본점에 적잖게 존재하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과연 누가 그런 생각을 한단 말인가.

구C, 구D, 구E. 이 세 파벌 모두 출장소의 실적이 올라서 손해 볼 일이 없을 텐데.

“묘하네요. 마치 출장소가 망하길 바라는 사람이라도 있는 거 같아요.”

“실패하질 않길 바라고 있었지만 이만큼 잘되는 건 의외였을지도 모르지.”

과연 엘라마의 말대로일까.

출장소의 실적에 기여한 비중을 따졌을 때 자신들이 다른 파벌보다 자신들이 앞서 나가야만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심술을 부리는 구C나 구E 간부가 있는 걸지도 모르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이사회에 배신자가 있다는 가설에 힘을 실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영혼을 지닌 인공 지능 마키나에 관한 소식이 새어 나갈지도 모른다며 본점의 바라칸 이사가 경계하던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얘길 여기서 꺼낼 생각은 없다.

나야 비슈티 과장과 라즈마 과장에게 딱히 악감정이나 의심을 품고 있진 않지만.

지금 여기서 이 이야기를 꺼내기만 해도 마키나가 위험해지거나 중요한 정보가 새어 나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든 저흴 맘에 들어 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건 확실하군요. 그냥 소장님을 싫어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말해서 소장님 탓에 저까지 피해 입는 건 좀 피하고 싶습니다.”

“너 같은 놈 출장소에 꽂아 준 걸 누구라고 생각하나.”

“농담도 못 합니까.”

“어. 안 돼. 짬도 안 되는 자식이.”

조금 기분 좋아 보이길래 살짝 성질 긁어 봤는데 그냥 깝치지 않는 쪽이 좋아 보인다.

잘 생각해 보니 상사한테 이런 식으로 개기는 거, 다른 점포였으면 불가능했을 것 같다.

엘라마가 실적만 내면 어지간한 일은 다 눈감아주는 미치광이여서 용납되는 거지, 만일 내가 실적도 내지 않고 이런 건방진 소리를 했다면 엘라마도 그냥 넘어가진 않았을 게 틀림없다.

나 잘났다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냥 사실을 얘기한 거다.

내 입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조금 우습지만 나처럼 모난 구석이 있는 사람은 근무 환경에 까다로운 상사가 포함되어 있을 경우 다양한 문제를 야기하기 쉽다.

그런 면에서 태도나 말투 같은 걸 문제 삼는 일 없이 전적으로 효율에만 집중하고 실적에 미쳐 사는 엘라마 같은 상사는 같이 일하기 수월한 타입이 틀림없었다.

절대 선한 유형의 인간은 아니지만 같이 일하기 수월하니 불평할 건수가 없다.

“방금 김지안이 말한 대로다. 굳이 이 시점에 표창하러 불러내는 건 마침내 우릴 지원하던 이사들이 반대파의 의견을 꺾었다는 뜻이겠지. 아무래도 이번에 행원 수백 명을 차출해 진행한 현금 유송 작전이 여러 실세들에게 어필된 모양이야.”

은행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혈액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은행의 피는 즉 돈.

우리가 수급해 온 대량의 현금은 우린 차원신용금고 전체에게 있어 가뭄 속 단비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표창을 진행하려 하고, 심지어 다른 행원이 출근하지 않은 주말을 고른 건 비밀 유지 외에도 무언가 목적이 있다는 것이 내 추측이다.”

우리의 공로를 계속해서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었을 텐데, 굳이 여태껏 쌓아 온 실적과 더불어 정당하게 평가해 주겠다는 뜻을 본점이 비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본점 이사들이 저희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는 거군요.”

“그래. 뭘 시키려 하는진 모르지만 분명 밖에 새어 나가선 안 되는 비밀스러운 일이라도 맡기려 할거라는 게 나의 추측이다.”

충분히 합리적인 이야기.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엘라마가 불을 끄고 프로젝터를 기동했다.

스크린에 비춘 건 비밀 문건이라고 적힌 서류의 사진.

나열된 날짜와 사건의 이름은 하나같이 낯선 것이었다.

“본점은 우리에게 골치 아픈 문제를 던질 게 분명해. 아마 이 중에서 하나를 고르겠지. 그러니까―”

엘라마는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너희는 여기 보이는 모든 안건에 관해 완벽하게 알아 두어야만 한다. 본점을 방문하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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