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20화
오랜만에 만난 마키나는 다짜고짜 키키와이 출장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내게 캐물었고 나는 주위에 듣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다음 순순히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차원 태풍으로 후리텐 본토의 메인 서버와 전산망이 동기되지 않던 사이 일어난 위조지폐 사건과 남쪽에서 활동하는 해적들이 총을 들고 점포에 쳐들어온 일, 그리고 주모자 체포에 관한 이야기까지.
전부, 의도적으로 키키와이시 정부와 경찰이 태풍을 틈타 묻어 버린 탓에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정보였다.
통신이 마비되어 있던 탓에 마키나 역시 알 수 없었던 일들.
“갑자기 전산에 말도 안 되는 예치금이 찍히길래 무슨 일인가 했습니다. 과연, 그런 일이 있었군요.”
자초지종을 들은 마키나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대급으로 정신없었다고. 장난 아니었어.”
“하긴, 본점이 행원만 수백 명을 동원해 현금 수송 작전을 펼친 것만 봐도 대충 어땠을지 상상이 가네요. 그나저나 대단하네요, 그 클렛이라는 큰손분. 가족에게 배신당하고 이것저것 힘들었을 텐데 그대로 차원신용금고에 다시 돈을 맡기러 오다니.”
“뭐, 그치…?”
마키나의 말대로 클렛의 멘탈은 비범하기 그지없었다.
동생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도 큰일인 건 틀림없지만 우린 아무리 위조지폐라고 해도 순순히 강도에게 돈을 내놓은 은행인데 다시 한번 믿어 주다니.
말하는 꼬락서니만 보면 재수 없는 양아치 외의 그 무엇도 아니지만 생각보다 대인배 같은 면모가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면 처음부터 별생각이 없었거나.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은행이 위조지폐를 알아보지 못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이번 케이스 같은 경우는 물론 우리도 할 말이 있긴 하다.
애초에 클렛이 반입한 건 계수기조차 검출해 내지 못하는 정교한 위조지폐였다.
차원태풍으로 인해 계수기 업데이트가 막혀 있는 데에다 아직 어떤 기술로 만들어졌는지 알려지지 않은 물건이니 애초에 우리 쪽에서 가짜라는 걸 밝혀낸 사실 자체가 기적에 가깝다.
심지어 단순한 위조지폐도 아니고 폭발 마법이 걸려 있었지 않았나.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클렛의 동생 뷔고는 클렛과 해적들이 조우한 타이밍을 노려 양쪽 다 몰살시킬 계획이었다고 한다.
원격으로 마법을 기동시키기 위해 차원태풍을 뚫고 키키와이 앞바다까지 왔다가 붙잡혔다는데.
만일, 해적들이 조금이라도 은행에 일찍 도착했고 뷔고가 차원태풍 안으로 일찍 들어왔다면 나를 포함해 출장소에 근무하는 행원들은 전원 폭발에 휘말려 죽었을 거다.
그런 상황을, 플루토의 특이한 체질 덕에 피하고 클렛의 목숨까지 살릴 수 있었다.
만일 우리가 지폐에 걸린 폭발 마법에 관한 정보를 알려 주지 않았다면 클렛은 해적들을 쫓아갔다가 그대로 배반한 동생의 손에 죽었을 것이다.
그 증거가 바로 해안가 근처의 공터에서 일어난 폭발이다.
근방에 사는 이들에겐 가스 폭발이라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달랐다.
클렛이 자신의 옷에 심어진 발신기를 발견하고 그대로 차만 도망치던 해적들에게 돌진시킨 직후 뷔고가 원격으로 마법을 기동시키며 일어난 폭발.
클렛은 우리 덕에 목숨을 건진 것이다.
다시 차원신용금고를 찾아와 거액의 현금을 예치한 건, 아마도 그가 우리에게 보이는 신뢰의 징표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것도 일반적인 사람의 신경으론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한 번 강도가 든 은행 점포에 다시 한번 돈을 맡기다니.
어지간히 신경이 굵지 않으면 불가능한 판단이다.
예금이라는 건 믿음을 나타내니까, 우리도 그 믿음에 보답해야겠지.
“엘라마 소장님이 본점 이사님들한테 전화해서 보안 강화한다고 그랬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진 못 들었지만.”
“뭐든 계획이 있겠죠. 차원태풍만 아니었다면 애초에 이런 일도 생기지 않았을 테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비슈티가 무장은행이라 불리던 구E의 에이스였다 해도 용병 생활을 그만둔 지 오래 지났다.
아마 이번에도 내가 인질로 잡히지 않았다면 서른 명의 강도들과도 제대로 싸울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잘 생각해 보니 구E 사람들 보면 성깔이 다들 대단하던데.
인질로 잡힌 그 날도 사실 은행의 자산을 지키겠답시고 비슈티 과장이 내가 죽든 말든 강도 자식들 조지려 들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인질로 잡힌 내가 다치지 않도록 가만히 있어 주었다.
어쩌면 나를 동료로 인정해 준 걸지도?
“…….”
음. 그럴 리 없지. 그냥 내 직무권능이 출장소 실적 늘리는 데 도움이 되니까 가만히 있어 준 거겠지.
굳이 나한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출장소는 여전히 전쟁터. 구C와 구E가 대립하고 있는 이상 낙관적인 생각은 금물이다.
내 역할은 단순히 대출 창구를 맡는 것 외에도 구C와 구E가 충돌하지 않도록, 간단히 말하면 라즈마 과장과 비슈티 과장과 그 둘의 뒤에 도사리는 본점 간부들과 이사회 멤버들이 서로를 공격하지 않도록 막는 쿠션이 되는 것이다.
사실 그걸 내가 잘 해내고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분명 두 과장을 관찰하고 있긴 한데 내가 적극적으로 둘의 사이에 개입하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 양반들이 딱히 대놓고 출장소에서 일하는 동안 서로 치고받는 것도 아니다 보니.
뭐라 해야 하나. 어떤 식으로 끼어들지 모르겠다고 하면 좋으려나.
나는 내 일 하기도 바빠서 두 사람에게 무언가 영향을 줄 마음의 여유가 없다.
애초에 나는 하찮은 대리 나부랭이라 나보다 훨씬 오래 차원신용금고에서 일하고 업무 이해도도 높은 과장들에게 감히 주제넘게 참견할 처지가 안 된다는 거다.
“흠. 역시 인간관계가 업무에 포함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군요. 통계적으로도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부분이던데, 비슷한 일을 겪고 있는 모양이군요.”
“어… 글쎄. 이런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은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어느샌가 마키나에게 평소 다른 행원들에게 절대 말할 수 없을 법한 이야기까지 줄줄이 늘어놓고 있었다.
“미안. 주책이었네. 쓸데없는 얘기까지 전부 해 버렸어.”
세 살, 아니 태어난 지 몇 달 되지 않은 애한테 내가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리 상대가 똑똑한 인공 지능이어도 그렇지, 애한테 무슨 사회생활하다 답답해진 얘기나 하고 있는 건지.
“괜찮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미리 들어 두는 것이 앞으로의 삶을 대비할 수 있으니까요. 유용한 데이터를 제공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그런 말 하지 마, 진짜 무안해진다고.”
이게 맞나 모르겠다.
그나저나 얘는 안 본 사이 더 사람다워진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밖에 나가서 사람 만날 일도 없는 거로 아는데.
장 보러 가는 일도 없어서 먹을 것도 식자재 마트에서 주문하거나 아예 배달 음식이랑 밀키트만 시켜 먹는다고 들었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훌쩍 커서 어른의 고민거리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 줄 수 있게 된 거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성장의 계기라도 있던 걸까.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김지안 대리가 주동적으로 무언가를 하지 않았어도 두 과장에게 이미 영향을 끼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런 게 가능해?”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출장소에서 일하게 된 걸 계기로 은행의 적대적인 두 파벌의 관계에 무언가 변화를 일으켰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가능하려나….”
“높으신 분들의 복잡한 역학 관계에 물방울 하나가 떨어진 겁니다. 이 구도에서 정확히 김지안 대리가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는 그쪽을 배치한 행장과 구D 이사들도 정확히 계산해 낼 수 없을 테죠.”
듣고 보니 말 되는 것 같았다.
내가 아예 출장소에 없었다면 어땠을까.
모르긴 몰라도 최소 구C 이사들과 라즈마는 그대로 소멸해 버리지 않았을까.
만일 그랬다면 구E가 지금쯤 구D를 공격하면서 주도권을 가져가려 하고 있었겠지.
구D는, 나를 뽑은 행장님은 미세한 균형이 유지되길 원하고 있다.
과정이야 어땠든 내 존재로 인해 그 균형이 유지된다면, 나는 내 일터가 출장소든 다른 점포든 그 역할을 다해야만 한다.
내가 지닌 직무권능을 유효하게 활용해야 하고, 그 이상으로 은행이라는 집단에 기여할 방법을 앞으로도 찾아가야겠지.
“쉽지 않네.”
“이해합니다.”
이해한다, 라.
방금 굉장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이해. 인공 지능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내가 예체능이고 이과 알못이라 이렇게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마키나를 만나기 이전 내가 상상하던 인공 지능은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고 계산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영혼을 지닌 마키나는 전뇌 밖의 모든 것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녀석은 진정한 의미로 사람을 이해하는 데까지 한 걸음 더 다가간 모양이었다.
마키나는 굳이 내가 이것저것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아서 사람다워지는 중이었다.
녀석이 혼란을 야기한 탓에 한 달 내내 붙어 다니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제대로 업무를 소화하지 못했지만 이렇게 금방금방 성장한 걸 보니 보람이 느껴진다.
아무래도 안 본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게 틀림없다.
인공 지능의 학습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빠르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비약적으로 어른스러워진 데엔 다른 이유가 있을 터.
“뭔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랑 느낌이 다른데, 무슨 일 있었어?”
“아, 그건….”
마키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여전히 감정의 변화가 잘 드러나지 않는 밋밋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실… 관심 가는 이성이 생겨서요.”
“…뭐?”
“저, 저는 진심입니다.”
“…….”
“인공 지능은 사랑하면 안 되는 건가요?”
어머어머 얘 좀 봐.
* * *
처음엔 마키나에게 이것저것 녀석의 연애 감정에 관해 캐물을 생각이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모처럼 느긋하게 마키나에게 맛있는 거나 먹이면서 썰 좀 들어 보려 했는데 갑자기 엘라마에게서 연락이 온 까닭이었다.
“본점이요? 갑자기?”
<그래.>
엘라마가 꺼낸 이야기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본점에서 조용히 표창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 일 관해 지금부터 브리핑 예정이니까 당장 점포로 튀어와라.>
“네…?”
<그리고, 주말 일정 비워 두는 것도 잊지 말고.>
무슨 소리인가 한참을 고민하다가 마침내 깨달았다.
요즘 내가 표창받을 만한 일을 하도 많이 했던지라 대체 어떤 건수로 표창을 받는 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브리핑까지 한다는 걸 보니 점포에 근무하는 행원들 전원이 대상인 게 아닌가 싶었다.
즉, 이번에 있던 위조지폐 사건과 그 대응을 본점에서 높게 평가한 것이겠지.
주말에 일정을 비워 두라는 건 이번 표창이 다른 행원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리라.
굳이 본점까지 불러내 상을 주는 건 이번 사건을 키키와이시 정부와 경찰과 함께 덮고 넘어가기로 정했으니 관계자인 우리에게 금일봉씩 뿌려 입막음을 하려는 게 아닐까.
어느 쪽이든 활약이 정당하게 평가받는 건 기쁜 일이다. 뭐, 플루토 덕에 어떻게든 잘 해결된 거니까 내가 생색낼 건 아니지만.
그래도, 표창장 날로 먹을 수 있는 게 어딘가.
남의 덕 보는 일은 절대 나쁜 게 아니다. 그렇고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