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19화
신병이 확보된 범인이 대테러 진압부대에게 끌려간 건 20분이 지난 다음의 일이었다.
키키와이섬에서 폭탄 테러를 계획해 실행에 옮긴 뷔고는 체포 과정에서 격한 저항을 펼쳤지만 부하 중 다수가 중상을 입고 본인도 몸에 총알 몇 발이 박힌 채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범인의 유일한 가족인 클렛은 경찰의 조사에 최대한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동생의 용태에 관해선 아무런 관심도 표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을 죽이려 한 동생에게 친절을 베풀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태풍 속에서 벌어진 후리텐 최고의 브로커의 자리를 두고 벌어진 동생의 반란은 빠르게 진압되었다.
* * *
사건으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뒤늦게 이름이 붙여진 차원태풍 아멜다의 피해는 생각보다 극심했는데 키키와이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집이 무너지거나 다이아몬드 펄 헤드 근처에서 산사태가 일어나는 등 태풍이 불어닥치는 동안 안타까운 사건이 많이 일어났다.
키키와이시 정부나 후리텐 본토의 지원, 혹은 보험금이 있더라도 집을 잃거나 다친 사람들은 당분간 힘든 생활을 강요당할 것이다.
요 며칠 동안 차원을 넘어온 고객만이 아니라 키키와이 본토의 손님들이 대출 신청을 위해 은행에 쇄도하고 있는 것만 봐도 태풍이 남긴 발톱 자국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었다.
“이러다간 준비금 동나는 것도 시간문제겠는데?”
“그러게 말이다.”
잠시 담배를 피우러 나온 나와 아이작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복구 중인 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인부들이 뿌리가 뽑힌 가로수를 다시 심거나 파도에 실려 온 모래와 기타 쓰레기를 치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기만 해도 그저 안타까움이 밀려오는 기분이었다.
해변가에 거주하는 이들 중엔 태풍의 피해를 입은 사람이 유독 많았다.
작게는 경영하던 음식점의 간판이 날아가거나 유리창이 깨진 곳도 있었고, 크게는 강풍에 날아온 물건에 다쳐 출근하지 못하게 된 이들까지 있었다.
저들 모두가 은행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은행이 빌려줄 수 있는 돈에는 한계가 있었다.
때마침 굵직한 대출로 인해 준비금 중 상당한 액수가 빠져나간 참이어서 개인에게 그리 많은 돈을 빌려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럴 때야말로 은행이 사회적 의무를 다해야만 하는데.
“저번에 클렛인가 그 양반이 맡기려던 현금만 있었어도….”
“위조지폐였지 않나, 그거.”
“실제로 집에 보관 중이던 현금을 동생이 폭발 마법 걸린 가짜로 바꿔치기했대.”
“…가족에게 배신당한 거로군.”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클렛이 은행을 나선 이후로 나는 그와 딱 한 번 연락했다.
정확히는, 당사자도 아니고 클렛의 변호사와.
변호사는 자신의 고용주에게 불리한 정보를 말하는 일 없이 대략 클렛과 뷔고라는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가 굳이 내게 이유를 설명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클렛의 감사 인사를 대신 전하기 위해.
그리고, 경찰에게 연락이 왔을 때 클렛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 달라고 요구하기 위함이었다.
“안타깝긴 한데, 그 돈 우리한테 맡겨 주면 지금 상황이 많이 나아지진 않을까 싶어서.”
“하긴, 준비금만 넉넉하면 개인여신 부서도 좀 더 너그럽게 대출 신청을 받아 줄 테니까.”
다만, 내가 먼저 클렛에게 전화를 걸어 고객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는 건 아무래도 어려워 보였다.
가족에게 목숨을 위협받다 태풍 덕에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한테 돈 얘기나 꺼내는 건 아무리 내가 그에게 위조지폐의 정체를 알려 주었다 해도 미안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따지고 보면 지폐가 가짜라는 걸 알아본 건 내가 아닌 플루토였지 않은가.
“슬슬 들어가지.”
“그래.”
꽁초를 버린 다음 창구로 돌아가 슬며시 옆 창구에 앉은 플루토의 분신 중 하나를 쳐다보았다.
역시, 평소와 다를 게 없다.
“뭘 봐요 대리님? 내가 그리 예뻐?”
“…….”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여자다.
내가 모르는 비밀로 가득한 것 같은데 이렇게 보니 또 그냥 별생각 없는 것 같기도.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저 사람은 그냥 내게 있어 직장 동료 외의 그 무엇도 아니니까.
이 출장소에 특이한 과거 없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그러나.
아마 나 빼곤 없지 않나.
-드륵
창구가 잠시 비어 있어 할 일이 없던 나는 슬며시 서랍을 열고 안에 든 물건을 꺼내 보았다.
키키와이로 떠나기 전 포독스에서 델 몬테 지점장이 둘이서 술 마실 때 준 주머니.
위기가 닥쳤을 때 사용하라고 그랬는데, 어떤 위기를 말하는 걸까.
은행강도가 들어왔을 때 이걸 꺼냈다면 더욱 스무스하게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을까.
“…….”
솔직히 말해서 잘 모르겠다.
그동안 진짜 목숨 걸어야겠다 싶은 사건이 없었기에 이걸 아직도 열어 보지 못했는데, 대체 무엇이 들어 있는 걸까.
위기가 아닐 때 열지 말라는 소린 하지 않았으니 지금 열어 봐도 되는 게 아닐까.
“으음.”
나는 비단 주머니의 주둥이를 풀어 헤치려다 다시 그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델 몬테 지점장은 허튼소리를 하는 양반이 아니다.
그가 위기를 대비해 아껴 두었다가 사용하라고 했을 정도면 그 말을 따르는 게 아무래도 옳겠지.
하지만 제일 좋은 건 이걸 써먹을 일 자체가 생겨나지 않는 거다.
잘 보관해 두었다가 정말 큰일이 일어났다 싶을 때에나 열어 보든가 해야지.
그나저나, 델 몬테 지점장님 생각하니까 떠오른 건데 마키나 녀석 괜찮으려나.
숙소가 해안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던 것 같은데 태풍에 날아온 야자 열매에 유리창이라도 깨져서 바람 새는 집에서 홀로 쓸쓸하게 앉아 있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분명 얘기해 두긴 했는데, 녀석의 성격을 생각하면 혼자 전부 처리하려고 낑낑대고 있을지도 모른다.
분명 나보다 훨씬 똑똑하고 이사회에게 매달 급여를 타고 있어 돈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몸뚱이가 세 살짜리 아이인 이상 걱정이 되는 건 인지상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따 퇴근하면 연락해 보든가 해야지….”
만일 별일 없다면 키키와이에서 맞이한 첫 태풍을 무사히 넘긴 걸 기념해 맛있는 거라도 먹여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창문 너머에서 익숙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뭐지.”
트레일러 두 대가 은행 앞에 정차하는 게 보였다.
도로를 틀어막은 탓에 다른 차량이 불편을 겪고 있었는데 길가에 위치한 키키와이 출장소로 오는 고객들 역시 주차장에 차를 세울 수 없어 곤란해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차를 모는 기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비좁은 입구를 통해 출장소 부지 안으로 트레일러를 몰고 들어오려는 중이었다.
민폐도 저런 민폐가 없다. 하지만 저들도 고객 같으니 스무스하게 처리하는 수밖에.
“비슈티 과장님.”
“알고 있다.”
비슈티는 창구 근처에 두었던 가방을 꺼내 밖으로 나가더니 능숙하게 내용물을 꺼내 조립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완성된 건 그가 출장소 현판식 당시 방문객들의 차량을 주차하기 위해 설치했던 아공간 특수 격납고의 입구였다.
“오라이, 오라이!”
나는 주차요원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의 기억을 되살리며 열심히 형광봉을 흔들어 두 대의 트레일러를 격납고 안으로 유도했다.
덕분에 거대한 차량 두 대는 무사히 주차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부릉!
그런데, 트레일러의 뒤를 따라 검은 SUV 몇 대가 격납고 안으로 들어오는 게 아닌가.
-끼이익!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스키드 마크를 남기며 멈춘 차.
뒷좌석에서 뛰어내린 건 다름 아닌 홉고블린 클렛이었다.
“…고객님?”
“어. 오랜만.”
“오늘은 무슨 일로….”
“뭐긴, 당연히 예금하러 왔지.”
“…….”
“걱정 마. 이번엔 진짜 지폐 들고 왔으니까. 뷔고 자식 얼마나 꼭꼭 숨겨 두었는지 찾는 데 일주일이나 걸렸다니까.”
구원투수, 등판.
“소장님!!!”
나는 체통도 잊고 형광봉을 흔들며 출장소 안으로 달려갔다.
* * *
몇조 굴덴에 달하는 액수의 현금이 예치되었다는 소식은 금방 본점 간부들의 귀에 들어갔다.
은행은 준비금에 배율을 곱한 만큼의 돈을 고객에게 빌려줄 수 있었고, 준비금이 몇조 굴덴 늘어난다는 건 지렛대의 원리처럼 수십 조의 돈을 운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로, 최근 준비금에 비해 너무나도 많은 돈을 법인과 개인 고객에게 융통해 주었던 차원신용금고의 입장에서 클렛의 예금은 가뭄 속 단비와도 같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차원신용금고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는 비교적 규모가 작은 점포였기에 금고의 크기 역시 제한되어 있었다.
4조 굴덴에 달하는 초 거액의 현금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선 더욱 큰 금고가 필요했다.
예를 들어 차원신용금고 본점의 금고라던지.
“아무래도 대대적인 운송 작전을 펼쳐야겠군요.”
차원신용금고 이사회는 긴급 안건을 상정해 가결시켰다.
이사회는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운송 수단과 호송 인원의 수배를 마쳤고, 각 지점에서 선출된 세 자릿수의 은행원들이 일제히 키키와이로 몰려들었다.
이사회는 화물용 항공기를 대절.
행원들은 경호단의 호위를 받으며 출장소에서 키키와이 공항까지 안전하게 현금을 운반했고 그다음은 공항 측의 협조를 받아 모든 돈 가방을 항공기에 실었다.
-기이잉!!
항공기는 수도 후리텐으로 날아갔고, 행원들 역시 여객기를 타고 그 뒤를 따랐다.
15분 간격으로 후리텐에 도착한 두 항공기.
행원들은 다시 현금을 꺼내 본점까지 운반했고, 계수를 마친 현금은 그대로 본점 지하의 거대 금고에 안전히 보관되었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8시간.
동원된 행원들은 소지품 검사를 마친 다음 특별 수당을 지급받고 해산했다.
차원신용금고의 역사에 길이 남고 회자될 현금 운송 임무가 막을 내린 순간이었다.
* * *
오프쇼어에 잠들어 있던 거액의 현금이 후리텐 본국으로 돌아온 건 분명 좋은 일이었지만 이를 반기지 않는 이들 역시 존재했다.
시중에 도는 현금이 너무 많으면 돈의 가치가 떨어져 사람들의 구매력이 약해질 거라고 주장하는 이들이었는데, 이들의 말에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는 것이 내 의견이었다.
뭐, 근데 당장 클렛의 예금 몇조 굴덴이 은행에 예치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물가가 오르는 건 아니지 않나.
하여튼 다들 걱정도 태산이다.
당장 눈앞의 일에나 신경 쓰는 게 나 같은 소시민이 할 수 있는 전부인데 말이다.
참, 그러고 보니 나 이쪽 세상에서 투표권 같은 거 있으려나 모르겠네.
“밥이나 먹으러 가야지.”
아까 연락해 보니 다행히도 마키나의 숙소 창문이 바람에 깨지거나 날아온 돌멩이에 유리가 박살 나는 등 참사가 일어나진 않은 모양이었다. 천장에서 물이 새지도 않았다는데 역시 신축이 좋긴 하다.
비 내릴 땐 바삭한 게 당겼는데 막상 태풍이 지나가고 땡볕이 내리쬐니까 시큼하고 시원한 게 당긴다.
회덮밥이나 같이 먹으러 가 볼까. 녀석 입맛에 맞는지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