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117/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17화

강도 놈들이 은행을 떠나고 나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한 건 계속 속박당한 상태였던 비슈티와 경비원 영감님을 풀어 주는 것이었다.

비슈티는 손목 외에도 손가락 하나하나 전부 수갑을 차고 있어 끊어내는 게 힘들었다.

이런 일은 특기라면서 엘라마가 사무실에서 꽤나 전문적인 락픽 세트를 꺼내 자물쇠를 따던데, 대체 그런 기술은 언제 익힌 건지 모르겠다.

“재난 상황에서 자물쇠에 문제가 생겨 열지 못하게 될 때를 대비해 습득해 둔 거다. 생존 기술이지.”

“차장급 되면 다들 배워 두는 유용한 기술이라던가 그런 건가요.”

“그렇다고 보면 된다.”

거짓말하고 있네.

장담하건대 이 인간 유명한 배우 집안에서 태어났다 들었는데 어린 시절 집안사람들이 주는 압력 같은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양아치 짓 좀 하고 살았던 게 분명하다.

분명 남의 오토바이 훔쳐서 친구들이랑 학교 빼먹고 놀러 다녔겠지.

드라마나 기타 창작물에서도 자주 나오지 않나.

미성년자 시절 자기 집안 부자인 거 숨기고 일부러 노는 애들이랑 어울리다가 어른이 된 다음 어느샌가 엘리트로 변해 있는 그런 사람.

어릴 적 같이 어울리던 녀석들은 다 큰 다음 엘라마 같은 사람 보고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그런 그림. 꽤 현실에서도 자주 있는 거 같은데.

아니, 이 경우엔 현실에서도 종종 있는 일이라 창작물에서도 클리셰로 등장해 공감을 사는 패턴인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를 묻는 수준의 질문이어서 이것저것 고민하다 그냥 생각하는 걸 그만두었다.

어쨌든, 비슈티를 위험 요소라고 파악하자마자 날 인질로 삼고 그를 제압한 강도 놈들은 꽤나 눈치가 빠른 자식들이었다.

근데, 70세가 다 되어 가는 경비원 할아버지는 대체 왜 제압한 걸까.

이쪽 역시 옛날에 전쟁터에서 이름 좀 날리던 유명인이었다던가 그랬으려나.

“…설마 내 예전 직업을 알고 있는 놈들이었을 줄은 몰랐소. 방심하지 말고 움직였어야 했는데, 내 불찰이오.”

그 와중에도 비슈티는 자기 탓을 하고 있었다.

내가 바보처럼 인질로 잡히지만 않았어도 비슈티가 저기 창구 아래에 숨겨 둔 산탄총으로 강도 놈들을 싹 다 제압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말이다.

“죄송합니다…아무것도 모르고 셔터 연 제 책임이 큽니다.”

“김지안 대리가 나가지 않았어도 저쪽이 문 뚫고 들어왔을 테니 그런 이야기는 무의미하오.”

비슈티는 예전의 라즈마와도 비견되는 지극히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다.

덕분에 죄책감이 조금은 덜어지…긴커녕 괜히 더 미안해질 따름이었다.

“천재지변 같은 거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어차피 없어진 게 진짜 돈도 아니라면서요. 대리면 대리답게 시키는 일만 하면 됩니다. 굳이 무언가에 책임감 느낄 필요 없다는 소립니다.”

라즈마 역시 어째서인지 답지 않게 위로 비슷한 소리를 하고 있다.

예전과 달리 여섯 살 먹은 여자아이가 정장을 입고 말하고 있는데 굉장히 비현실적인 광경이다.

정신 나갈 거 같아.

“그래서, 클렛이 반입하고 놈들이 가져간 게 모조리 위조지폐라는 거지? 플루토 씨가 그걸 알아냈고.”

“맞아.”

한편 아이작은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바닥에 타고 남은 위조지폐였던 것의 재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클렛도 이게 위조지폐였던 걸 모르고 있었다, 라. 그래. 확실히 내 직무권능으로 확인했을 때에도 그에겐 어떠한 전과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어.”

“맞다. 네 직무권능 그쪽이었지.”

아이작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작의 직무권능은 고객을 보았을 때 상대에게 전과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물론, 상대가 완전범죄만 저지르고 다니는 기특한 자라서 전과가 없을 땐 나쁜 놈이어도 분간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보니 잠재력과 함께 차원신용금고에 악으를 품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내 직무권능으로 비슷한 리스크를 감지해 회피할 수 있긴 하다만.

아이작의 직무권능은 상시 발동형인 데에다 상대가 차원신용금고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려 하는 상황 역시 회피할 수 있어서 나와 다른 방식으로 운용할 수 있다는 게 특징이었다.

예를 들어, 돈을 빌려 차원신용금고가 아닌 다른 대상에게 사기를 치려는 자식이 있을 경우 내 직무권능으론 감지할 수 없지만 아이작은 상대의 전과 유무를 확인해 그 가능성을 점칠 수 있었다.

“최소한 클렛에게 전과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어. 위조지폐를 맡긴다는 건 은행에게 노골적으로 악행을 저지른다는 건데 이걸 네 직무권능과 내 직무권능이 잡아내지 못했다는 건 그가 앞으로 우량고객이 되어 줄 가능성이 크다는 거겠지.”

듣고 보니 말이 되는 소리였다.

상대가 맡긴 게 위조지폐임에도 불구하고 잠재력의 저울은 클렛을 우량고객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맺는다면 위조지폐가 아니라 제대로 된 빳빳한 현금을 대량으로 가져와 우리의 고객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는 뜻.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클렛을 탓하는 건 아무래도 옳지 않을 터.

“소장님 생각은 어떠신가요.”

“…네놈들이 거기까지 확신한다면 일단은 클렛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일을 진행해야겠지.”

“와아. 대머리 소장님 말 통하는 사람이라 다행이야.”

“이게 진짜…!”

당장 호통이라도 칠 것 같은 얼굴이었던 엘라마는 뜻밖에도 순순히 나와 아이작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물론 플루토의 정수리를 따악 소리가 나게 가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문제는 이제부터 우리가 어떻게 움직이냐, 인데―”

우린 이제부터 어떻게 경찰과 클렛에게 상황을 설명할지 상세히 논의를 진행했다.

그리고 대화를 시작한 지 5분 정도 지난 즈음, 아까 빗속에서 어렴풋이 사이렌 소리를 발하며 이쪽으로 다가오던 경찰차 한 대와 보안업체 직원 세 명이 마침내 은행에 도착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보안업체 직원의 무장은 권총 한 정과 경봉이 전부.

보안업체보다 늦게 온 경찰 역시 산탄총이 아니라 권총 두 정과 테이저건이 끝이었다.

정확히는, 우비를 단단히 여미고 있었으니 이것도 무장에 포함해야 하려나.

방어구라는 의미로.

“어휴….”

만일 저 정도 무장으로 제때 도착했다면 강도들의 손에 죽어 나갔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저들이 늦게 도착해서 다행이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긴 하다.

듣자 하니 지난 15년 동안 키키와이에서 은행강도가 발생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하니까.

게다가 지금은 절찬리에 정신 나간 규모의 차원태풍이 몰아치고 있지 않나.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이라면 이런 날에 30명 규모의 강도단이 총 들고 은행을, 그것도 영업시간이 한참 지난 다음 찾아왔다고 하면 믿지 않을 것이다.

“아. 정말로 강도가 들었군요. 마음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렇게 말은 하고 있었지만 경찰도 보안업체 사람도 보험 사기가 아닌가 의심하는 듯한 얼굴로 우릴 보고 있었으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하… 진짜라니까요.”

결국 나는 경비실 컴퓨터에 남은 CCTV 기록을 보여 주는 수밖에 없었다.

서른 명 중 극히 일부밖에 찍히지 않긴 했지만 놈들이 내 머리통에 총구를 겨눈 장면은 다행히 잘 남아 있었다. 그 직후 감시 카메라가 싹 다 총에 맞아 숨진 게 문제였지만 어쨌든 위협당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에 문제가 생기지 않아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놈들이 서두르고 있던 게 그나마 천재일우의 행운이었다고 해야 하나.

“진짜 미친놈들이네요. 키키와이에서 은행강도를 저지르다니.”

경찰관은 그제야 무전으로 이런저런 연락을 하며 곤란하다는 듯 땀을 훔치기 시작했다.

뭐, 상황 인지가 느린 건 솔직히 말해서 이해해 줄 수 있었다.

우리가 전화로 제대로 상황을 알리고 신고를 넣은 것도 아니고 영업시간 지나서 셔터가 열리거나 엘라마와 플루토가 빠르게 창구에 있는 경보장치를 작동시켜 자동으로 알림이 간 데에다 기지국이 마비된 탓에 평상시처럼 전화나 전용 연락 단말 등을 통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은행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도 없었을 테니까.

무엇보다 키키와이는 섬이다.

이곳에서 은행강도가 그동안 발생하지 않은 이유는 돈을 훔쳐도 도망칠 곳이 제한되는 그 지리적 특징 때문이었다.

은행을 털어도 밖으로 나가려면 배를 타야 한다.

하지만 일단 경찰이 은행강도 사건 발생을 인지하면 해경의 협조 아래 항구를 비롯해 앞바다가 싹 봉쇄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이성이란 게 있는 범죄자라면 키키와이에서 은행강도 같은 간 큰 짓을 벌이려 하지 않았다.

돈을 훔쳐 봤자 그걸 들고 섬 밖으로 나갈 수가 없으니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다.

하지만, 때마침 불어온 미친 태풍은 바다를 봉쇄한다는 선택지를 사용할 수 없는 카드로 묶어 버리고 말았다.

“지금부터 놈들이 떠나지 못하도록 붙잡는 건 아무래도 어렵겠는데요…헬기를 띄울 수도 없고, 해경들을 출동시키는 것도 어렵고. 다른 동료들도 대민지원 중이라서 항구로 쫓아갈 수 있는 인원도 거의 안 됩니다. 이거 야단났군요.”

뒤늦게 후회를 드러내는 경찰. 한편 보안업체 직원은 나중에 자신이 당할 문책을 상상하며 겁에 질려 있었다.

대충 1층 로비와 금고에 남은 돈 가방의 숫자를 보고 강도가 가져간 돈이 저것보다 훨씬 많을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조금이라도 일찍 현장에 도착하지 않은 자신의 게으름을 탓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조금 골려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래도 내가 알고 있는 걸 저들에게도 알려 주지 않으면 일이 진행되지 않으려나 싶어 약간의 부연 설명을 해 두기로 했다.

“괜찮아요. 밖에 있는 쓰러진 트레일러에 실려 온 돈, 싹 다 위조지폐이거든요.”

“네에…?!”

경찰은 상당히 당황한 모양새였다.

“사실입니다. 어떻게 된 거냐면요―”

나는 경찰관과 보안업체 직원에게 모든 것을 설명했다. 최대한 구구절절, 자세하게.

“그렇다면 클렛인가 하는 사람도 수상하군요. 이런 대량의 위조지폐를 들고 은행을 찾다니.”

“그분도 알고 저지른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뭐 그건 사실 저희가 알 바 아니긴 하죠. 당연히 조사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위조지폐가 가득 담긴 돈 가방 중 하나를 경찰관에게 건넸다.

“증거입니다. 필요하시죠? 마도 공학 전문가를 부르시면 분석할 수 있을 겁니다. 문제는 이게 위조지폐이자 폭탄이라는 건데, 폭발물 처리반이 필요하겠네요.”

“히이.”

경찰은 돈 가방을 빠르게 구석으로 치우고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철컥

셔터를 열고 우비를 뒤집어쓴 사내들이 은행 안으로 진입했다.

“…쯧. 늦었나.”

클렛과 놈이 부리는 용병들이었다.

늦었다, 라고 말한 걸 보니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 놈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강도들이 은행을 털고 출발하는 걸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놈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만 살며시 이쪽이 쥔 정보를 흘렸다.

“아닙니다. 제때 오신 게 맞아요. 어차피 지금 배 타고 섬을 빠져나갈 순 없을 테니 천천히 쫓아가셔도 됩니다. 다만,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게 제 의견이긴 합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이런 뜻이죠.”

아까 했던 것처럼 지폐 한 장을 바닥에 깔고 불을 붙였다.

폭죽 같은 소리를 내며 터져나간 위조지폐. 클렛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뷔고, 이 개자식.”

뷔고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클렛이 배신자를 찾아낸 건 확실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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