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화 (112/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12화

대뜸 반말로 말을 건 사내의 첫인상은, 솔직히 말해서 영 좋지 않았다.

폭우에 홀딱 젖은 우비를 벗은 남자는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홉고블린이었다.

그는 염색한 금발을 포마드로 넘기고 고가의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양쪽 귀에 달린 귀걸이의 디자인이 천박해서 그런지, 아니면 얼굴이 저열한 탐욕으로 절여져 있어서 그런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이쪽 세상에서도 엘프처럼 어마무시하게 오래 사는 종족이 아닌 한 서른 넘은 즈음부턴 인성이 얼굴에 드러나기 시작하는 건 크게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당장 은행 들어오자마자 반말로 뭐라 그러는데, 솔직히 나이 든 할아버지 할머니도 아닌 놈이 저러니까 꼴불견이다 이 말이다.

“예금 계좌 개설 도와드리겠습니다. 다만, 현재 전산망이 마비되어 있어서 실제로 반영되고 온라인 뱅킹 등 서비스가 사용 가능해지는 건 태풍이 지나간 다음이 될 예정인데요. 괜찮으실까요?”

내가 묻자 홉고블린 사내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하는 시늉을 했다.

“일단 중요한 건 저걸 안전하게 보관하는 건데….”

그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대다 마침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하지.”

창구 테이블에 길쭉한 두 팔을 던지듯이 얹은 그는 주머니에서 신분증과 인감을 꺼냈다.

“알 아이프 클렛 님, 확인했습니다.”

사내의 성은 클렛. 주소는 여기서 좀 거리가 있는 후리텐의 또 다른 해외 영토였다.

주로 부자들이 저기에 홀딩스 같은 기업 세우고 주소도 저기 등록해 둔 다음 무지막지하게 ‘절세’를 저지르는 거로 아는데, 아무리 우비를 입고 있었다 해도 물기 한 방울 보이지 않는 고급 방수 마법이 적용된 비싼 양복을 걸치고 있는 게 납득이 갔다.

아마도 정상인이 봤을 때 합법이라고 여겨야 하는지 3~10초 정도 고민하는 유형의 사업을 운영하는 자. 혹은 그런 사람의 가족이 아닐까 싶었다.

대출받으러 온 사람이 아니니까 굳이 잠재력을 확인하진 않았다.

돈의 출처가 어떻든 일단 당장 세탁되지 않은 돈이라는 증거만 있으면 나쁜 놈이라고 몰아가선 안 되니까 이것저것 캐묻지도 않았다.

고작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 나의 식견은 여전히 좁았고, 여기 있는 클렛인가 하는 사내 역시 외견만 좀 양아치처럼 보이고 실상은 좋은 사람일지도 모르니까.

그나저나 홉고블린, 자료로만 보고 실제로 만나는 건 처음이다.

고블린과 기본적인 생김새가 비슷한데 피부색이 조금 더 옅고 덩치가 훨씬 크다.

못해도 족히 180cm는 되는 키. 근육도 보기 좋게 잡혀 있다. 혼혈이 아닌 순수 홉고블린.

흔히 고블린들 사이에서 순혈 홉고블린 이성이 선호되는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중세 시대에 일어난 반란으로 지배계층이었던 홉고블린의 수가 대폭 줄어들면서 개체 수가 적은 희소종이 되었다는데 나름 옛날엔 왕족이고 귀족이었으니 환상을 품기 좋은 데에다 일반적인 고블린보다 외모가 뛰어나니까 수요가 쏠리는 거겠지.

나는 마음속으로 고블린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홉고블린 혼혈과 순수 고블린들에게 깊은 애도를 보냈다.

이쪽 세상의 신들이 만들어 놓은 거 다 마음에 드는데 고블린과 홉고블린처럼 유전적으로 가까운 종족을 너무 스펙 차이 나게 만들어 버린 게 참 안타깝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걸 입 밖으로 꺼내면 100% 종족 차별주의자로 몰려서 6-2차원에서 추방당할 테니 꾹 참고 있어야 하겠지만 그래도 사실인 걸 어떡하나.

정치적 올바름이 사람들의 솔직한 발언과 생각을 옭아매고 있다.

코미디나 가벼운 농담으로 서로 평등하게 놀리는 것 정도야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어쨌든,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것 자체는 나쁜 일이 아니지만 일에 지장이 생겨선 안 된다.

“여기, 서류에 서명해 주시고 인감 눌러 주시면 되시겠습니다.”

일단은 일하자.

“자. 됐지?”

“아, 예. 확인하겠습니다.”

클렛은 여전히 싸가지 없는 말투로 자꾸 신경을 긁었다.

뭐, 대체 얼마나 돈 맡길 생각인진 몰라도 개인적으로 너무 불편하다.

개인의 예금을 대량으로 유치해와도 내 실적에 크게 반영이 되는 건 아니다.

당연히 은행 입장에서 좋은 일이긴 한데 인사고과에 반영되고 실제로 인센티브에 영향이 있는 건 금융상품 판매랑 다른 쪽이다.

물론 그걸 노리고 일을 하는 건 아니다.

나는 내 직업과 업무 자체에 자부심을 갖고 있고 기쁨으로서 매일 근무에 임하고 있으니까.

문제는, 아무리 내가 은행원이고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 해도 반말 찍찍하는 고객을 상대하며 스트레스를 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스트레스받을 거면 최소한 인센티브에 플러스라도 되는 일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했을 뿐이다.

단순 예금 갖고 이딴 식으로 갑질하는 건 아무래도 좀 기분이….

“확인 완료되었습니다. 저희 측에서 일단 증서 발급해 드리고 적어 주신 연락처로 전산망 연결된 다음 바로 연락드리고 통장과 카드 등 주소로 발송해 드리겠습니다.”

“하여튼 당신들도 고생이 많아. 무슨 차원 태풍인지 뭐니. 섬 자체가 아예 별개의 차원으로 격리되다니, 나 원 황당해서 참.”

뜻밖에도 클렛은 은행원의 노고를 알아주는 것처럼 말했다.

말만이 아니다. 녀석의 표정도 아까보단 훨씬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뭐지, 생각보다 나쁜 사람이 아닌 걸까.

“…그러게 말입니다.”

…아니, 그냥 말 한마디 한 거 같고 사람 인상이 이렇게 훅훅 바뀌어도 되는 걸까.

아무래도 난 아직 멀었나 보다.

나름 사람 잘 본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식으로 인상이 확확 달라지면 내가 똑바로 사람 볼 줄 모른다는 뜻이 아닌가.

“여기, 임시로 발급한 계좌번호입니다. 전산에 등록 끝난 다음 이체하시면 바로 거래가 시작되는데요, OTP나 기타 인증 수단 필요하신가요? OTP 등록하시면 계좌에 이체 마치신 다음 비용만큼 자동으로 이체됩니다.”

“아, 이체? 그럴 필요 없어. 현금으로 가져왔거든.”

“그러셨군요.”

“걱정 마. 아까부터 좀 나 이상한 놈으로 보는 거 같은데 전부 깨끗한 돈이거든. 세금도 깔끔하게 전부 냈고 말이야.”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까지 꺼내는 클렛의 얼굴엔 어째서인지 안도감이 엿보이고 있었다.

대체 그동안 뭐가 그리 불안했던 걸까.

가방 같은 게 보이지 않는 걸 보니 현금을 대량으로 가져온 것도 아니고, 지갑에서 고액 수표 몇 장 정도 꺼내려는 거려나.

그런 상상을 하고 있었는데 대뜸 클렛이 은행 문을 열고 밖으로 얼굴을 내밀더니 크게 소리를 질렀다.

“어이! 들어와!!”

빗소리 때문에 들리지도 않을 법한데 대체 누굴 부를 생각이길래 저렇게 손까지 흔들어가며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걸까.

-부릉!!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밖에서 난데없이 굉음이 울렸다.

폭우의 소음을 뚫고 기어이 고막까지 도달한 우렁찬 엔진음.

무슨 일인가 싶어 창밖을 보니 거대한 컨테이너를 실은 트레일러 두 대가 은행 앞에 정차 중이었다.

“저기 주차 금지 구역인데요….”

* * *

창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목격하고 패닉을 일으킨 건 비단 나만이 아니었다.

트레일러 두 대와 이를 호송하는 밴이 여덟 대.

밴에서 내린 검은 옷의 사내들은 대부분이 전술 장비와 소총으로 무장한 용병들이었다.

용병들이 사방을 경계하는 동안 무기를 소지하지 않은 자들은 컨테이너를 열고 안에 든 물건을 꺼내 차례차례 출장소로 옮기기 시작했다.

커다란 방수 백을 양손에 들고 나르는 행렬은 장장 40분 동안 끊이지 않았다.

트레일러가 싣고 온 컨테이너는 말 그대로 빈틈없이 검은 가방이 쌓여 있던 듯 클렛의 부하들은 계속해서 안에서 내용물을 꺼내 우리에게 인계했다.

“맙소사….”

처음에는 총 든 용병들의 등장에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밖을 보던 비슈티 과장이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저 시커먼 방수 가방 수백 개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짐작한 모양이었다.

“제 예상이 맞다면, 오늘은 차원신용금고 키키와이 출장소 근무 행원들에게 있어 잊지 못할 하루가 되겠군요.”

어느샌가 가까이 다가온 라즈마 과장이 예전보다 훨씬 뚜렷하게 감정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린아이의 몸이 되어 버린 이상 힘쓰는 일에 동원하기도 어려운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그 사실이 얄밉게 느껴졌다.

“자리로 돌아가라, 머저리들. 다차원 출장소에서 일하면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다고 누누히 얘기했을 텐데. 프로답게 처신하라고 몇 번을 이야기해야 알아들어?”

유일하게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던 건 엘라마 소장 한 사람뿐이었다.

“하지만 소장님, 만일 정말로 저 가방 안에 들어 있는 게 전부 실물 지폐라면….”

아이작이 걱정 어린 얼굴로 말꼬리를 흐렸다.

“그래. 말도 안 되는 일이긴 한데 전부 실물 지폐라면 분명 큰일이지. 일단 하나씩 열어서 숫자 세는 겸 계수기에 넣어서 위조지폐가 아닌지 확인해야 하고, 그다음은 다른 사람 손 빌리지 않고 우리끼리 금고 안에 전부 실어 날라야 하니까.”

“…애초에 저런 양이 금고에 들어가긴 합니까?”

“…….”

내가 묻자 엘라마의 표정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소장님?”

“저런 게 들어갈 리 없잖아. 멍청한 놈아. 매일 모출납 확인하는 놈들이 그런 것도 몰라?”

“…….”

아니, 돈이 금고에 전부 들어가지도 않는데 어떻게 맡을 거란 소립니까.

“뭐야. 댁들 금고에 다 안 들어간다고? 쯧. 그럼 3분의 1만 맡기고 다른 은행 가야 하겠네. 근처에 지점이…어디 보자 관광 지도가 아까 있었는데….”

쓸데없이 귀가 밝은 홉고블린이 민감하게 우리 대화를 캐치하고 반응을 보였다.

“번거롭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제지에 나선 건 엘라마였다.

“무슨 생각입니까, 대체. 뭐 잘못 드셨어요?”

“이런 거액의 예금을 키키와이 섬 지역 은행에게 나눠 주라고? 너야말로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짓이긴 듯한 목소리로 내게 속삭인 엘라마는 환한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다시 클렛에게 시선을 돌렸다.

“메인 금고에 전부 들어가지 않을진 몰라도 2층에 방범 셔터를 내리고 보관할 수 있습니다. 첫 컨테이너의 절반 정도만 1층에 남겨 주신 다음 나머지는 2층으로 올려주시면 계수기 사용해 완벽하게 액수 파악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러셔? 그럼 우리 애들 여기 굳이 두고 가지 않아도 되는 거야?”

“그렇습니다. 방범이라면 보안회사와 협업해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엘라마와 클렛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내들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다들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진한 게 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것 같았는데 쉴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생겨서인지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하루 이틀 정도 애들 푹 재우고 돌아올게. 그때까지만 띠지 감아서 이 액수 맞는지만 확인해 보고. 털리지만 않으면 돼. 털리지만 않으면.”

“안심하셔도 문제없습니다.”

엘라마는 클렛이 건넨 메모를 받아 들고 자신만만한 얼굴로 대답했다.

“키키와이의 연간 은행강도 발생 평균 건수는 0건입니다. 이틀 푹 쉬고 다시 뵙겠습니다.”

돈 세고 띠지 감는 게 우리 일이라는 건 아무래도 좋다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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