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화 (111/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11화

“어우, 진땀 뺐네.”

비를 뚫고 겨우 아이작의 가문이 소유한 5성 호텔 래리어트 더 키키와이에 도착한 나는 곧바로 체크인을 마쳤다.

객실을 할당받은 덕에 일단은 무료로 며칠은 묵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동안 태풍이 무사히 지나갔으면 좋겠다.

-큐우우

한편, 세계수 조각을 깎아 만든 스마트폰 케이스에 빙의되어 있던 정령들은 방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자마자 케이스에서 뛰쳐나와 분주하게 천장을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뀨귯!!

-큐귯큐!!

뭐라 말하는 건진 알 수 없지만 정령들은 평소 집에 있을 때 차분하게 놀던 것과 달리 상당히 흥분해 있었다.

문제는, 그게 좋은 쪽으로 들떠 있던 게 아니었다는 거다.

어딘가 패닉이라도 일으킨 것 같은 분위기.

특히나 슬라임처럼 생긴 물의 정령이 복어처럼 잔뜩 몸에 물로 만든 가시를 두르고 뽈뽈대며 움직이고 있어 신경 쓰일 따름이었다.

“가만히 좀 있어 봐. 정신없다니까.”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봤지만 역시 내 쪽엔 눈길도 주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며 분주하게 몸을 떨어 대고 있다.

“…….”

이쪽 세상의 자연재해는 원소의 힘이 이룬 균형이 무너졌을 때 발생한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 힘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정령이 이런 사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실 자체는 충분히 이해가 갔다.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33차원의 엘프에게 연락한다면 유용한 조언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스마트폰을 다시 집었는데.

-파직

갑자기 객실의 전기가 나갔다.

“어?”

-츠츳!

기묘한 푸른 벼락같은 게 창밖에 보이나 싶더니 우렁찬 천둥소리가 키키와이 전역에 퍼져 나갔다.

-콰릉!!

“…정전인가.”

지구에서도 으레 겪어 본 일이라 딱히 크게 놀라진 않았다.

끊어졌던 전기 역시 수 초도 지나지 않아 원래대로 돌아왔고.

문제는, 스마트폰이었다.

“방금 번개 쳤을 때 기지국에 문제라도 생겼나….”

스마트폰은 수신 불가 상태가 되어 있었다.

스마트폰 화면에 이곳은 전파가 닿지 않는 지역으로 표시되고 있었는데 보아하니 어디 전화 거는 것도 불가능해 보인다.

“일단은 와이파이 켜면 되겠… 어라?”

자동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호텔의 와이파이가 기능하지 않았다.

“네. 여보세요. 여기 508호인데요.”

재빨리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확인해 본 나는 생각지도 못한 답변을 들었다.

“뭐라고요?”

와이파이는 물론, 키키와이에서 사용되는 통신사업자 세 곳의 스마트폰이 모두 전파를 잡지 못하고 있다니.

반쯤 패닉에 빠진 나는 방에서 나와 로비 직원을 통해 아이작과 연락해 꼭대기 층에 위치한 프레지덴탈 스위트룸으로 올라갔다.

“아이작.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대뜸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간 날 맞이한 건 평상복 차림의 아이작이었다.

평상복이라고 해도 우아하게 리저드맨의 어깨를 감싸고 흘러내리는 최고급 실크로 만든 편안하고 비싸 보이는 복장이었지만, 아무튼.

“그렇군. 너는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없을 테지.”

아이작은 심각함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읽고 있던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답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일인데. 고작 번개 한 번 쳤다고 전파가 싹 다 끊기는 거야. 유선 인터넷도 와이파이도 안 되잖아.”

“아니. 틀렸어.”

“뭐가. 방금 직접 확인하고 왔는데.”

“중계 위성과 통신 위성을 사용한 위성 인터넷과 위성 전화, 그리고 마법적인 수단을 사용해 외부와 연락하는 것도 모두 불가능하다.”

“뭐라고…?”

솔직히 말이 안 되는 얘기 같았다.

일단 번개가 특정한 지점에 꽂힐 확률이라는 게 굉장히 낮지 않은가.

그런데, 한 번 벼락이 쳐서 그게 통신 3사 기지국 전부를 터뜨려 버리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아니. 설사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 해도 그다음이 문제다.

아이작은 방금 위성 인터넷과 위성 전화, 그리고 마법을 사용한 연락 수단이 전부 끊겼다고 말했다.

아무리 내가 아는 태풍과 일어나는 원인이 다르다 해도 단순한 자연재해가 이런 현상을 일으키다니.

“이해가 잘 안 가는데. 대체 태풍이 어떻게 마법까지 봉쇄한다는 거야.”

“정확히 말하면 마도 공학으로 구현한 통신 장비가 먹통이 된다는 뜻이지. 요즘 시대에 고전 마법을 다루는 사람은 없다시피 하니까.”

설명을 들었지만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현대화된 범차원 세계에서 고댓적 시절처럼 마법을 부리는 사람이 없다는 건 나도 이해하고 있었다.

이쪽 세상에서 마법이라는 단어가 지칭하는 건 손이나 지팡이를 휘두르거나 정해진 주문을 외워 기적을 일으키는 게 아니었다.

세련된 범차원 세계의 마법은 과학 기술과 하나가 되어 마도 공학 시대를 꽃피웠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내가 살던 세상과 엇비슷해 보이는 수준의 생활을 영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쪽 세상의 기술은 에너지 효율 측면에서 지구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나다.

똑같이 화석 연료를 사용하더라도 발전소의 터빈과 기타 기계 장치에 반영구적인 소규모 법칙왜곡 마법이 걸려 있어 적은 연료로 훨씬 많은 양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통신 기술 등에서도 마도 공학이 적용된 이쪽 세상은 차원간 통신은 물론이고 데이터를 원활하고 빠르게 전송하는 데에 드는 인프라 구축 비용 역시 지구보다 훨씬 저렴했다.

기술적 한계로 발생하는 자잘한 비효율을 마법을 통해 억지로 지움으로써 훨씬 이상적인 퍼포먼스를 발휘하게 된 것이다.

그 외에도 전파가 아예 닿지 않는 곳에서 마도 ‘공학’보다 ‘마도’ 공학에 가까운 신비한 기술로 메시지를 멀리 떨어진 사람에게 전하는 등, 단순히 에너지 절약 같은 단어로 어찌해 볼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이렇듯 지구보다 뛰어난 기술을 지닌 범차원 세계의 통신망이 태풍 한 번에 전부 먹통이 되다니.

“그러니까 태풍이 어쨌다고 외부랑 연락이 전부 끊어지는 건데.”

“너도 알고 있잖아. 키키와이는 6-2차원에서 가장 차원 역장이 얇은 곳이라고.”

차원. 그 단어가 튀어나온 순간 나는 무언가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혹시 그 태풍이라는 게… 차원이랑 뭔가 상관이 있는 건 아니겠지?”

“정확하게 봤어.”

“……?!”

돌겠네, 진짜.

“차원 역장이 얇은 원소 균형 붕괴가 합쳐진 결과, 태풍의 영향권 안쪽이 아예 별개의 차원으로 변하는 현상이야. 이름하여, 시공의 폭풍―”

“…어딘가 과할 정도로 익숙한 이름인데 기분 탓인가.”

“뭐야. 들어 본 적 없던 것처럼 굴더니.”

“아니, 그, 뭐라 해야 하나. 우리 쪽에선 전혀 다른 뜻으로 쓰이는 단어라서….”

“이상한 우연도 있는 법이군.”

그러게 말이다.

“어쨌든, 시공의 폭풍이 발생한 이상 섬 외부와 물리적으로도 마법적으로도 완벽하게 단절된다는 것 정도는 키키와이에 사는 사람이면 모두가 알고 있지.”

“…그게 사람들이 쓸데없이 차분한 이유였나.”

어쩐지. 호텔 오기 전에 인터넷 들어가 봤을 때 지역민 커뮤니티 등에서도 나 빼곤 호들갑 떠는 사람이 없다 싶었다.

다들 이 정도는 익숙해서 그런 거였군.

상식의 개념이 지구와 다르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는데 설마 태풍이 몰아치는 동안 인터넷이고 나발이고 모조리 끊어지는 것까지 사람들이 납득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어지간한 사람들은 여름 시작되기 전에 이미 사재기나 기타 준비를 마쳐 두었을걸?”

“무슨 월동 준비도 아니고….”

뭐, 태풍 탓에 이차원에 격리되는 게 사실이라면 믿지 못할 이야기도 아니었다.

지구만 해도 추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눈으로 길이 막힐 걸 대비해 이것저것 준비를 해 두지 않나.

눈이 아니더라도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옆 나라에선 집마다 비상용 식수와 비상식량, 거기에 수동발전기가 달린 라디오에 뭐에 재난대비를 해 둔다고 들었다.

정말 키키와이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현상이 자주 일어난다면 사람들이 어느 정도 이에 대비하고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출장소 정상 영업하려는지 모르겠네.”

“못할 이유는 없지. 태풍 주의보가 나와도 키키와이 현지 고객들이 비 뚫고 오기 힘들 뿐이지 다른 차원의 고객이 건너오는 데엔 문제가 없을 테니까.”

“듣고 보니 그러네.”

솔직히 말해서 이런 날씨인데도 내일부터 다시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태풍인데 좀 쉬면 안 되나. 최소한 재택근무라도….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든 것도 잠시.

다른 행원들 죄다 출근하는데 한 달 동안 출장(실제론 출장이 아니라 그냥 30일 내내 놀고 다닌 거지만) 다녀온 내가 쉬면 영 좋지 않은 시선을 받을 게 뻔하다.

힘없는 개인인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까라면 까야지.

“태풍 얼마나 오래가려나.”

“키키와이가 영향권에서 벗어나려면 못해도 5일은 걸리겠지.”

“끔찍하네….”

“그래도, 전산망 사용하는 업무 전부 못 하게 되니까 대부분의 고객님껜 죄송하다 사과드리고 나중에 처리해야 하지 않을까?”

잘 생각해 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오해가 있을 법하지만 나는 내 일을 정말로 좋아했다.

그냥, 태풍이 몰아치는 날에도 일해야 한다는 사실에 잠시 머리가 아파졌을 뿐이지.

그런데 막상 통신이 마비되어 업무에 지장이 생긴다고 듣자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대출받으러 온 고객이 있어도 신청 서류만 받고 키키와이 섬이 태풍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길 기다려야만 하니까.

뭐, 아예 아무것도 못 하는 것보단 낫긴 한데.

“으음….”

일단은 최대한 수기로 정리해 두고 나중에 전부 전산망에 옮기는 수밖에.

“업무 방식이 바뀌는 것 말고는 달라지는 게 없으니 평소처럼 하면 되겠지.”

아이작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괜히 불안해지는데 나만 그런 건가.

* * *

다음 날, 나는 아이작의 차를 얻어 타고 출장소로 향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양의 강수량. 미친 듯이 내리는 비를 뚫고 달린 리무진은 무사히 출장소 지하 주차장에 우릴 내려 주었다.

“어어. 대리님 오랜만. 어디서 놀다 이제 온 거야?”

“놀긴. 출장 다녀왔다니까.”

“헤에. 진짜로?”

한 달 만에 출근한 나를 반기는 유일한 동료는 플루토뿐.

다른 과장들이나 엘라마는 출장이 어땠냐는 등 질문 자체를 던지지 않았다.

이만큼 서로에게 무관심한 것도 신기한 직장이다.

“자. 여기, 기념품.”

“고마워. 대리님. 잘 먹을게.”

이 여자, 계속 반말 쓰는 건 변하지가 않는다. 뭐, 이것도 이젠 정겨운 출장소 풍경의 일부지만.

나는 플루토를 시작으로 엘라마와 과장들, 그리고 아이작에게도 차례차례 과자를 나눠주었다.

물론 내가 산 건 아니다. 바라칸 이사가 출장 다녀온 척해야 한다며 나눠 주라고 준 거였는데 꽤 비싼 거라 내가 탐날 정도였다.

“망할 놈의 날씨 같으니라고.”

예상대로 날씨 탓에 키키와이 현지 고객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차원 관문을 넘어오는 고객 역시 없다시피 했는데, 듣자 하니 건너올 수 있어도 차원 관문이 영향을 받을까 봐 태풍이 몰아치는 키키와이에 감히 들어오려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차원 관문이 키키와이 같은 곳에 직접 설치된 적이 없었다는 걸 생각도 못 했군.”

아이작은 빗나간 예상을 복기하며 서류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오후,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때까지 고객은 단 한 명도 출장소를 방문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심심해 미칠 지경이었다.

뭔가 또 큼지막한 안건이라도 들어오면 좋을 텐데.

그런 나의 기도를 들은 걸까.

-쾅!

우비를 두른 한 사내가 빗속을 뚫고 출장소 문을 거세게 열어젖혔다.

“…계좌 열고 예금 좀 하고 싶은데, 영업 중이지?”

“네. 물론입니다.”

나는 이때까지 알지 못했다.

사내가 말한 ‘좀’이 내가 상상하던 액수와 아득히 차이가 나고.

그가 계좌에 입금하려 하는 것이 모조리 현금이라는 사실 역시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