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10화
마키나의 새 거처를 정리하는 걸 도운 나는 곧바로 숙소로 직행했다.
키키와이를 폭풍이 지나가는 건 흔한 일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과거 호우주의보가 발령될 때마다 섬 안의 마트에선 물자가 동난다고 한다.
나는 마키나에게 미리 식료품과 기타 생필품을 대량으로 모아 두라고 조언했는데 녀석은 이미 뉴스를 확인한 순간 원격으로 주문을 마쳐 두었다고 한다.
누가 누굴 걱정하나 싶어서 나도 돌아가는 길에 앱을 켜서 즉석밥과 파스타, 그리고 기타 통조림과 휴지에 생수까지 알뜰살뜰하게 장바구니에 담아 주문했다.
“이 정도면 넉넉하게 버티겠지….”
신과 천사, 그리고 과학처럼 생활에 스며든 마법이 존재하는 세상답게 범차원 세계의 자연재해는 내가 살던 3-1차원 지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하드코어했다.
아직 직접 겪은 적은 없긴 한데 듣자 하니 차원 왜곡 태풍에 마을 전체가 다른 차원으로 날아가거나 화산 분화로 갇혀 있던 악마들이 튀어나와 행성에 사는 시민 전체가 다른 차원으로 망명하는 등 스케일이 다른 재난 상황이 연출되곤 한다고 한다.
예시로 든 케이스 중 후자는 예전부터 도시의 예산을 사용해 지도자들이 다른 차원에 구매해 둔 땅이 있어서 그쪽으로 옮겨 가느라 비자 받기 어려웠던 거 말곤 크게 문제가 없었다곤 하는데.
어느 쪽이든 평범하게 지구에서 28년 동안 살던 내겐 비현실적인 이야기였다.
지구였으면 어느 국가든 그딴 상황이 일어나면 관료들이든 국가 수반이든 줄줄이 옷 벗고 퇴진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겠지.
“이쪽 세상에서 태어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인가….”
그나마 마법이라는 초자연적인 힘으로 매번 피해 복구가 가능한 게 천만다행이지.
그냥 한없이 나약한 인간 1인 내가 범차원 세계에서 태어났다면 지구에서 살던 시절보다 훨씬 심한 꼴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5년 전 여름이 제일 심했던가….”
5년 전, 당시 나는 반지하도 아니고 아예 창문이 없는 지하 고시원에 살고 있었다.
그해 여름엔 무지막지한 폭우가 쏟아졌는데, 자다 축축하다 싶어서 일어나니 환풍구를 통해 물이 줄줄 방 안으로 흘러들어와서 침대 매트리스가 잠길 듯 말 듯 한 상태였다.
만일 더 깊게 잠들어 있었다면 그대로 지하에서 익사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수압을 이겨내고 소화기로 문을 부숴 빠져나왔는데 아직도 그날을 떠올리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그날 죽었다면 내게 다른 가능성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벽에 부딪혀 절망한 화가 지망생으로 삶을 마무리 지었겠지.
이쪽 세상과 달리 3-1차원에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신도 운명도 모두 실존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면 멀쩡히 살아가던 사람이 갑자기 죽어 나가고 나 같은 사람이 무작위로 행운의 간택을 받아 살아남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겠지.
인격을 지닌 신 같은 게 세상을 지배하니까 그들이 신경 쓰지 못하는 곳에서 갖은 문제가 터지는 걸지도 모른다.
뭐, 이건 신이 존재하지 않고 모든 일이 확률에 의해 일어난다 해도 달라질 게 없으니 그냥 내 망상으로 치부해도 상관은 없겠지.
최소한, 이쪽 세상의 신들은 내가 아는 한 전능하지만 전지하지 않으며, 인격을 지니고 있기에 불완전하다.
어쩌면 범차원 세계의 신들이 세계를 통치하는 걸 그만두고 멋대로 굴러가게 둔 건 자신들의 불완전함을 알고 있기에 무작위성에게 자리를 양보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게 꼭 정답인가 묻는다면 사실 대답할 자신은 없었다.
결과적으로 범차원 세계 역시 내가 살던 세상과 그리 다를 바 없이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신들이 있는데도 강압적인 신권정치가 펼쳐지지 않고 사람들이 나름대로 평화롭게 살아간다는 사실이 신기한 건 사실이니 그들의 판단이 옳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신들 입장에서도 모든 사람들의 원망을 한 몸에 받는 건 분명 부담스럽고 지치는 일일 것이다.
아무리 초월적인 존재라고 해도 저들 역시 나나 다른 필멸자처럼 감정을 지니고 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빌렸던 용달차를 반납해야 하는 곳까지 도착해 있었다.
“감사합니다. 차 잘 썼습니다.”
“네. 다음에도 이용해 주세요.”
나는 용달차를 돌려준 다음 근처에 주차해 두었던 업무용 차량으로 갈아타 독신 숙소로 돌아왔다.
“어우. 무슨 날씨가….”
하늘은 이미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쿠릉
해변가를 바라보니 멀리서 번개가 치고 있는 게 보였다.
“물만 안 새면 좋겠는데.”
빗물이 새는 건 고시원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개인적인 트라우마의 트리거라서, 물이 새면 상상 이상으로 심각한 패닉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집에 물의 정령이 묵고 있는 만큼 어떻게든 해결이 될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한 번 새기 시작하면 진짜 가전 제품 코드 싹 뽑아 놓고 호텔로 피신하지 않으면 멘탈을 지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차원신용금고의 독신 행원 숙소가 신축이라 누수 같은 일은 없을 거라는 건데.
“…….”
제발 시공업체가 똑바로 된 곳이었으면 좋겠다.
한국에서 살던 시절 자주 듣던 괴담이 이쪽에선 웃음거리였으면 정말 바랄 바가 없다.
듣자 하니 서울의 고급 브랜드 아파트조차도 마감이 허술하거나 건축 자재를 속여 싼 걸 사용하는 경우가 잦다지 않나.
한 채가 몇십억 원씩 하는 비싼 집인데도 빠르고 싸게 지을 수 있는 벽식 구조로 만드는 탓에 층간소음이 끊이지 않는 건 덤.
해외에선 절대 비싼 건축물 지을 때 사용하지 않는 구조인데 이미 한국에선 어느 아파트든 벽식 구조로 짓는 게 뿌리 깊은 관습처럼 되어 버려서 이것저것 문제가 많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뭐, 의식의 흐름 따라 살아 본 적도 없는 아파트 얘기까지 나오긴 했지만.
어느 쪽이든 독신 숙소에 물이 새지만 않으면 괜찮다.
다시는 옛날에 죽을 뻔했던 기억을 떠올리기는 싫다.
밤에 잠들 때마다 그때의 악몽에 시달리는 것도.
“…돌아가면 에어컨 틀어 놔야지.”
밀린 빨래하고 건조기 돌리면 시원하게 누워서 만화나 읽어야겠다.
내일부턴 다시 출장소에 출근해야 한다.
한 달 동안 마키나와 놀러 다니기만 했던 탓에 은행원으로서 감이 죽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지금 김지안 대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창구.
다시 마음 가다듬고 고객님을 응대하기 위해 성실히 업무에 임해야겠지.
거대 태풍이 몰려오든 말든 월급쟁이는 출근해서 일해야 한다.
우산 외에도 우비까지 꼭꼭 챙겨입고 나가야 양복이 젖지 않겠지.
아니다. 그냥 방수 가방에 담아 출근한 다음 거기서 갈아입을까.
“…도로가 침수되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제일 걱정이 되는 건 출근길이다.
내가 출장소로 향할 때 이용하는 도로는 해안 도로라 비가 많이 내리거나 태풍이 불면 수면이 올라가 도로가 일부 잠길지도 모른다.
최근 몇 년 동안 키키와이에 큰 태풍이 몰아친 적이 없어서 사실 어찌 될지 감도 잡히지 않는데, 어떡해야 할까.
“역시 이럴 땐….”
나는 컴퓨터를 켜 키키와이 토박이들이 이용하는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반년 이상 이곳에 거주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커뮤니티지만 나는 간신히 조건을 만족하고 있었고 종사하는 직군에 금융업이라고 표시되어 있던 덕에 토박이들에게 질문했을 때 나름 자세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역시 도로 잠기려나… 미리 근처 숙박시설 예약해 두는 게 나을지도.”
엘라마의 성격상 도로가 침수되어 지각했다는 소릴 들으면 출근하자마자 재떨이를 던질지도 모른다.
“오.”
그리고 잠시 후, 내가 적은 질문에 키키와이 거주 10년 차인 의료 관계자가 댓글을 달아주었다.
<그쪽 도로 백 퍼센트 잠기니까 미리 직장 근처에 묵거나 숙직실에서 자거나 하시는 게 나을 듯?>
“하아….”
제발 이런 답변이 달리지 않길 기도했는데, 하늘도 무심하지.
나는 답변 작성자에게 감사하다고 댓글을 단 다음 컴퓨터를 껐다.
“이거 진짜 어디 예약해 둬야 하나.”
출장소에서 가까운 숙박시설. 어디가 좋을까.
처음엔 아이작네 호텔에 묵을까 싶었는데 태풍의 영향이 며칠이나 갈지 짐작도 가지 않을뿐더러 숙박료가 비싸 엄두가 나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그냥 호캉스 간다고 생각하고 질렀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난 한 달 동안 마키나의 베이비시팅을 맡으며 적지 않게 개인 재산을 투입하고 말았다.
숙박비와 기타 식비야 바라칸 이사님이 주신 예산으로 해결하긴 했는데, 그 외의 비용을 전부 나 개인이 부담한 탓이었다.
이사님과의 커넥션이 생겨 진급이든 다른 일이든 유리하게 끌어갈 수 있는 걸 생각하면 결코 돈이 아깝지 않았지만 매달 빠져나가는 카드비가 늘어나는 건 솔직히 말해서 고통이었다.
“으음, 그냥 적당한 여관이라도 잡아야겠네. 그래. 물만 안 새면 되지.”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며 숙박업소 예약 앱을 켰을 때였다.
-딩동
<아이작: 금일 저녁 10시부터 남쪽 해안가 도로 봉쇄 예정이다. 객실 비워 놓고 리무진 보냈으니 투숙 준비 마쳐 두도록.>
평소처럼 정나미 뚝 떨어지는 말투로 아이작이 메시지를 보냈다.
“와. 이게 되네.”
동기 좋다는 게 뭔가.
이럴 때 아니면 언제 공짜로 묵어볼까.
<고마워. 담에 밥 살게.>
나는 아이작의 배려에 감격하며 짐을 싸기 시작했다.
“아, 두꺼비집 전부 내려 두는 게 나으려나.”
혹시 모르는 사고에 대비해 가전제품 코드를 뽑고 전기, 가스까지 싹 다 차단한 다음에야 나는 안심하고 집을 나설 수 있었다.
* * *
같은 시각, 남후리텐해.
키키와이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해상.
이곳에선 한 척의 선박이 태풍을 뚫고 위태로운 항해를 이어 가고 있었다.
배가 싣고 있는 건 후리텐의 해외 영토에 거주하던 어떤 부호가 남긴 막대한 유산.
구체적인 내역은 귀금속 소량과 트레일러 두세 대를 가득 채운 현금이었다.
부호가 사망한 후, 적법한 상속자인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지시를 따라 그가 남긴 대량의 현금을 후리텐 본토로 수송하는 중이었다.
생전에 아버지가 불법과 합법을 가리지 않고 쌓아 올린 현금의 산은 변호사와 기타 법조인, 그리고 세무사나 재무 컨설턴트의 도움을 받아 완벽하게 깨끗한 돈으로 세탁되었다.
남은 건 이만한 양의 현금을 보관할 수 있는 대형 금고를 지닌 거대 은행의 본점에 연락해 계좌에 돈을 입금하는 것뿐이었다.
상속세를 피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상속세를 냄으로써 이전에 아버지가 행한 악행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유산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되니 값싼 대가라고 할 수 있었다.
문제는, 현금을 운반 중인 배가 느닷없이 출현한 태풍의 영향권에 갇혀 버렸다는 사실이다.
소문을 듣고 몰려든 해적들까지 그의 뒤를 쫓아오고 있는 상황.
현금을 옮기고 있는지라 용병들을 고용하긴 했어도 적들의 수가 많아도 너무 많다.
이대로는 유산을 빼앗길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전에 바람과 파도에 휩쓸려 배가 침몰하거나.
“하는 수 없군.”
선장의 조언을 따라, 상속자는 배를 가까운 섬에 한 번 세워 그곳의 은행에 잠시 동안 현금을 맡겨 두기로 했다.
그리고, 항해 중인 선박과 가장 가깝고 대형 은행의 지점이 있는 곳은 키키와이 하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