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107/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07화

내가 가장 먼저 마키나를 데리고 한 일은 남은 일주일 동안 차원신용금고 본점의 행장 전용 지하 주차장 입구가 내려다보이는 맞은편의 호텔에 방을 잡는 것이었다.

바라칸 이사는 아직도 마키나가 델 몬테 지점장의 집에 묵고 있다고 믿고 있다.

지점장은 이사에게 주기적으로 마키나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고서에 첨부해 보내고 있었는데,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우린 마키나에게 몇 벌인가 다른 옷을 입혀 일주일 어치 사진을 미리 확보해 두었다.

마키나가 행장과 독대하더라도 그 사실이 바라칸 이사를 포함한 이사회의 귀에 들어가선 안 된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정말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편 마키나는 내가 낸 아이디어에 회의적인 눈치였다.

“이번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낭비되는 리소스가 너무 큰 것 같습니다.”

“그것도 계산대로야.”

“무슨 계획이 있다는 건가요.”

“그야, 합리적이고 낭비 없이 뭐든 해 버리면 인공 지능이 저지른 짓인 게 티가 나니까.”

“그럴싸하군요.”

내 계획이 남들 보기에 얼마나 멍청해 보일지는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내 노림수였다.

나름대로 머리가 잘 굴러간다는 나나 델 몬테 지점장, 그리고 마키나가 이런 짓을 할 거라곤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게 뻔하니까.

계획이 너무 무모한 데에다 의체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지라 마키나가 솔선수범해 반대하긴 했지만 결국은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해 내 아이디어를 채택하기로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델 몬테 지점장은 모든 계획을 아내인 레핀에게 숨기기로 했다.

만에 하나 그녀가 알게 된다면 분명 우릴 쥐어패서라도 말리려 들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잠시 첨언하자면, 대전쟁 시절에 레핀이 수여받은 훈장의 숫자가 저보다 많습니다. 참고로 모두 적군을 사살하고 받은 것들입니다.’

델 몬테 지점장의 말을 떠올리자마자 전신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겉모습만 보면 평범한 기계 인간 여성인데 설마 대전쟁 시대의 영웅이었을 줄이야.

하긴, 한국에 살던 시절에도 해병대 출신 할머니의 사진이 뉴스에 올라온 걸 본 적이 있었는데 얼굴만 봐선 전직 해병이었다는 걸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레핀 씨도 두어 번 집 앞에서 봤을 땐 엄청 온화해 보였는데, 의외로 집에선 무서운 사람일지도 모른다.

아님 말고.

어쨌든, 이번 작전은 반드시 먹힐 거다.

행장의 사회적 위치를 고려한다면 분명 그녀는 내가 예상한 대로 움직여 줄 테니까.

“밥 먹고 준비하자. 의체 충격 방지 모드로 설정해 둬.”

“이미 준비 끝났습니다.”

마키나가 의체의 가슴을 두드리자 퉁, 하고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돈을 떡칠해 만든 마법 공학 의체인 데에다 마키나는 갖은 기능을 아이의 모습이긴 해도 조금 험하게 굴려도 문제없겠지.

그럼 어디, 남은 일주일 동안 행장님이 출근하길 기다려 볼까.

* * *

그로부터 3일이 지났다.

모처럼 차원신용금고 본점에 출근한 은행장, 오커스 디스파테르는 쌓아 둔 결재 서류에 도장을 찍고 있었다.

“전산망 관련 논의가 활발하군….”

최근 들어 가장 신경 쓰이는 건 이사회의 움직임이었다.

대립하고 있던 구C와 구E가 거짓말처럼 합을 맞추며 인공 지능 솔루션의 협박성 요구를 받아 준 걸 보니 가끔은 이런 위기 아닌 위기가 생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공동의 적이 생기든 함께 위기를 맞이하든 해야 내부 단결이 이뤄지는 법이지.”

마키나라는 인공 지능은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몸을 주지 않으면 은행의 데이터를 포기하라는 식으로 나왔는데, 결국은 이사회의 매끄러운 대응으로 만족한 모양이었다.

물론 마키나를 지울 방법이 없어도 신에게만 가능한 방식으로 대처할 수 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오커스는 고의로 이사회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피조물이 이룰 수 없는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이야말로 신의 역할인 법.

자신이 신언神言이나 권능을 사용하지 않아도 이사회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그들의 역량을 확인하고 성장시키기 위해서라도 개입을 자제할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이사회의 구성원들이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전부 겪은 이들이라 해도 기나긴 세월을 살아온 신 앞에선 어린아이와도 같다.

오커스는 그들이 더욱 나은 사람으로 거듭나길 원했다.

파벌 싸움으로 자원과 정신력을 소모하는 것이 아닌, 지닌 모든 역량을 하나로 묶어 6-2차원, 더욱 나아가 드넓은 범차원 세계 전체의 경제를 지탱하는 굵은 기둥이 되길 바랐다.

정계와 재계, 그리고 타 차원의 권력 기구 등으로부터 계속 비판을 받으면서도 그녀가 세 은행의 합병을 추진한 건 신이 아닌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세상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함이었다.

물론, 신들조차 잘못 판단하고 실수를 하는 법이다. 인격과 감정을 지니고 있는 이상 함정에 빠지기 마련이니까.

그렇기에. 오커스는 노력했다.

신들은 한 번에 너무나도 큰 폭으로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기 위해 자신의 권능을 부분적으로 제한했지만 여전히 그 탁월한 오성과 지혜 등을 살려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영화와 음악을 비롯한 모든 예술의 수호자인 아폴론은 로렐트리의 시장직을 수행함과 동시에 전도유망한 예술가들을 찾아 후원했고.

전업 투자자가 된 친척 하데스는 게을렀지만 투자에 천재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어 세상을 바꿀 알짜배기 유니콘 기업에게 돈을 뿌렸다. 차원신용금고에 투자한 건 원칙에서 벗어난 예외였긴 했지만.

그 외에도 다수의 신들이 마음 가는 대로 자신들이 창조한 세상을 누리며 동시에 피조물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식으로 기여하는 것을 택했다.

딱히 신들이 이타적이어서 가능했던 일은 아니다.

그저, 피조물들에게 고대와는 달라진 방식의 은혜恩惠를 내리고 있을 뿐.

그들 역시 신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선 사람들의 신앙을 필요로 했다.

창조자를 향한 맹목적이었던 사람들의 믿음은 시대가 바뀌며 사회적 지위를 지닌 이들을 향한 복종, 존경심 혹은 큰 액수를 기부하거나 지불하는 이를 향한 감사로 변했다.

신들은 사회에 새로운 형태의 은혜를 내림으로써 달라진 신앙을 수집했다.

이는 일종의 사회적 계약.

창조주와 피조물의 사이를 정의하는 단어의 이름이 거래라는 건 3-1차원의 종교인이 본다면 기겁할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신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 그런 신들 가운데에서 노력이란 걸 실제로 하고 있다는 건, 정말로 신이 아닌 지음받은 이들과 같이 막대한 시간과 공을 들여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거나 실적을 내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또 어찌 되려나….”

잠시 일손을 멈춘 오커스 행장은 생각에 잠겼다.

이번에 이사회가 마키나의 요구를 받아들인 덕에 은행의 가장 큰 자산이라고 할 수 있는 데이터가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동안 서로 잡아먹을 기회만 노리고 있던 두 파벌이 의체와 신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시적인 협력 체제를 구축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마키나가 만들어 낸 짧은 평화가 끝난 다음엔 어떻게 될까.

아마도 구C는 구E의 치부라고 할 수 있는 ‘그 사건’을 다시 도마 위에 올리려 할 것이다.

오커스는 구E가 스스로 어두운 부분을 해결할 수 있도록 충분한 유예 기한을 주었지만 자정 작용은 일어나지 않았다.

행장은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이 구C의 손을 들어주어야만 했다.

구E 간부 중 ‘그 사건’에 관여된 이들을 잘라내지 못한다면 제대로 상벌체계가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올 우려가 있는 까닭이다.

“골치 아프게 되었어.”

파벌 간에 존재하는 미묘한 균형을 깨뜨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망설여졌지만 결국은 최대한 밸런스를 유지하는 선에서 개입을 끝내야 한다는 것이 오커스가 내린 결론이었다.

결제가 필요한 안건도 전부 정리했겠다, 오늘은 더 앉아 있어봤자 효율이 나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그녀는 비서를 호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부터 말하는 거 받아 적어서 이사회에 전달하고, 끝나면 돌아가서 쉬어야겠어.”

“차 대기시키겠습니다.”

-끄덕

오커스가 수긍하고 지시 사항을 읊기 시작했다.

비서는 그것을 빠짐없이 태블릿에 옮겨 적은 다음 문을 열고 지하 2층까지 행장을 배웅했다.

행장은 주차장 입구까지 따라와 깍듯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비서를 뒤로하고 운전수의 에스코트를 받아 세단에 탑승했다.

세단의 뒷좌석과 앞좌석은 격벽으로 가로막혀 있어 완벽한 방음을 구현하고 있었다.

운전수와 소통하는 유일한 방법은 격벽에 달린 마이크와 스피커. 행장의 허락 없이는 운전수는 뒷좌석을 볼 수 없었고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집으로. 다리 쪽으로 가지. 노을이 보고 싶군.”

<알겠습니다.>

행장이 통화 스위치를 OFF로 돌리자 세단이 소리 없이 앞으로 미끄러지듯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차량이 주차장 출구를 벗어난 순간.

옆에서 튀어나온 자그마한 인영이 앞 범퍼에 치여 전방으로 날아갔다.

-끼이익!

-덜컹

“…….”

“…….”

0.5초 동안 굳어 버린 운전수와 오커스 행장.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 * *

마키나와 은행장을 독대하게 하는 계획의 골자는 단순했다.

첫째. 마키나를 행장의 자가용에 일정 시간 이상 태울 것.

이를 위해 필요한 건 바로 주차장 입구를 지키는 보안 요원의 주의를 끄는 것이었다.

“네. 사장님. 그 위치에서 공연해 주시면 됩니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탈 나지 않게 현금을 지불하고 고용한 길거리 공연자는 주차장 입구 근처에서 사람들을 끌어모으며 춤판을 벌이기 시작했다.

“상황 발생. 전용 주차장 앞에 거수자 출현.”

그렇게 세 보안 요원 중 둘이 공연자에게 다른 곳으로 이동해 달라고 부탁하는 동안 마키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확인. 사각지대로 진입합니다.>

이어폰을 통해 들려 온 마키나의 목소리.

나는 호텔 객실 창문에 기대 망원경으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치지만 말아. 제발.”

내가 세운 계획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바보 같았다.

아무리 최신 기술이 사용된 의체라고 해도 겉모습만 보면 평범한 3세 기계 인간 유아인 마키나에게.

-끼이익!

-덜컹

달리는 세단에 치이도록 지시하다니.

* * *

오커스 디스파테르의 판단은 빨랐다.

세단에 치여 2m가량 날아가 바닥을 구르던 아이의 몸을 들어 올려 세단에 실은 그녀는 저승을 다스리는 신의 권능을 사용했다.

-파아앗

손에서 흘러나온 환한 녹색의 기운이 아이의 몸을 감쌌다.

이로써 아이의 영혼은 육신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몸이 단단한 기계 인간이니 이대로 병원으로 가면 살릴 수 있을 터.

“제일 가까운 대학 병원으로! 서둘러!”

고함에 가까운 명령에 운전수가 반응해 차를 몰기 시작했다.

“제발, 죽지만 말아 다오.”

유백색의 인조 혈액을 흘리며 기절한 아이.

은행장은 그 두 눈이 조금씩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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