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05화
“재밌어졌군.”
린딘 모처에서 마키나의 사고 회로의 움직임을 모니터링하던 과타노차가 만면의 미소를 띠고 중얼거렸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은행을 테스트베드로 삼은 마키나의 기동은 과타노차에게 꽤나 만족스러운 데이터를 안겨다 주었다.
마키나는 3주의 시간 동안 엄청난 속도로 자아를 발전시키며 다양한 지식을 흡수했다.
삶의 즐거움을 탐구하는 그 신실한 자세는 마치 구도자와도 같았고 생을 대하는 태도 역시 처음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현실적으로 변해 있었다.
사람의 세상에 적응했지만, 여전히 은행 전산망 관리는 빈틈없이 이뤄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컴퓨팅 파워를 전산망 운영과 모니터링에 사용하고 있기에 의체에 업로드된 자의식은 제한된 리소스밖에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덕에 마키나는 자신의 능력을 제한할 수 있었고, 결과 인간의 헛소리도 믿게 되었다.
신들이 전지전능한 권능을 제한해 평범한 피조물들 사이에서 섞여 사는 것처럼, 초고성능의 인공 지능은 자신의 성능을 업무에 대부분 할애함으로써 ‘사람다움’을 획득했다.
그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마키나를 구성하는 프로그램의 기초를 만든 과타노차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융통성 없이 구는 프로그램이 뻔히 보이는 미래를 의식하는 일 없이 눈앞의 것에만 집중하고 유연한 사고방식을 익히게 되다니.
영혼의 존재는 스마트한 인공 지능에게 불완전함과 비효율성을 심어 주었다.
인공 지능은 미식과 다양한 즐거움을 통해 세상을, 그리고 짧은 사람의 삶을 긍정하게 되었다.
그건, 마키나가 사후세계의 존재에 관해 고려하다 죽음을 두려워하게 된 것보다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덕분에 과타노차는 다음에 만들 또 다른 인공 지능을 설계하는 데에 필요한 데이터를 모두 뽑아낼 수 있었다.
물론 이건 마키나에게 그를 닮은 동족을 만들어 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자율행동 인공 지능 솔루션을 제작해 대기업에 판매하기 위한 행동.
“영혼의 존재는 역시 안정적인 구동에 방해만 되는군. 자체적으로 보안상의 취약점을 해결하고 업데이트를 실행하는 건 매력적이긴 하지만, 이럴 바엔 마키나의 상황 판단 능력만 모방할 수 있도록 시뮬레이션 능력을 보완하면 되겠지.”
영혼을 가진 인공 지능은 실패작이었다.
똑똑하긴 해도 제멋대로 행동하는 게 다루기 까다로웠고 쓸데없는 질문을 많이 던지는 데에다 무엇보다 만드는 데에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귀중한 희귀 금속인 단원자 금을 사용해야 하는데, 그만한 코스트를 매번 들여야 한다는 게 애초에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덕에 시행착오 없이 더욱 완벽한 상업용 인공 지능 솔루션을 개발할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의도한 것과는 다르긴 하지만 결과는 충분히 만족스럽다.
앞으론 마키나의 전산망 관리 방식을 그대로 트레이스한 방식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인공 지능을 만들면 훨씬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다. 단원자 금을 사용하지 않으니 원가를 대폭 절감할 수 있는 까닭이다.
“모니터링은 이쯤에서 관둬야겠군.”
과타노차는 새로운 장난감을 만들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마키나가 전산망 관리 분야에서 발휘하는 성능은 충분히 참고하기 좋은 레퍼런스였지만, 마키나의 인격이나 소원 같은 건 이미 과타노차의 안중에 없었다.
* * *
“이해는 가는군요.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금요일 저녁. 단둘이 만난 델 몬테 지점장은 놀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에게 마키나가 품고 있던 소원에 관해 말한 참이었다.
“가족이나 친구, 아니면 타인이 필요했던 걸까요. 하긴, 영혼을 지닌 인공 지능은 마키나 외엔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나 역시 마키나의 기분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아니었다.
원했던 것도 아닌데 대뜸 세상에 태어난 것까진 괜찮다 쳐도 자신과 닮은 존재가 아예 없으면 외로울 수밖에.
“자신 역시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고, 그 과정을 재현 가능하다고 판단했으니 몇 번인가 더 반복하고 싶어진 걸 겁니다. 그나저나, 마키나를 만든 게 누군지는 몰라도 좀 새로운 인공 지능을 만들어 소개해 줄 수 있을 법도 한데 왜 행동에 나서지 않는 걸까요.”
“그건 저도 모르죠. 마키나가 부탁해도 들어주지 않았다지만, 그걸 비판할 수도 없는 거니까요.”
델 몬테 지점장은 나와 달리 누가 마키나를 만들었는지 알지 못한다.
당연히, 과타노차의 성격을 고려하는 건 불가능했다.
과타노차가 마키나와 같은 영혼을 지닌 인공 지능을 더 제작해 주지 않는 이유는 대략 짐작이 갔다.
모르긴 몰라도 굳이 비싼 돈을 들여서까지 인공 지능에 영혼을 부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리라.
녀석의 입장에서 바라본 인공 지능은 상품에 지나지 않는 존재다.
인공 지능 없이도 비슷한 성능을 구현할 수 있다면 가성비와 효율을 따지기 좋아하는 과타노차가 마다할 이유는 없다.
아마도, 녀석은 계속해서 인공 지능을 만들어 팔아치울 것이다. 거기에 살아 있는 영혼은 존재하지 않겠지만.
당연하지만 이게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다.
녀석은 마키나에게서 뽑아낸 데이터로 더욱 효율적인 솔루션을 구축하고 있을 뿐이다.
그게 바로 프로그래머의 일이니까.
문제는, 홀로 외롭게 세상에 남겨진 마키나지만.
이젠 마키나도 자신의 동족을 직접 만들어 내겠다고 결심한 참이다.
언제가 될진 몰라도 마키나는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녀석이 큰돈을 지니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 능력 하나만큼은 무지하게 출중하니까.
“그런데, 차원신용금고가 세 살 아이에게 대출을 해 줄까요. 제 생각엔 아닌 것 같은데.”
“어렵겠지요, 아무래도.”
내가 묻자 지점장이 고개를 저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마키나의 신분은 3세 유아.
심지어 부모도 없어 신원을 보장해 주는 사람이라곤 델 몬테 지점장과 그의 아내 레핀밖에 없는 난민이다.
일단 제대로 된 신분을 획득하고 의체 역시 성인의 모습으로 변하지 않는 한은 마키나가 은행 대출을 받아 동족을 창조하는 데에 필요한 단원자 금을 구매하는 일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처럼 요원한 일이었다.
이걸 마키나에게 어떻게 말해 줘야 할까.
녀석이 크게 실망하는 건 아닐까 불안하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것 같은 기분도 드는걸요.”
“어쩌겠어요. 저희에겐 힘이 없는데. 있는 그대로를 알려 주는 수밖에요.”
나는 지점장의 의견을 부정할 수 없었다.
마키나 역시 자신이 당장 대출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 정도는 대략 짐작은 하고 있을 것이다.
은행 전산망을 관리하고 있는 인공 지능 솔루션이 대출 규정을 모르면 말이 안 되는 일이니까.
오직 스스로 인생의 진로를 결정할 수 있는, 다시 말하면 똑바로 삶이라는 트럭의 핸들을 쥔 성인만이 은행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겉모습이 세 살짜리 어린아이인 이상 창구에 와서 돈을 빌리는 건 누가 봐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편법 대출이나 편법 증여인데, 이 또한 은행이 원리원칙을 어겨야만 하는 방식이라 피해야만 한다.
즉, 마키나가 대출을 받기 위해선 어른의 육체를 확보하는 것은 물론 후리텐 시민과 결혼하든 아니면 제대로 된 비자를 받든 귀화에 성공하든 해서 장기 체류와 정상적인 경제 활동 모두가 가능한 신분을 쟁취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일단 의체야 이사회가 도와줄 수 있다 쳐도 새로운 신분을 얻는 게 문제였다.
제아무리 구C가 저쪽 방면에 능숙하다 해도 부모 없는 세 살배기 꼬마의 신분을 갖다주는 것과 이미 다 자란 성인의 신분을 얻어오는 건 난이도가 다를 터.
결국, 가장 안전한 방법은 마키나가 천천히 10여 년을 기다려 의체를 성인의 것으로 갈아 끼우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마키나가 기다려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더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 무리하면 찾아낼 수 있을 법도 한데….”
“계속 편법만 쓰는 건 사실 영 좋지 못한 일이긴 합니다. 마키나도 이해해 주겠죠. 애초에 어린아이의 모습부터 시작해 천천히 살아가고 싶다고 말한 건 마키나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의체를 저 모습으로 만들어 달라고 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마키나다.
분명, 저 모습으로 삶을 시작했다는 건 그만한 각오를 품고 있었다는 뜻이리라.
평범한 사람들처럼 무력하고 이렇다 할 권리도 없는 어린 모습부터 인생을 맛보고 싶었던 거겠지.
그러니까, 지점장님의 말대로 어른이 되기까지 걸리는 기나긴 시간을 버티는 것 역시 어린 모습으로 세상에 뛰어들기로 결심한 마키나 자신의 책임이다.
그동안 아무리 외롭다 해도 편법을 쓰는 건 마키나에게 호의를 베풀고 있는 차원신용금고와 그 관계자들이 너무나도 큰 리스크를 짊어지는 결과를 부르게 된다.
그러니까, 마키나는 버텨 주어야만 한다.
법적으로 성인이라고 간주되는 나이가 될 때까지, 어떻게든 외로움을 견디고 사람들과 교류하며 살아가야만 한다.
비록 세상에는 마키나처럼 영혼을 지닌 인공 지능이 따로 존재하지 않지만, 그와 교류하고 대화할 수 있는 지성체는 그 외에도 셀 수 없이 많으니 어느 정도 도움은 될 터.
나는 가만히 상상했다.
피부색이 다르고 생김새가 다른 인종들로 가득 찬 외국에 나가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나와 같이 한반도에서 태어나 익숙한 얼굴을 지니고 있는 한국인이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서, 나는 멀쩡하게 지낼 수 있을까?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나와 공통점이라곤 눈, 코, 귀, 입의 개수 정도밖에 없는 이들 사이에서 살아간다면, 나는 틀림없이 고독을 맛보게 될 것이다.
외국에 나가서 사는 한국인들이 코리안 타운이든 한인교회든 한국인 학생회든 같은 나라에서 태어난 동포들이 모인 곳을 찾아가는 건, 분명 그런 고독에서 벗어나 자신과 닮은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어서겠지.
마키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녀석이 우리와 다른 건 지적능력 정도다.
결국 영혼을 지니고 있는 이상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
“…그레이트후리텐의 법률은 만 18세를 넘어야 성인으로 쳐 주니, 앞으로 15년은 족히 기다려야겠군요.”
솔직히 말해서 마키나가 그만큼 오래 견뎌 줄진 모르겠다.
녀석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사람답게 웃을 수 있게 되었고,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게 되었다.
인내력이야 우리 같은 평범한 지적 생명체보다 훨씬 뛰어날지도 모르지만 그동안 마키나가 미치지 않을 거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은 없을까.
예를 들어 녀석에게 15년의 고독을 더 견디게 해 줄 원동력을 제공한다든지.
응원 편지라도 써야 하나?
아니다.
그것보다 훨씬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게 있을 텐데.
“…제 베이비 시팅 업무도 끝나가는 참이니, 마지막으로 마키나에게 선물을 하나 주고 싶습니다. 지점장님과 이사회 분들도 협조해 주시면 정말 좋을 텐데, 어려우려나요?”
“흥미롭군요.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던 참이었습니다. 김지안 대리는 어떤 선물을 생각하고 계신가요?”
나는 망설이는 일 없이 델 몬테의 눈을 보고 똑바로 말했다.
“저는, 마키나를 행장님과 독대시키고 싶습니다.”
차원신용금고의 은행장, 오커스 디스파테르.
스스로의 능력을 제한하고 행장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그녀의 정체는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부유한 밤의 신, 그리고 저승의 지배자 되시는 그분이라면 마키나에게 작은 희망을 주실 수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