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99화
“어우. 거의 서른 다 되어서 그런가. 몸이 예전 같지가 않네.”
나는 지칠 때까지 논 다음에야 바라칸 이사와 델 몬테 지점장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마키나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삼삼오오 모여 물놀이 중인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고블린과 펭귄 수인 등 다양한 종족이 어우러져 있는 모습은 지구 기준 무척이나 기이한 것이었지만 이쪽 세상에선 평범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키나는 저들의 존재가 마냥 신기하다는 것처럼 지켜보고 있었다.
이유는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내가 알 수 있는 건 녀석이 따뜻한 코코아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벌써 석 잔째….”
심지어 벤티 사이즈.
일반적인 3세 유아가 저만큼 코코아를 마셔 대면 슈거 러시가 올 텐데, 의체 성능 좋다고 너무 몸 막 쓰는 거 아닌가 싶었다.
“…….”
하여튼 단 거 겁나 좋아하네.
계속 코코아 퍼마시는 게 애다운 건지 아니면 따로 이유가 있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어쨌든, 녀석은 아까 잠시 혼자 있게 해 달라고 말한 이후로 묘하게 말 걸기 힘든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 나만 홀로 심심하게 돌아다녀야 했고.
결국은 체력이 다 방전되어 이사님과 지점장님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었다.
“아, 저기 계시네.”
바라칸과 델 몬테는 아까 칵테일을 마신 야외 바 근처의 선베드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둘은 수영복까지 입어 놓고서 물 한 방을 몸에 묻히는 일 없이 계속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는데, 보아하니 마키나를 내게 맡겨 놓고 계속 일 얘기를 하던 모양이었다.
저들이 오늘 만날 장소로 워터파크를 고른 이유는 몇 가지 있을 것이다.
첫째, 이곳엔 엿들을 은행 관계자가 없고.
둘째, 마키나의 정체를 의심할 사람도 없다.
…어쩌면, 마키나가 먼저 가고 싶다고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 하루 종일 무표정한 얼굴로 무지막지하게 워터파크의 어트랙션을 즐기던 걸 보면 이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을 것 같다.
어쨌든, 이사님과 지점장님은 딱히 자기 가족과 함께 온 것도 아니라서 그런지 굳이 힘들게 놀러 다니려 하진 않는 듯했다.
“…구E의 ‘그 안건’에 메스가 들어가겠군요.”
거리가 가까워지자 두 사람이 논의하는 내용이 들려 오기 시작했다.
“그럴 거야. 어쨌든 구C 이사들이 무사히 살아남았으니까. 행장님이 중재하고 싶어도 말릴 명분이 없을 테지.”
“조금 신기한 건, 모든 데이터를 열람 가능한 마키나가 그 일에 관해선 아무런 의견도 표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야 그렇겠지. 당시의 자료는 전산 시스템이 통합되던 당시 혼란을 틈타 상계된 손실만 뒤늦게 입력되었지. 과정은 전부 수기로 기록되어서 들여다볼 수 없는 거야.”
거기까지 얘기하던 두 사람은 마침내 내 존재를 눈치채고 일제히 뒤를 돌아봤다.
“…놀랐잖습니까. 김지안 대리.”
“죄송합니다.”
델 몬테 지점장도, 바라칸 이사도, 딱히 내게 ‘어디까지 들었냐’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딱히 내가 듣는다고 어디 이야기가 새어나가거나 곤란해진다고 생각하진 않는 모양이었다.
“마키나는 어딨나요?”
“저기서 혼자 코코아 마시는 중입니다. 잠시 생각할 게 있다더군요.”
“혹시 모르니 혼자 어디 훌쩍 가 버리지 않도록 눈을 떼지 말아 주게.”
“물론입니다.”
지점장과 이사에게 각각 대답하자 두 사람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흔쾌히 한 달 동안 델 몬테 지점장을 도와 마키나를 데리고 있겠다고 하니 안심한 모양이었다.
베이비시팅은 은행원의 업무와는 말도 안 되게 동떨어진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마키나의 멘탈이든 호기심이든 케어해 줄 사람이 있어야 전산망도 똑바로 돌아갈 터.
게다가 이건 이사가 직접 내게 부탁한 일이다.
인사 고과라면 알아서 챙겨 줄 게 틀림없다.
게다가, 솔직히 말해서.
나는 마키나 녀석이 회로 밖의 세상에서 적응하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신기하고 기특하다고 느끼기 시작한 참이었다.
“그러고 보니 집사람이 오랜만에 요리 실력을 발휘하겠다며 벼르고 있더군요.”
“아쉽게 되었어, 모처럼 자네들과 한잔하려 했는데. 오늘은 일찍 돌려보내야겠군.”
둘의 이야기를 듣다 슬며시 방수 팩 안에 든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시계는 이미 오후 다섯 시 반을 가리키고 있다.
벌써 6시간은 족히 놀고 말았다.
나도 슬슬 숙소 돌아가서 볼일 봐야지.
“그럼 오늘은 이쯤에서 파하도록 하지. 둘 다, 주기적으로 보고하는 것 잊지 말게나.”
“맡겨만 주십시오.”
마키나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끝이 났다.
호텔로 돌아가면 ‘그 녀석’과 이것저것 할 얘기가 많아 보였다.
* * *
택시를 타고 숙소에 도착했을 땐 이미 7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스파로 직행.
목욕으로 하루 동안 쌓인 피로를 씻어낸 다음 방으로 돌아갔다.
“…다 좋은데, 그 녀석 한 짓거리는 선 넘었지.”
솔직히 말해서 꽤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출장이라고 그러길래 한 달 동안 타지에서 높으신 분 눈치 보면서 고생하는 게 아닌가 잔뜩 쫄아 있던 만큼 업무 난이도가 높지 않다고 알게 되어 기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내가 과타노차에게 이것저것 따지면 안 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나는 당장 스마트폰을 집어 과타노차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야. 김지안 또 너냐?>
“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격 떨어지게 대뜸 전화 연결되자마자 소리 지르고 난리야. 짜증 나게.>
“짜증? 누가 할 소린데. 니가 제때 연락만 받았어도 안 쫄아도 됐었잖아.”
<아, 뭔가 했더니 ‘출장’ 얘긴가.>
“알고 있었어?”
<당연하지. 네놈이 지점에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나머진 마키나의 동선과 대화 로그를 모니터링하면 이사들이랑 마키나를 데리고 돌아다녔다는 것쯤은 알 수 있다고.>
“왜 미리 안 말해 준 거야. 마키나가 의체에 들어가서 저러는 거.”
<이사회의 기밀인데 굳이 일개 대리에게 알려 줄 필요가 있었나?>
“너도 이사 아니잖아.”
<나는 마키나의 개발자다. 창조주라고도 할 수 있지. 당연히 알 권리가 있다.>
하여튼 한마디도 안 지네.
“어쨌든, 너는 그럼 다 처음부터 알고 있던 거네? 마키나가 이사회 협박해서 몸 받아 내려 한 것도.”
<당연한 소리를. 주기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있으니까.>
“그럼, 녀석이 저렇게 구는 것도 네 설계라는 거야?”
<너는 대체 마키나가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게 무슨 소린데.”
수화기 너머에서 과타노차가 푹푹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잘 생각해 봐라. 네놈이 부모가 말하는 대로 살아왔는지. 그리고, 신의 피조물들이 정말 경전에 적힌 대로 살아가는지.>
“그건… 아무래도 아니지?”
<자유 의지란 그런 거다. 아무리 녀석이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영혼을 지니고 있는 한 내가 놈의 행동을 통제하거나 제한할 수는 없다.>
“…말 되네.”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터뜨리면 안 되니까 모든 노드에서 마키나의 존재를 동시에 삭제하는 킬 코드 정도는 수중에 남겨 두고 있긴 하지만.>
“그거 진짜로 사용할 생각은 없겠지?”
<당연한 소리를.>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마키나의 의체가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일까.
나도 모르게 그 조그마한 몸뚱이가 예고도 없이 델 몬테 지점장님 댁에서 쓰러지고 사모님이 졸도하는 장면을 상상하고 말았다.
측은지심, 이라고나 할까.
마침 얼마 전에 6세 여아 레이니가 죽다 말고 살아난 보고 와서 그런지 아이들을 볼 때마다 왠지 모르게 마음 한편이 간질간질하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제대로 삶이란 걸 살아 보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아동들이 지구에도 범차원 세계에도 널려 있다.
은행의 힘은, 지닌 자금은, 조금 더 그런 아이들을 위해 사용되어야만 한다.
사람의 가능성에 투자하는 것이야말로 은행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기능 중 하나이며, 누가 뭐라 해도 가장 큰 가능성을 지닌 건 언제나 아이들이었으니까.
<어쨌든, 마키나를 돌보는 게 델 몬테 지점장과 네녀석이라면 내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문제는 없겠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과타노차가 칭찬 비슷한 말을 건넸다.
“엥.”
얘가 왜 이러지 오늘 뭐 잘못 먹었나.
처음이었다.
과타노차가 나한테 칭찬을, 아니, 칭찬 비슷한 소리를 하는 건.
“그러고 보니 월초에 건강 진단했었지.”
<뜬금없이 그건 왜.>
“아니, 이렇게 동기 하나를 떠나보내게 되었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이상해서.”
<…….>
“식장은 육개장 맛있는 곳으로 잡아 줘. 부조 넉넉하게 할게.”
<…….>
“아. 미안해. 농담이야. 근데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니지? 내가 놀리는 거 아니고 진짜로 걱정돼서 물어보는 거야. 자고로―”
<반드시 네놈 자식보다 오래 살아 주지.>
“야! 패드립은 선 넘었지!”
하여튼 진짜 한마디도 안 진다.
과타노차랑 입 털어서 이득 본 적이 없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헛소리할 거면 3초 내로 끊겠다.>
“아니, 나는 그냥 네가 갑자기 칭찬하니까 신기해서 그랬지. 근데 진지하게 묻는 건데 오늘 저녁 뭐 먹었냐?”
<…….>
슬슬 과타노차가 진지하게 화낼 것 같으니 이쯤에서 그만해야겠다.
<칭찬한 적은 없어. 네놈도, 델 몬테 지점장도.>
“그럼 아까 한 말은 뭔데. 안심된다거나 믿음직스럽다는 소리 아니었어?”
<너도 그 쇳덩이도, 둘 다 손해 보기 쉬운 성격이라는 뜻이지. 다른 뜻은 없다.>
“아아, 그러셨구나.”
그럼 그렇지. 내가 아는 과타노차가 남의 칭찬을 할 리가 없다.
“보통 이런 일이 생기면 ‘우리 마키나가 폐 끼치게 되어서 미안하다’ 라든지 ‘잘 부탁한다’ 같은 얘기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번 일을 통해 네놈도 적잖은 이득을 얻을 테니 오히려 내가 감사받아야 하는 입장인 것 같은데.>
“…….”
틀린 말은 아니어서 양심상 반박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이번 일을 통해 이사의 신임을 얻는다든지 이득 쪽이 마키나를 돌보는 데에 들일 노고보다 큰 건 사실이었으니까.
<더 용무가 없으면 이쯤에서 끊도록 하지.>
과타노차는 귀찮음이 가득 배어 나오는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잠깐. 하나만 더 물어보자.”
<뭐.>
“마키나가 은행에서 돈 빌리려는 이유, 짐작 가는 거 있어?”
<전혀.>
“…그래. 알겠어.”
과타노차와의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제작자니 창조주니, 딱딱한 단어만 쓰고 기어코 자기가 부모라고는 안 하네.”
마키나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속상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뭐, 과타노차 입장에서 보면 그냥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그걸 내가 굳이 비판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인 듯해 생각하는 걸 그만두었다.
“마키나, 잘 적응할 수 있으려나.”
지금은 그저 녀석이 델 몬테 지점장의 집에서 무사히 적응할지 걱정될 뿐.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똑똑한 동생.
그런 게 하나 생겨 버린 기분이었다.
물론 저쪽은 별생각 없겠지만.
“은행 다니면서 오지랖만 넓어졌네.”
나는 벌써 테이블 위에 작은 숲을 만들어 편안하게 쉬고 있는 정령들을 바라보며 침대에 누웠다.
“그래. 너희가 내 가족이지. 지금은.”
출장 왔으니 얘네한테도 간식 좀 맛난 거로 챙겨 주든가 해야지.
지점장님과 사모님이 알아서 마키나를 잘 챙겨 주고 있을 것이다.
사모님 쪽은 만나 본 적이 없지만, 아무래도 지점장님이 인격자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