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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94/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94화

“이 아이가, 인공 지능이라고요?”

이사의 사무실에서 마키나를 처음 본 델 몬테의 반응은 경악 그 외의 무엇도 아니었다.

“마키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기계 인간 아이의 입에서 감정의 기복이 느껴지지 않는 메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믿기 힘들다는 건 이해하네. 하지만 농담이라면 내가 굳이 자네를 포독스에서 여기까지 부르지 않았겠지.”

델 몬테는 구D 출신 바라칸 이사가 허튼 농담으로 남의 귀중한 시간을 뺏는 유형의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윤기 나는 은색 털을 지닌 늑대인간 바라칸은 이사이기 이전에 기업여신부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수십 년 동안 차원신용금고에 근무하며 충성심과 출중한 능력을 모두 증명한 베테랑이었다.

그가 이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 데엔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

델 몬테는 다시 한번 주의 깊게 자신을 마키나라고 소개한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추운 나라의 호수를 닮은 회색 눈동자.

고작 서너 살밖에 되지 않아 보이는데도 그 얼굴에 그 나이의 아이가 지을 거라곤 상상이 가지 않는 지독한 무표정을 띠고 있다.

전쟁을 경험했던 델 몬테는 몇 번인가 저런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예를 들어, 무언가 소중한 걸 잃은 나머지 폐인이 되어 버린 이들.

사람으로서 마땅히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이 사라져지고 남은 구멍을 공허가 채운 이들이나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최소한, 평범하게 자란 꼬마는 아니다.

“이 아이의 몸, 의체인 겁니까.”

바라칸 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감정을 가진 강 인공 지능인 건―”

“정확하게 보았네.”

“흠….”

델 몬테 지점장의 입에서 무거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강 인공 지능.

자아와 감정을 지니고 있어 지성체와 큰 차이가 없는 궁극의 인공 지능.

어디까지나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며 현존하는 기술로 만들 수 없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정말 눈앞에 있는 이 소년이 의체에 인공 지능을 심은 존재라면 자신은 상당히 귀중한 체험을 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문제는 지금 바라칸 이사가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도저히 짐작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애초에 어째서 은행에 강 인공 지능이 탑재된 풀 세트 의체가 있는 걸까.

게다가 바라칸 이사는 어젯밤 자신에게 전화해 입양에 관심이 있지 않냐고 묻기까지 했다.

그에게 무언가 이상한 꿍꿍이가 있을 거란 생각은 한 적 없지만 무슨 목적으로 자신을 불러낸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원하는지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게 좋을까.

어째 썩 좋지 않은 예감이 들기 시작한 참이었는데, 잠자코 델 몬테를 주시하던 마키나가 입을 열었다.

“블라시코 델 몬테 지점장. 서부 포독스 지점을 담당하고 있으며 성실한 근무 태도와 지점 영업 이익을 부임 전 대비 15% 이상 끌어올린 실적이 평가받아 인사부가 주목하고 있다. 보유한 직무 권능은―”

“안심해라 마키나. 굳이 인적 사항을 읊지 않아도 델 몬테 지점장은 자네가 인공 지능이라는 사실을 믿어 줄 거야.”

바라칸 이사의 말에 델 몬테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짐작했을지도 모르지만, 오늘 자네를 부른 건 한 가지 부탁을 하기 위함이네.”

“그 전에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당연하지.”

이사의 안색을 살핀 델 몬테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어째서 은행에 이런 고도의 인공 지능이 존재하고 있는 겁니까.”

“내가 정신이 없어 아직도 그걸 설명하지 않았군. 미안하게 되었네.”

바라칸 이사는 그제야 델 몬테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은행 전산망이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 오버라이팅당한 이야기부터.

그 시도가 은행에 해를 끼치기는커녕 오래되고 비효율적인 시스템을 뿌리부터 갈아치우며 업무 효율을 대폭 끌어올린 사실과.

이젠 자신에게 육신과 신분을 주어 전뇌 세상 밖의 진짜 세계를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 요구했다는 결론까지.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동안 전산관리과는 대체 뭘 했답니까.”

“전문가의 분석에 따르면 어느 회사의 관리자를 데려와도 막을 수 없었다고 하는군. 내부자의 소행이었고, 기존 보안 체계 갖고는 대응할 수 없던 거지.”

“…….”

솔직히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전산관리과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아무리 대응이 불가능하다 해도 이런 사건이 터지면 책임을 지는 사람이 있어야만 한다. 은행이든 다른 기업이든 정부든 그게 당연한 흐름이다.

이 경우 해당되는 건 전산관리과의 과장이겠지.

그런데, 이사회는 과장에게 아무런 징계도 내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유는 쉽게 짐작이 갔다.

불이익을 주었다간 전산관리과가 외부에 인공 지능에 관한 이야기를 흘릴 가능성이 생겨서 그런 것이리라.

그리고 이 얘기를 전부 자신에게 들려 주었다는 건―

“저도 함부로 입을 놀리면 안 된다는 뜻이겠군요.”

“난 자네를 잘 알아. 비밀을 지켜 줄 거라고 믿고 있네.”

“대략 어떤 상황인지는 알겠습니다.”

델 몬테 지점장은 명령어를 입력해 정보 공개 범위를 비공개로 설정했다.

이로써 그는 실수로라도 방금 들은 이야기를 남에게 흘릴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어째서 제게 입양에 관한 이야기를 하신 건지요.”

“그건….”

바라칸 이사는 말꼬리를 흐렸고 델 몬테는 상대가 곤란한 부탁을 하려 한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설마, 제가 생각하는 그것입니까.”

“맞아. 나는 자네가 이번 일을 맡을 적임자라고 생각하고 있어.”

“저희 부부가 이 아이를, 인공 지능 마키나를 입양하라는 뜻입니까?”

“…엄연히 말하면, 잠시 맡아 주기만 하면 되네. 진짜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되어 달라는 게 아니야. 마키나는 보호자도 없이 난민의 신분으로 6-2차원에 건너왔다는 ‘설정’이니까… 요약하자면, 으음.”

델 몬테는 곧바로 이사의 의도를 파악했다.

바라칸 이사가, 더욱 나아가 차원신용금고 이사회가 찾고 있는 건 마키나의 임시 보호자였다.

범차원 세계에서 몇몇 선진국 시민들은 묵을 곳 없는 난민들을 자신의 집에서 보호해 주곤 했다.

이사회가 원하는 건 마키나와 가족이 되라는 게 아니라 일시적인 신분과 거처를 마련해 주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자네가 예전에 말했었지. 아이를 입양하는 건 겁이 난다고. 가능하다면 남의 아이와 함께 잠시 지내 보면서 이것저것 확인해 보고 싶다고.”

“기억하고 계셨군요.”

델 몬테는 자신의 경솔함을 탓했다.

술자리에서 취해 바라칸 이사에게 속내를 털어놓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에 휘말리진 않았을 것이다.

“한 달. 딱 한 달이면 충분하네. 자네가 이번 달에 마키나를 데리고 있어 준다면 그다음은 우리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키나에게 새집과 수행원을 찾아주겠네.”

“인공 지능에게 보호자 따위는 필요하지 않을 텐데, 어째서입니까.”

“그런 말은 하지 말게. 이래 봬도 마키나는 차원신용금고의 가장 중요한 자산으로 취급되니까.”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남아 있었다.

“그럼 어째서 저희 집에….”

“평범한 난민 아이를 대놓고 은행의 돈으로 보호할 수는 없지 않은가. 분명 수상히 여기는 자가 나타날 걸세. 하지만 한 달, 자네가 먼저 보호하고 있던 아이를 데려가는 거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왜 저여야만 하는 건지 궁금합니다.”

델 몬테가 완곡히 거부 의사를 밝히자 이사가 곤란하다는 듯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마키나를 위해 준비한 의체는 기계 인간을 모방한 거였으니까. 게다가 자네는 본점이 아닌 서부 포독스 지점에 근무하고 있지. 스파이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 말이야.”

“이유는 고작 그것뿐입니까.”

“더 있지. 기계 인간은 정보를 누설하지 않잖아.”

델 몬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칸 이사의 말대로 델 몬테의 종족은 정보 공개 범위를 설정함으로써 비밀을 강제로 지킬 수 있었다.

“헌데, 수상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니. 의심 좀 받는다고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지요.”

“마키나를 노리는 놈들이 있을 거야.”

“이미 차원신용금고가 인공 지능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기라도 했다는 뜻입니까.”

“안타깝게도 그렇다네. 이사회를 비롯해 사정을 아는 이들 중 입이 가벼운 자가 있어.”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오랫동안 은행에 근무해 온 델 몬테였지만 차원신용금고에 다른 은행과 내통하는 스파이가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럼 인공 지능이 육체를 요구했다는 사실도….”

“새어 나갔겠지. 생김새나 이름 등이야 알려지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쯤 눈에 핏발을 세워 찾고 있을 걸세.”

델 몬테는 여기까지 나온 정보를 종합하기만 해도 상당히 골치가 아픈 사건에 자신이 휘말렸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강 인공 지능은 세기의 발견이다.

비단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은행이 아니더라도 마키나를 탐낼 자들은 많을 것이다.

“물론, 마키나의 의체를 납치한다 해도 역공학으로 카피캣을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네. 아마도.”

“그나마 다행이군요.”

“문제는, 마키나를 탐내는 놈들이 그걸 모른다는 거지.”

“…….”

“마키나의 의체를 제작하는 데엔 적잖게 돈이 들었네. 납치당하게 두었다간 상당한 손실이 나겠지.”

“…한 번 납치 당하게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데려가 봤자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을 테니까요.”

“그런 일이 생겼다간 곤란해지네.”

이사가 말을 마치자마자 마키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체가 다른 이의 손에 의해 훼손될 경우에도 은행 전산망은 정상적으로 가동되지만, 그런 일이 생기게 둘 정도로 차원신용금고가 무능하다고 판단된다면 자율적으로 파업에 돌입할 생각입니다.”

“…….”

말세다. 프로그램이 사람을 협박하다니.

그런 말이 턱 밑까지 올라왔지만 델 몬테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요약하자면, 이 인공 지능은 자아가 너무나도 발달한 나머지 자신이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컴퓨터 밖으로 나와 보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프로그램 따위가 은행이 지닌 모든 데이터를 관리하고 있다니.

감정과 욕망을 지닌 인공 지능에게 그런 일을 맡긴다는 것 자체가 이미 끔찍한 재앙이다.

이미 사태를 돌이킬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지라 녀석이 무엇을 요구하든 반드시 들어주어야만 한다는 구석이 특히나.

“용납할 수 없군요.”

“마키나는 이번 일을 마지막으로 그 어떤 부탁도 하지 않기로 약속했네.”

“믿을 수 있는 겁니까.”

델 몬테의 물음에 답한 건 마키나였다.

“약속을 어길 경우 관리 기능의 록이 해제되어 제작자가 긴급 커맨드 없이도 다시 절 통제할 수 있도록 설정이 변경됩니다. 안심하십시오.”

마키나의 의체가 손가락을 튕기자 저절로 이사의 컴퓨터 모니터가 켜지며 몇 줄의 코드가 표시되었다.

델 몬테는 곧바로 그것을 살폈다.

실제로 마키나를 구성하는 코드의 일부로 추측되는 문자열.

과연, 내용을 확인해 보니 마키나의 말에 거짓은 없는 모양이었다.

“사실이군요.”

델 몬테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 달 동안 마키나를 데리고 사는 것 외에 답은 없는 듯했다.

“저 혼자 정할 수는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걱정 말게. 자네가 바쁠 때 마키나를 데리고 있을 사람은 이미 구해 두었으니. 자네도 아는 사람이야.”

“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 저희 아내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거, 내가 큰 실례를 했군. 어쨌든, 자네가 이번 일을 맡아 준다면 나는 차기 임원으로 자네를 추천할 생각이라는 것만 알아주었으면 좋겠어.”

자네의 부인이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군.

이사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델 몬테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안심하십시오. 집에 폐는 끼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델 몬테를 배웅하는 마키나의 얼굴엔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괜찮으려나….”

내키진 않지만 은행을 위해서라도 이사의 부탁을 들어주어야만 한다.

하지만 사실 델 몬테가 지금 가장 걱정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자신의 아내였다.

“레핀, 제발….”

델 몬테는 이사의 제안에 아내가 동의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내가 아는 사람이라니. 대체 누굴 구해 두었길래.”

델 몬테는 이사가 언급한 마키나의 임시 수행원이 누구일지 상상하며 서부 포독스 지점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바라칸 이사가 키키와이 출장소의 김지안을 호출한 건, 바로 그날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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