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2/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92화

과타노차가 사상 초유의 사태를 저지른 지 한 달하고 3주가 지났다.

다행히도 저번에 16차원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근신 처분을 받았던 이로울은 그새 복귀해 정상적으로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사실 이로울의 잘못이라고 해 봤자 약을 잃어버리고 PTSD가 도진 게 전부.

이로울 탓에 다치게 된 사람이 없던 만큼 징계는 가벼운 게 당연했고, 감사부가 마키나가 던진 업무 폭탄에 파묻힌 탓에 예정보다 더욱 일찍 복귀할 수 있던 거겠지.

솔직히 말해서 누군가가 저런 상황을 일으키기 위해 이로울의 약을 훔치고 테러리스트에게 천사의 재를 쥐여 준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구C 이사들을 한 번에 제거할 경우 이득을 볼 수 있는 건….”

본점에서 새로 내려온 전산 사용 매뉴얼을 숙독하던 나는 잠시 의자에서 일어나 푹신한 침대에 드러누웠다.

저번 사건은 의심스러운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조사해 본 결과 천사의 재는 뒷세계에서도 이젠 구하기 힘든 대전쟁 시대의 광학 병기로 상당한 비용을 주어도 입수하기가 곤란한 물건이라고 한다.

그런 걸, 날개를 잃고 빛의 고리에도 금이 간 가난한 퇴역 군인이 어떻게 손에 넣은 걸까.

다른 누군가의 개입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설명할 수가 없다.

구C 간부들이 그나마 여자아이의 몸으로 되살아나서 다행이긴 한데.

만일 그날 구C 이사들이 죄다 소멸했다면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건 누구였을까.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구E….”

상대 파벌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이런 수단까지 사용하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일까.

합병 전 에라스무스요정은행의 별명이 무장은행이었다는 사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런 일까지 저지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적대 파벌이라 해도 같은 은행에서 일하는 행원인데, 그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워 버리려 하다니.

라즈마 과장이 비슈티 과장을 대하는 방식이 전혀 달라지지 않은 걸 보면 일을 벌인 건 과장급이 아닌 아득히 높은 윗선일 가능성이 높다.

그냥 안전하게 철 밥그릇 지키면서 보람찬 일이나 할 생각이었는데 은행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복마전이라니.

델 몬테 과장이 괜히 내게 구C와 구E의 쿠션 역할을 맡아 달라고 부탁한 게 아니다.

아마 이대로 계속 두 파벌의 경쟁 구도가 심화된다면 몇 년 내에 차원신용금고 내부에서 끔찍한 참상이 벌어질지도.

“…괜히 나까지 휘말리는 거 아닌가.”

햇병아리 취급받는 대리인 내게 무슨 힘이 있다고 구C와 구E의 쿠션이 되라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열심히 승진해서 거물이 되는 거면 모를까, 지금 이 상황에선 그냥 시키는 일 주어진 일 하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후우.”

푹푹 한숨이나 쉬는 모습이 한심했던 건지 베란다 근처에서 옹기종기 모여 놀고 있던 정령들이 뛰어와 나를 에워쌌다.

-큐우우

기운을 내라고 위로하는 것 같은데 이 녀석들 은근 표정이 다채롭다.

생긴 건 히어로물 영화에나 나올 법한 능력을 얻은 슈퍼 햄스터 그 자체인데.

“걱정 마. 보신 하나 제대로 못 하면 직장인이 아니잖아.”

16차원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던 데엔 이 녀석들의 도움이 컸다.

나중에 베르나데 박사님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단원자 금의 능력만으로는 레이니의 몸을 만들어 낼 수 없었다고 한다.

단원자 금과, 우리의 의지, 거기에 정령들이 발휘한 네 가지 태초의 힘이 합쳐져 완전한 육체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때 왜 정령들이 콜로서스에 숨어 나를 따라온 건진 알 수 없지만 만일 녀석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로울의 심판검에 도시와 함께 쓸려 한 줌의 가루로 변했을 거다.

콜로서스를 준 사우 박사님도 그렇지만 33차원에서 온 이 앙증맞은 친구들 역시 내 생명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

“…….”

정말 험한 사건들 속에서 용케도 살아남았다.

직업적인 의미로도, 생물학적인 의미로도.

나 혼자의 능력이나 행운 덕이 아니다.

입행 초기부터 함께해 온 동기들.

그리고 엘라마를 비롯한 상사, 고객, 그리고 여기 있는 정령들이나 방역 업체 직원분들까지.

지금 내가 숙소에서 편하게 누워 있을 수 있는 건 주위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켜 달라는 건 아니고, 그냥.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

-큐웃

-규귯

파벌 싸움이 뭐 어쨌다는 건가.

나는 앞으로 어떻게든 살아남아 위로 올라갈 거다.

“은행원이면 계속 일해야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같은 은행에서 일하는 행원이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게.

서로를 함정에 빠뜨리는 거지 같은 악습이 남아 있는 게.

정상은 아닌 것 같다.

“그래. 성실하게 일만 해야 해. 쓸데없는 개짓거리 말고.”

그러니까 누군가는 바꿔야지.

* * *

같은 시각.

그레이트후리텐, 포독스시.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서부 포독스 지점장 델 몬테 지점장은 아내와 함께 느긋하게 식사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 어땠어?”

“평소랑 똑같았지, 뭐. 전산 시스템 업그레이드되고 요즘 이것저것 편해져서 다행이지.”

“진짜? 나는 오늘 레슨 받는 회원님이 귤 잔뜩 가져오셔서―”

두 사람은 식사를 하며 그날 있던 이야기를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있었다.

금일의 메뉴는 치즈 함박스테이크.

델 몬테의 대외적인 이미지와 달리 그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메뉴였다.

“시댁이 과수원 하나 봐.”

“부럽네. 우리도 주말 농원 같은 거 간단하게 해 볼까?”

“찬성. 발코니에서 허브부터 키워 보려 하는데. 입문자용으로 좋다더라고.”

델 몬테와 그의 아내는 모두 대전쟁 시대에 태어난 기계 인간이었다.

오래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종족은 사람들의 몰이해로 인해 적잖은 차별을 받아 왔지만 지금은 이미 관련 법률이 제정되며 불편한 것 하나 없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들과 다른 지성체의 차이는 몸이 기계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뿐이었다.

태초의 신비에 의해 창조된 그들은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이 음식을 먹고, 술과 물을 마시고, 아이를 낳고 길렀다.

그 체내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전문의가 아니면 보통 일일이 파악하지 않고 있었긴 해도, 이는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잘 먹었습니다.”

“이리 줘. 접시는 내가 치울게.”

식사를 마친 델 몬테는 빠르게 설거지를 끝낸 다음 아내와 함께 소파에 기대 영화를 관람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내년 개봉 예정이 플랫 샤펜도라의 신작 영화를 무척이나 기대하고 있었고, 사전 공개된 티저 영상을 본 김에 그의 예전 작품을 재탕하기로 어젯밤 약속해 두었다.

“아. 이 장면은 진짜 몇 번을 봐도….”

“그치. 힛.”

아내는 작게 키득거리며 델 몬테의 품에 머리를 묻었다.

두 사람이 보고 있는 건 플랫이 아역 시절 촬영한 영화, <에버그린 가든 바비큐>.

요즘 시대에 내놓았다간 뻔한 가족 신파물이라는 소리를 듣기 딱 좋은, 좋게 말하면 고전 영화였고 나쁘게 말하면 클리셰투성이 작품이었다.

다만, 이 영화가 여전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건 각본가의 대사 센스와 천재 아역 플랫 샤펜도라의 연기력이 더해져 몇 번을 보든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두 기계 인간은 차가워 보이는 외견과 달리 이런 유형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가족 영화에 약했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인해 경제적 위기를 맞이한 가정.

책임감이 강한 훈제 바비큐의 달인인 아버지와 자상한 헤비리프팅 챔피언 어머니, 그 밑에서 자라난 아이는 생각지도 못한 재능을 발견한다.

아이는 현대 무용의 전설이라 불리는 무용수에게 사사하며 성장해, 기어코 꿈의 무대에서 날개를 펼치게 된다.

그런, 흔해 빠진 스토리였는데.

부부는 러닝 타임 내내 서로를 끌어안고 조용히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델 몬테 부부의 눈물샘은 자극에 약했고, 영화 속 가족을 부러워하는 이유 또한 지니고 있었다.

“자기.”

“응?”

스탭롤이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던 아내가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델 몬테에게 말을 걸었다.

“나, 갖고 싶어.”

“…….”

“역시 아이 가지면 안 될까?”

델 몬테는 대답할 수 없었다.

“…레핀. 안 되는 거 알고 있잖아.”

델몬테는 아내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종족의 특성상 다른 지성체들보다 표정의 변화가 적은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그의 눈동자 속 조리개 사이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래도….”

지점장의 아내, 레핀은 말꼬리를 흐렸다.

델 몬테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아내, 레핀이 아이를 임신하기 어려운 몸이라는 것을.

레핀은 델 몬테와 같은 군인 출신이었다.

두 사람은 대전쟁 시대를 함께 살았고, 서로의 등을 지키던 전우였다.

최전선에서 화기를 다루던 델 몬테와 의무병이었던 레핀은 하루하루 불안과 공포를 견뎌야만 했고,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종전 선언을 앞두고 적군이 쏜 박격포가 막사에 떨어진 그 날.

레핀의 복부에 포탄 파편이 박혔다.

기계 자궁은 절반 이상이 박살 났고, 전후 큰 수술을 거쳐 세대가 다른 신형 부품을 이식했지만 의사의 말에 따르면 임신할 경우 산모와 태아의 목숨 양쪽 모두 보장할 수 없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레핀은 계속해서 아이를 원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델 몬테는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보다 지금 곁에 있는 배우자의 목숨이 소중했다.

“자기 몸 상태 알고 있잖아.”

“난 입양이라도 괜찮은데.”

“…입양은 조금.”

남이 낳은 자식을 기를 마음의 준비 같은 건 아직 되지 않았다.

“있잖아. 우리 그냥 둘이서만 행복하게 살면 안 될까?”

“…….”

레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큼성큼 침실로 걸어가더니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하아….”

거실에 홀로 남겨진 델 몬테는 착잡해 미칠 지경이었다.

아내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지만, 그걸 위해선 아내의 목숨을 담보로 잡거나 다른 집 자식을 키워야만 한다.

당연히 전자를 선택할 수는 없다.

남은 선택지는 입양뿐.

“…연습이라도 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시험 삼아 아내와 아이 그리고 자신이 셋이서 살아 보고 결정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마저 떠오르는 중이었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지, 그건.”

상품 샀다가 환불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를 입양했다가 파양해 평생 마음에 남을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대로 각오하는 일 없이 무를 수 없는 결정을 내릴 수도 없는 일이다.

“미치겠군….”

고민에 빠진 델 몬테는 소파에 드러누워 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델 몬테 역시 아내와 같은 마음이었다.

그는 아이를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굉장히 좋아하는 쪽이었지.

“슬슬 내가 결심을 내려야 할지도 모르겠군.”

다음 주말에 아내와 보육원을 찾아가 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스마트폰이 진동하고 있었다.

발신인은, 구D 선배 행원.

본점에서 이사직을 맡고 있는 자였다.

이자가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 전화를 거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무언가 심각한 일이라도 생긴 걸까.

“델 몬테입니다.”

<아아. 역시 이 역할을 맡을 건 자네밖에 없군그래.>

“예?”

<미안하게 되었군.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아서. 내일 급히 린딘으로 와 주지 않겠나.>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 온 목소리는 상당히 차분하고 조심스러웠다. 전화로도 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라면 인사와 관련된 이야기가 아닐까. 델 몬테는 그렇게 추측했다.

하지만, 다음 날.

린딘의 차원신용금고 본점을 찾은 델 몬테는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받게 되었다.

“자네 부부, 아직 아이가 없다지?”

“그렇습니다. 아내의 건강 문제가 심한지라.”

“입양 계획은 있는가?”

“고려는 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한번 체험해 보는 게 어떤가.”

“무엇을 말입니까.”

“그야, 당연히 입양이지.”

“…네?”

“아이를 들여보내게.”

이사가 지시하자 비서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이사님. 이건 대체 무슨….”

“인사하게. 이쪽은 마키나, 라고 하네.”

비서는 세 살 정도로 보이는 기계 인간 사내아이를 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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