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90화
혹시나 직무권능을 발동할 수 없는 대상인가 걱정했지만 아바타가 비친 화면 앞에 무사히 저울이 나타났다.
오른쪽으로 기울은 잠재력의 저울.
직무권능을 사용하기 전부터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예상대로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아마도 플랫 씨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
“…음?”
뭔가 이상하다.
아무리 유명하다 해도 배우 한 사람의 잠재력이 최초의 인공 전뇌 생명체과 비슷하다니.
말이 안 된다.
배우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종사하고 있고 아무리 지명도가 높은 스타라고 해도 그 영향력은 제한적이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는 과타노차가 개발한 강 인공 지능은 어떤가.
델 몬테 지점장을 비롯한 기계 인간은 상당수의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과 달리 그리 초월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들은 몸이 기계로 만들어져 있을 뿐, 우리와 같이 신이 창조한 영혼을 지니고 있으며 다른 지성체와 별반 다르지 않은 존재다.
몸 곳곳에 기믹이나 무기가 숨겨져 있다든지, 감정을 자주 표현하지 않는다든지, 그런 특징이 있긴 하지만.
그들은 우리처럼 똑같이 실수를 범한다.
기억력이 뛰어나긴 해도 지적 능력 역시 무지막지하게 차이가 나진 않는다.
하지만, 마키나는 기계 인간들과는 아예 차원이 다른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당장 과타노차의 이야기를 통해 파악한 것만 해도 인공 지능 마키나는 말도 안 되는 전설적인 업적을 달성했다.
일단, 마키나는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차원신용금고 전체의 전산망을 집어삼켰다.
그 과정은 프로그래밍에 관해선 기초밖에 배우지 못한 내가 봐도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차원신용금고의 전산망은 합병 전 세 파벌이 사용하던, 각자 다른 세 기업이 개발한 시스템을 억지로 하나의 허브로 연결한 것이었다.
그동안 몇 번의 사고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윗분들이 시스템의 근본적인 교체를 주저하고 하나 마나 한 보완과 유지 보수만을 이어온 이유는 간단하다.
단순히 업체가 리베이트를 먹여 주거나 접대를 소홀히 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단순히, 인제 와서 합병 이전부터 누적된 고객 데이터를 한곳에 모으고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래 있던 시스템 세 개를 적당히 누더기처럼 기워 쓰는 게 시간도 돈도 절약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잘 모르는 사람 입장에선 그깟 돈 얼마나 된다고 아끼려고 애를 쓰냐고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 시스템 구축은 돈보다 중요한 것들이 걸려 있는 일이었다.
정확히는 그 돈을 은행이 지불하게 됨으로써 주주들이 격노할 만한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그 과정을 대략적으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시스템 구축에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다.
새로운 전산망을 설계하고 제작하는 건 단순히 소프트웨어를 교체하는 게 아니라 DB 서버와 기타 기기들까지 싹 다 갈아엎어야 하는 대규모 사업이니까
그리고 이에 필요한 비용을 은행이 지출하게 된다는 건, 해당 분기의 순이익이 큰 폭으로 줄어들게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큰 규모의 영업 이익이 한 번에 영업 손실로 변하게 된다는 소리다.
은행 임직원 전체가 피땀 흘려 벌어들인 흑자가 단번에 적자로 전환된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은행의 주가는 바닥을 치게 될 것이다.
분노한 주주들이 어떤 행동에 나설지는 굳이 일이 벌어지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마키나는.
이런 복잡하고 곤란한 과정을 거치는 일 없이 순식간에 기존 전산망을 집어삼켜 자신의 힘으로 통일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과정은 단순히 로마나 몽골, 혹은 영국이 다른 나라를 무력으로 정복해 자신들에게 복종시키는 것과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사람이야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여 주고 처형 몇 번 하면 표면적으로라도 복종하는 법이지만 프로그램은 다르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키나는 해냈다.
인공 지능은 차원신용금고의 전산망을 구성하고 있는 서버와 클라이언트 전체에 자기 자신을 조각이라 할 수 있는 코드를 심어 둔 다음 바이러스처럼 시스템 전체를 순식간에 ‘감염’시켜 덮어쓰기를 성공시켰다.
개발 환경도 개발사도 다른 시스템 3종을 단번에 오버라이트해 전부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 버린 건 물론, 암호화되어 있던 고객, 예금, 대출, 인사 등의 중요 데이터베이스를 모조리 복호화해 보관.
그다음은 그 누구도 시스템을 건드릴 수 없도록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강력한 보안 체계를 사용해 스스로를 보호하기까지.
이런 말도 안 되는 능력을 지닌 인공 지능이 개인과 비슷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니.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이번에 이 녀석이 저지른 건 범죄라고 불러도 할 말이 없긴 하다.
결과적으로 피해자가 어디에도 없고 은행이 일방적인 이득을 보았긴 했지만.
그런데, 만일 이 능력을 은행 전산망 지배가 아닌, 기업의 동의를 얻고 오래된 시스템을 갈아치우는 데에 사용하면 어떨까.
그 경제 효과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직무권능이 이런 결론을 내린 이유는 무엇일까.
“…….”
대충 원인은 짐작이 갔다.
이 녀석, 정말로 은행 전산망 관리 외엔 다른 일이 하고 싶지 않은 게 틀림없다.
“김지안 대리, 어떻게 된 겁니까. 직무권능을 사용하는 데에 문제라도 생겼나요?”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 불안해진 건지 지켜보던 다른 이사들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잠재력 자체는 충분한 듯하니. 다만, 은행 전산망 관리 외의 업무에 관심을 지니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내가 말을 마치자 화면 속에 보이던 마키나의 아바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관이 존재하지 않는 푸른 달걀귀신 같은 얼굴에 밋밋한 몸뚱이.
아마 자아가 형성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모습도 제대로 정의하지 않은 모양이었는데, 사실 나는 전뇌 생명체와 교류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여전히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정확합니다. 인공 지능 마키나는 맡은 사명만을 다할 생각입니다. 다른 산업에도 이 능력을 적용할 수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이는 제작자의 의사에 위반됩니다.>
인공 지능의 입에서 나온 충성 선언을 들은 이사들은 하나같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제작자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애사심이 강한 분인 모양이군요. 이로써 마키나가 은행에 그 어떠한 위험도 끼칠 우려가 없다는 걸 잘 알겠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행장님께서 직접 선발한 김지안 대리의 직무권능으로도 확인된 사실이니까요.”
“제가 미력하게나마 힘을 보탤 수 있는 일이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너무 예상대로 흘러가 김이 새긴 했지만, 그래도 감당 못 할 사고가 터지는 것보단 백 배는 낫다.
나는 이사들에게 인사하고 전산관리과 행원들과 함께 회의실을 나섰다.
이사들은 다시 우리들이 떠난 다음 마키나와 대화를 시작한 모양이었다.
과타노차에게 듣기론 마키나가 그동안 밝혀지는 일 없이 교묘하게 숨겨져 있던 횡령 사건을 모조리 끄집어냈다는데.
아마 그 후속 조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혹은, 앞으로 전산망을 관리할 필요가 전혀 없어져 생길 이익과 파급 효과에 대한 예측일 수도 있어 보인다.
전자라면, 밀라가 시간 못 내겠다고 징징대고 이로울의 징계 기간이 단축될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이니 아마 인사부와 감사부에 어마어마한 양의 업무 폭탄이 쏟아진 게 아닐까 싶다.
“별문제 없이 넘어갈 거 같아 다행이야.”
“그래. 이로써 무사히 빌어먹을 전산망이 한결 ‘나 친화적’으로 변하겠군.”
비행기를 타기 전 과타노차와 단둘이 찾아간 가게에서 이야기하다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듣고 쓴웃음을 지었다.
이 녀석, 순전히 자기가 일 더 편하게 하려고 마키나를 만든 건가.
“괜찮겠어? 얘기 들어 보니 은행 쪽에서 얼마 안 받는 거 같던데. 특허 냈으면 평생 놀고먹으면서 살 수 있는 돈이 들어올 텐데.”
“애초에 남는 시간에 취미로 만든 거라서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이다.”
“취미 겸 돈벌이로 가볍게 만든 다음 은행에서 이것저것 테스트해 보는 건 아니고?”
“…조금은 예리해졌군.”
과타노차는 그제야 본심을 드러냈다.
“언제 눈치챈 거지?”
“맨날 돈타령하는 네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기술을 남 좋으라고 넘겨줄 리 없다고 생각했지.”
“큭큭….”
눈치 볼 상대가 없는 가게. 과타노차는 목소리를 줄이는 일 없이 웃고 있었다.
“…마키나, 네가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닌 거지?”
“이미 자유의지를 가진 놈이다. 내가 코딩한 범위 내에서 은행 전산망 관리를 수행하긴 해도, 다른 부분까지 내가 완벽하게 컨트롤할 수는 없지.”
어느 정도 예상했던 답이었다.
마키나는 단순한 프로그램이 아닌, 영혼을 지닌 전뇌 생명체다.
오직 정해진 코드만을 따라 작동하는 프로그램과 달리 마키나는 무슨 일을 저지를지 예상할 수 없다.
돈을 사랑하는 과타노차가 특허 신청을 하는 일 없이 마키나를 은행에 본전만 받고 넘긴 데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보아하니 은행 전산망을 실험실 삼아 데이터를 뽑아먹을 생각인 듯했다.
“녀석은 프로토타입이야. 7%도 안 되는 확률을 뚫고 단원자 금의 힘으로 태어난 신비 그 자체지. 놈을 만든 나조차 앞으로 마키나가 어떻게 행동할지 알 수 없다.”
“설마 기분 나빠진다고 은행 전산망 올스톱시키고 파업하는 건 아니겠지?”
“그야 모르지. 인사부와 감사부에 횡령 증거를 보낸 건 내가 시킨 일이 아니었으니까. 어떻게 될진 앞으로 지켜보는 수밖에.”
“…처음에 코드 짤 때 뭐라고 명령했길래.”
“업무의 효율화. 그리고 자아의 개발과 진화를 목적으로 프로그래밍했다.”
왠지 모르게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자식은 부모를 닮는 법이다.
지금이야 갓 태어난 아이처럼 주입된 과타노차의 명령을 따르고 있지만 앞으로도 그럴 거란 보장은 없다.
“그럼 개발자의 정체가 너란 걸 공개하지 않은 것도―”
“일이라도 터졌다간 철밥통을 잃게 될 테니까.”
“혹시 마키나가 너무 우수해서 전산관리부가 전원 잘리거나 그러진 않을까.”
“노동법 위반이다. 끽해 봤자 다른 한가한 부서로 유배 보내는 게 고작이겠지. 뭐, 애초에 출세할 생각 따위 없었으니 상관은 없다.”
하긴, 과타노차는 입행 초기부터 스타트업 만들어서 비싸게 팔아먹는 게 꿈이라고 지껄이던 녀석이다.
그 출중한 능력을 생각하면 딱히 창업도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니어서 언젠가 행원과 행원이 아닌 대출담당자와 고객의 관계로 만나게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만일 마키나가 제대로 성능을 보여 주며 윗분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다면 과타노차가 은행에서 나가는 날이 가까워질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다섯 명밖에 없는 특채 동기 중 하나는 근신 중이고 다른 하나는 곧 출행할지도 모른다.
얼마 없는 동료가 사라지는 듯해 착잡해지는데, 이 경우는 그냥 과타노차의 성공을 빌어 주는 게 맞으려나?
“난 네놈처럼 은행에서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 무언가를 할 생각이 없어서.”
“무슨 소리야. 나도 딱히 비전 같은 거 없는데. 그냥 하던 일 쭉 할 뿐이지.”
“…부럽군. 집단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놈은.”
“음? 방금 뭐라고.”
내가 물었지만 과타노차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요리를 젓가락으로 집어 입으로 가져갈 뿐.
“마키나, 별문제 없었으면 좋겠어.”
나는 어색한 침묵을 감추기 위해 적당한 말을 골랐고.
“당연하지. 누가 만들었는데.”
과타노차는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럼, 다음에 또 보자고.”
나는 과타노차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고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에 몸을 맡겼다.
이때만 해도 우린 완전히 안심하고 있었다.
범차원 세계에서 최초로 등장한 영혼과 자아를 지닌 프로그램이 어떤 일을 벌이게 될지.
전혀.
완전히.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