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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89/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89화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진 쉬이 짐작이 갔다.

보나 마나 저기 앉아 있는 이사님들의 표정과 비슷할 테니까.

“…….”

“…….”

“…….”

기다란 탁자를 둘러싸고 앉은 각 파벌의 우두머리들은 말 그대로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저, 인공 지능 마키나는 차원신용금고에 대출을 신청하고 싶습니다.>

이사들이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 원인은 보다시피 과타노차가 단원자 금의 힘으로 창조해 낸 인공 지능의 발언이었다.

고도로 발달한 과학 기술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지만.

마법이 익숙한 세상에서 살아온 이사들이 저리도 당황하고 있으니 이미 저걸 과학 기술이라고 부르긴 힘들겠지.

기어코 특이점이 오고 말았다.

인공 지능이 인간에게 돈을 빌리려 하다니.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뭐, 그래도 일단은.

“안녕하십니까.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의 김지안입니다.”

일해야지.

* * *

방문한 타이밍이 영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사회는 나와 전산관리부 소속 행원들을 반겨 주었다.

드디어 행장님 얼굴 좀 보나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자리에 계시지 않아 유감스럽긴 했지만.

“잘 왔네. 요즘 활약이 대단하다지.”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이사들은 제각기 무게 잡고 있느라 한두 명 외엔 내게 말을 걸지 않고 있었지만 표정에 드러난 기대감까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인공 지능이 대출을 신청한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 등장하니 반가운 거겠지.

나 같은 직급 낮은 신입 행원이 이사님들보다 늦게 도착해 욕을 먹지 않는 상황 자체가 기이하긴 한데, 아마 이 시간에 부른 데에도 이유가 있겠지.

모르긴 몰라도 자기들끼리 내밀히 할 얘기가 있었을 거다.

내가 이 방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들은 게 돈 빌려 달라는 인공 지능의 목소리였다는 건, 그 전에 이사들과 인공 지능이 자기소개든 날씨 얘기든 다른 이야길 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아마도 딱히 큰 의미는 없었을 거다.

눈앞에 있는 것이 정말로 인공 지능일지, 얼마나 똑똑한지 확인할 겸 이것저것 시험해 보고 있었겠지.

그보다 일단은 이사회가 날 부른 이유가 내 예상과 같은지부터 확인해야만 한다.

“출장소의 막내인 제가 이사회 회의실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귀한 자리에 불러 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맡기실 일이 있으시다면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행장과 구D 소속 이사들이야 날 좋게 봐주고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구C와 구E 이사들 눈치를 보지 않는 건 옳은 선택이 아닌 것 같아 최대한 공손하게 말했다.

날 이곳에 부른 이유를 함부로 추측하지 않았다고 어필함으로써 자신의 머리로 무언가를 생각하기보단 이사회의 지시를 충실히 수행하겠다는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필요한 건 어디까지나 나를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경계심을 사지 않는 것.

특히나 이곳엔 16차원에서 천사의 재 테러에 휘말렸다가 여자아이의 몸으로 되살아난 구C 이사들이 다수 모여 있다.

저들은 날 탐탁지 않게 여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니 똘똘한 척하기보단 무해한 일개 대리라는 걸 보여 주는 게 아무래도 옳겠지.

“좋은 자세입니다.”

다행히도 내 연기는 무사히 먹혔다.

행동 하나하나에 칼각이 잡힌 구E 출신 이사가 입가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정말 내 자세를 좋게 봐서 저런 소릴 하는 건 아닐 거다.

그냥, 아랫사람은 별생각 없이 시키는 일에만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저런 소리가 나오는 거겠지.

어쨌든, 이쪽이 굳이 귀찮게 꼬치꼬치 캐묻는 타입이 아니라는 건 충분히 어필했다.

슬슬 날 부른 목적을 알려 줘도 될 텐데.

“이미 짐작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저희가 김지안 대리를 부른 건 김지안 대리가 보유한 직무권능이 얼마나 유용한지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선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게 조금 고까웠지만 참고 들었다.

내게 기회를 허락한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데 얼마나 능청스럽고 뻔뻔한지 과타노차에게 미리 이야기를 듣지 않았더라면 깜빡 속아 넘어갈 정도였다.

‘이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구나….’

인공 지능이 관리하는 전산 시스템에 관한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주의하기 위함이겠지만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늘어놓는 걸 보니 정나미가 떨어질 지경이었다.

“음. 전산관리부도 모인 모양이군요. 좋습니다. 슬슬 시작해 보죠.”

이사 중 몇몇이 자신을 마키나라고 소개한 인공 지능과 대화하는 동안, 구E의 이사는 나를 보고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건 일급 기밀에 해당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주위에 발설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시길.”

“알겠습니다.”

내가 대답하자 그는 얇은 서류철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

열어 보니, 안에는 비밀 유지 서약서와 펜이 들어 있었다.

“이건….”

“놀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회의실에 들어오자마자 인공 지능을 보게 되었으니까.”

놀라긴 했지만 딱히 인공 지능을 봐서 놀란 건 아니었다.

처음으로 들은 얘기가 돈 빌려 달라는 거였어서 그렇지.

“일단은 서약서에 사인하시고, 나머지 얘기는 그다음 시작합시다.”

말투는 평범해도 하는 짓이 고압적이다.

그래도 뭐, 시키는 대로 해야지 별수 있나.

“좋습니다. 그럼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죠.”

내가 서약서에 서명한 다음에야 이사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김지안 대리가 요즘 전산을 사용하면서 느낀 점부터 들어 보고 싶은데.”

“…조금 빨라지고, 없던 기능이 추가된 것 같습니다.”

“그 외에는요?”

“없습니다.”

과타노차에게 뭘 들은 티를 낼 수 없던지라 무난한 대답을 내놓았다.

사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정말 일개 행원의 입장에서 느낀 걸 말했을 뿐이었으니까.

시스템이 바뀌고 진정으로 크게 개선된 부분은 정상적으로 자기 일 열심히 하는 행원들이 업무 중 눈치채기 힘든 것들 뿐이었다.

예를 들어, 데이터를 멋대로 바꿀 수 없게 되었다거나.

그동안 유지 보수를 맡고 있던 세 기업에게 분기마다 따박따박 돈을 바칠 필요가 없어졌다거나.

시스템을 관리하는 주체가 인공 지능으로 바뀌었다거나.

그런 것들 말이다.

“조금 전 들었겠지만, 저기 화면에 비친 아바타는 인공 지능입니다.”

“그렇군요.”

차마 놀라는 리액션이 나오지 않아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차원신용금고의 주문으로 비밀리에 개발된 전산 시스템 관리 솔루션입니다. 성능이 뛰어난 데에다 인격까지 지니고 있죠. 범차원 세계 최초의 강强 인공 지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해 댔다.

강 인공 지능을 개발한다면 그 첫 용도가 은행의 전산망 관리가 될 일은 절대로 없다.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지위에서 나온 자신감이 아무렇지도 않게 저딴 얘길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의문이든 경악이든 원하는 리액션은 해 주는 게 맞겠지.

“최초의 강 인공 지능, 인가요.”

“그런 셈입니다.”

“묘하군요. 델 몬테 지점장을 비롯해 대전쟁 시대 이전부터 살아온 기계 인간들이 있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만.”

“뭔가 잘못 알고 있는 모양이군요. 그들은 인공 지능이 인스톨된 기계가 아닙니다. 태초부터 그렇게 창조된 종족이고 우리와 똑같은 영혼을 지니고 있습니다. 신의 손으로 빚은 영혼이요.”

“그랬군요. 식견이 짧아 알지 못했습니다.”

알고 있는데 굳이 이사 기분 좋아지라고 물어본 질문이었다.

이 자리에 델 몬테 지점장과 같은 종족의 행원이 없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지만.

이사의 말대로 기계 인간은 대장장이의 신이 직접 창조한 생명체다.

그들의 몸이 기계로 만들어져 있을 뿐 다른 지성체와 다를 바 없이 생각하고, 느끼고, 자식을 낳고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무슨 재질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는 그들의 뇌의 송과체에 해당하는 부위엔 똑같이 영혼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처음부터 신에게 생명체로 지음받은 존재인 기계 인간과, 피조물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전자 제품 속에서 태어난 인공 지능이 같을 수는 없다.

아무리 창조의 권능의 편린이 담긴 단원자 금의 힘이 사용되었다 해도 만든 주체가 다른 이상 두 존재를 동일 선상에 놓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어쨌든, 마키나의 성능을 테스트해 본 결과 이전까지 사용하던 시스템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퍼포먼스를 개선할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과연….”

“앞으로 차원신용금고의 모든 전산망을 마키나가 관리하는 건 기정사실화되었습니다. 김지안 대리를 부른 건 혹시 모를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함이죠.”

“제 직무권능으로 인공 지능의 잠재력과 리스크를 확인하고 싶다는 뜻이군요.”

“제대로 이해했군요.”

이사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시기까진 채 10초도 필요하지 않았다.

<인공 지능 마키나의 탄생 과정을 위조하는 시도가 감지되었습니다.>

<판단 로직 기동.>

<참과 거짓을 구분 중.>

<칼로벵 이사의 발언은 거짓False.>

<제작자의 이름을 밝힐 수 없지만 마키나는 차원신용금고의 주문으로 인해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이사와 대화하던 마키나가 갑자기 끼어들더니 물어보지도 않은 진실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제작자를 위조하려는 시도를 과타노차가 코드를 사용해 미연에 방지해 둔 듯했다.

그게 아니면 마키나의 전뇌 영혼이 자신의 부모라고 할 수 있는 제작자가 바꿔치기 당하는 데에 거부감을 느꼈거나.

-킥

아니나 다를까, 뒤에서 일련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과타노차가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다행히도 칼로벵 이사는 창피를 당한 탓에 거기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던 듯 그저 얼굴을 붉히고만 있었다.

다른 구E 이사들을 보니 커버해 주질 못할망정 다들 칼로벵 이사를 보며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야 이사회의 역학 구도를 알 것 같았다.

칼로벵 이사는 아마도 구E 이사들 중 최약체.

하지만 내가 그를 무시하는 티를 내는 건 ‘아직은’ 허락되지 않겠지.

아직 나는 대리 나부랭이니까.

‘굳이 감추는 일 없이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씀해 주셨다 해도 저는 비밀을 지켰을 겁니다.’

나는 칼로벵 이사를 자극하는 말을 꾹 삼키고 묻어 두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성별을 가늠하기 힘든 아바타로 자기 자신을 나타내고 있는 인공 지능과 이사들을 번갈아 보았다.

“제가 모르는 사정이 있는 듯하지만, 일단은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화면 앞에 서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수수께끼의 전뇌 생명체와 마주했다.

돈을 빌려 달라고 다짜고짜 부탁하는 게 과타노차가 코딩한 인공 지능의 인격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정말 이 녀석이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다면, 돈을 빌리는 데엔 무언가 목적이 있을 터.

“안녕… 하세요?”

반말을 할지 존댓말을 할지 한참을 고민하다 입을 열자 회의실 CCTV가 나를 향해 일제히 방향을 틀었다.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 소속 김지안 대리를 확인.>

<안녕하십니까. 차원신용금고 통합 전산 시스템 관리 인공 지능 솔루션 마키나입니다. 용건을 말해 주십시오.>

“음… 제가 그쪽에 볼일이 있다기보단, 대출을 희망하시는 거 같아서 같이 얘기나 해 보려 했는데.”

<당신이 제 대출 담당자가 된다는 뜻입니까.>

“뭐, 대충 그렇게 보셔도 상관은 없고요.”

“김지안 대리,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건가. 분명 우린 마키나의 잠재력만을 판단하라고―”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그걸 지금 하는 중입니다.”

신분증도 뭣도 없는 이 녀석이 정말로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을진 의문이지만, 그래도 일단은 은행에 도움이 된다니까 나중에 거절하더라도 일단 얘기는 들어 봐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럼, 시작해 보죠.”

직무권능 발동.

뱃지에 손을 얹자 아바타가 비친 디스플레이 근처에 저울과 두 개의 공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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