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88화
다음 날 아침.
나는 택시를 타고 차원신용금고 본점이 위치한 퀸 누투리어스 스트리트 8508번지로 향했다.
키키와이로 근무지를 옮긴 이후로 몇 번인가 린딘에 출장 나온 적은 있었지만 본점 건물에 들어가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뭐라 할까, 감회가 새롭다고 해야 하나.
“하아.”
창문 너머로 보이는 린딘의 거리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대전쟁 시대에 마법 폭격으로 파괴당한 도시는 고작 수십 년 만에 범차원 세계 금융의 중심으로 발돋움했다.
줄지어 선 마천루. 번화한 거리. 오가는 종족들의 숫자는 다양하다.
키키와이에서 일하는 것도 보람차지만, 역시 린딘은 차원신용금고 행원으로서 꼭 일해 보고 싶은 도시다.
아름다운 시계탑을 비롯해 유서 깊은 건물들은 물론 6-2차원에서 가장 세련된 라이프 스타일까지.
어차피 같은 일을 할 거면 큰 곳에서 하는 게 나은 법이다.
키키와이는 휴양지로서 아름다운 데에다 다양한 차원의 고객들을 상대로 일하며 경험을 쌓기 좋은 금융업의 최전방이긴 하다.
하지만 애초에 내가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 근무를 희망한 이유는 그곳이 전략 점포이고 고속 승진이 보장된 엘리트 코스이기 때문이다.
“…….”
나는 더 위로 올라가고 싶었다.
이쪽 세상에 오기 전까진 그림만 그리고 살아온지라 몰랐지만 이젠 확실히 자각하고 있다.
은행원은 내 천직이다.
내가 이 일을 누구보다 잘한다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단지 나는, 은행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적절한 액수의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 과정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림을 그리는 것 외에도 다른 방식으로 내가 사회와 관여할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지금은 대출을 하나씩 처리할 때마다 과장 조금 보태서 살아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었다.
앞으로 내가 승진해 더 큰 권한이 허락된다면, 분명 더욱 많은 이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고로,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는 어디까지나 거쳐 가는 곳일 뿐.
내가 정말로 일하고 싶은 곳은 본점의 여신 심사 부서다.
그렇다고 지금 출장소에서 하는 업무를 소홀히 하겠다는 건 아니다.
맡은 일 하나하나 최선을 다하지 않는 이상 승진이고 나발이고 없으니까.
그리고 나는 키키와이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때가 되면 떠나야겠지만, 현 상황에 딱히 불만은 없다.
수상할 정도로 은행원치고 생명의 위기를 많이 겪는다는 게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도착했습니다.”
생각에 잠겨있던 날 택시 운전수의 목소리가 현실로 돌려놓았다.
차에서 내리자 웅장한 주황색 건물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게 보였다.
차원신용금고, 린딘 본점.
과타노차의 피조물이 어떤 잠재력을 지니고 있을지 확인하러 가 볼까.
* * *
같은 시각, 본점 인사부.
인사부 대리 밀라는 사수인 폴로미와 함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가에는 거뭇거뭇하게 다크 서클이 내려와 있었는데 잔을 쥔 손 역시 쉴 새 없이 떨리는 중이었다.
“어, 언니. 우리 이거 제때 정리할 수 있을까요?”
“글쎄… 솔직히 말해서 자신 없는데.”
인사부의 젊은 피 2인조가 평소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은 요 며칠 동안 입행 이후로 경험한 적 없는 양의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각 점포 소속 행원들의 실수, 횡령, 위법 행위에 관한 기록.
그동안 지점에서 덮고 넘어갔거나 잘 감춰 온 탓에 드러나지 않았던 은행원들의 치부가 익명의 제보자에 의해 모조리 인사부 전산에 투서되었다.
덕분에 두 부서의 행원들은 꼼짝없이 업무 폭탄에 시달리게 되었다.
“제보자, 진짜 고맙긴 한데 얄미워서 딱 한 대만 치고 싶어.”
“인사부 행원이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않나요….”
폴로미의 불평에 밀라가 넋이 나간 얼굴로 답했다.
“…근데 실은 저도 비슷한 생각 했어요.”
하지만 이내 자신의 속내 역시 폴로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누군진 몰라도 대단한 사람이에요. 일단 전 점포의 데이터를 갖고 있다는 점이 놀랍고, 개산되지 않은 원본 데이터랑 CCTV 기록까지. 포렌식으로 찾아낸 걸 테지만 이만한 양의 데이터를 어떻게 단시간 내에 복원한 건지 모르겠네요. 엄청 오랫동안 준비한 거려나?”
“그럴지도 모르지.”
폴로미는 데이터 중에서 이미 행원의 신분이 아닌 이들이 범한 횡령의 증거를 먼저 추려내기 시작했다.
은행원이 아닌 이상 봐줄 이유가 없는 자들의 잘못부터 윗선에 보고하는 게 효율적일 거라고 판단한 결과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다른 선배들을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리스트에서 차례차례 발견되는 뜻밖의 이름에 경악하면서도 폴로미는 차분하게 웃었다.
그녀의 말대로 현직 인사부 행원의 이름은 제보된 명단 중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감사부도 마찬가지였다.
차원신용금고의 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두 부서가 부패하지 않다는 점은 두 사람에게 있어 크나큰 위안이었고 자부심을 되찾게 해 주었다.
“언니, 근데 좀 이상하지 않나요?”
“왜.”
“인사부에 이런 정보가 올 정도면, 아마 그 부서에도….”
-콰앙
밀라가 말을 마치자마자 문이 열리고 타 부서의 행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16차원에서 일어난 사건 탓에 근신 중인 감사부 행원 이로울의 사수, 아비멜다였다.
다른 감사부 행원이 그렇듯 천사 태생인 그녀는 크게 동공이 확장되어 있었는데 밀라는 그 이유를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야, 아비.”
밀라와 이로울이 동기인 것처럼, 폴로미와 아비멜다 역시 같은 시기에 입행한 동기였다.
이쪽은 특채가 아닌 공채 출신이라는 게 차이점이었긴 했지만.
“너희들 쪽에도 들어온 거지? ‘그 정보’.”
“아, 감사부에도 연락 왔나 보네.”
밀라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익명의 제보자는 인사부와 감사부 양쪽에 횡령을 저지른 행원들의 정보를 보낸 모양이었다.
보아하니 감사부 행원들 역시 인사부에서 벌어진 일을 그대로 겪은 모양이었다.
요 며칠 동안 인사부 행원들은 외부에 아무런 정보도 유출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왔다.
감사부 행원이 들어올 수 있던 건 데이터 분류를 끝낸 다음 감사부에게 증거를 건넬 예정이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감사부의 수중에도 동일한 데이터가 이미 있다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진다.
인사부는 인사부대로, 감사부는 감사부대로, 각각 리스트에 적힌 행원들에 관해 빠르게 조사를 마치면 되는 일이니까.
“처음엔 너희가 보낸 줄 알았는데, 잘 생각해 보니 이상하더라고.”
“맞아. 우리가 조사한 자료였으면 왜 굳이 익명으로 보내겠어.”
“그럼 대체 누가….”
세 행원은 한동안 입을 다물고 고민에 빠졌다.
“요즘 이렇다 할 사건은 없었는데….”
“아니. 수상한 일이야 있었지.”
감사부 대리 아비멜다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녀 역시 뚜렷한 확신을 지닌 건 아닌 모양이었다.
“있잖아, 요즘 전산 시스템 좀 이상해진 거 같지 않아?”
“그러고 보니 좀 빨라지긴 했죠. 전산관리부 분들 올라와서 검사하겠다고 난리 치는 거 겨우겨우 막은 기억이….”
“이사회도 갑자기 긴급 회의 열었잖아. 유지 보수 맡은 업체 관계자들도 본점 올라왔고.”
밀라와 폴로미가 대답하자 아비멜다가 꺼림칙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쩌면 우리 서버 전부 해킹당한 게 아닐까 싶어서.”
“…해킹?”
“솔직히 좀 수상하잖아. 전산 UI 갑자기 변한 것도 그렇고, 뭔가 전체적으로 성능 올라간 느낌도 들고.”
“그런 게 가능한 건 내부 인원일 뿐인데, 가뜩이나 업무가 바쁜 와중에 오로지 차원신용금고의 발전을 위해 시스템에 침입해 횡령범들 전부 밝혀내고 겸사겸사 고칠 만한 부분도 손봤다는 거네요? 대체 왜?”
티도 내지 않고 은행 전산망을 해킹해 부패한 행원들이 숨겼거나 인멸한 증거를 찾아낼 수 있는 실력이라면 큰돈을 벌어들이는 건 일도 아닐 텐데.
해킹당한 게 사실이라면 범인이 무슨 동기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진짜 이해 안 가네.”
사람이라면 응당 갖고 있어야 할 욕심을 찾아볼 수 없는 해킹범.
그 덕에 업무 폭탄이 터진 건 괘씸하지만 은행 입장에서 보면 고마운 사람인 건 틀림없었다.
“뭐,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겠지. 혹시 몰라? 행장님 휘하의 비밀 태스크 포스 같은 게 움직인 걸지도.”
“그런 게 진짜 있으려나?”
“내가 어떻게 알아, 그걸,”
“…그걸 인사부가 모르면 감사부인 나도 알아낼 방법이 없지. 아, 나도 커피 한 잔 얻어먹어도 될까?”
“제가 타드릴게요!”
며칠 동안 야근을 거듭하며 업무에 치이던 세 대리는 찰나의 휴식을 즐기고 다시 각자의 일터로 돌아갔다.
점심시간이 지난 다음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는, 그들 중 단 한 명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오전 8시 반.
약속 시간보다 30분은 일찍 본점에 도착한지라 여유 시간이 있던 나는 모처럼 여유롭게 건물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출입이 제한된 장소가 있는 데에다 본점 행원들이 바쁘게 일하고 있는지라 들를 수 있는 곳은 카페테리아와 12층의 테라스 가든뿐이었지만, 그래도 좋은 동기 부여 기회가 되어 주었다.
“본점이 좋긴 하네.”
린딘 시내를 오시하는 공중 정원을 걷고 있는 건 오직 나 한 사람이었다.
대다수의 행원들이 지금도 업무에 치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여유로운 상황.
그들이 바쁜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갔다.
어제 밥 먹을 때만 해도 과타노차만 나오고 밀라는 나오지 못했으니까.
이로울이야 뭐, 메신저 앱으로 꼬박꼬박 연락 중이라 가볍게 근신 처분받은 거 알고 있지만 밀라는 나올 법했는데.
녀석이 오지 못했다는 건 아마도 과타노차가 만든 인공 지능 전산 시스템 관리 솔루션과 연관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과타노차가 말한 ‘효율화’는 의미 없이 나가는 코스트를 줄이는 것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나와 비슷한 시기에 입행한 공채 출신 행원들 중 횡령이 걸려 잘린 이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아마도, 과타노차가 만든 인공 지능은 모든 전산 데이터를 학습, 조사, 연구함으로써 발견했을 거다.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행원들의 부정을.
인사 시즌도 아닌데 인사부가 정신 쏙 빼놓고 업무 폭탄에 치이는 이유는 그것 말곤 상상할 수 없었다.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아마 은행 내외에서 적잖은 풍파가 몰아칠 텐데.
부디 키키와이 출장소에 영향이 없었으면 좋겠다.
-지이이잉!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주머니에 넣어 둔 스마트폰이 요란한 진동을 토해냈다.
“김지안입니다.”
회의실로 오라는 호출이었다.
나는 전산관리부 인원들과 합류해 곧바로 21층으로 직행했다.
“…안녕.”
“왔나.”
과타노차와 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인공 지능이 녀석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감춰야만 한다는 생각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한 늑대 소굴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이사회 회의실.
잔뜩 쫄아 있는 전산관리부 행원들을 보다못해 선두에 선 나는 심호흡을 두 번 하고 문을 열어젖혔다.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인공 지능 마키나는 차원신용금고에 대출을 신청하고 싶습니다.>
대형 모니터에 아바타를 띄워 이사들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조르는 최첨단 인공 지능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