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77화
김지안이 곤히 잠든 사이, 그의 책상 위에선 미니어처로 재현된 산탄초넬로 죠사벨라 숲과 세계수가 미약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평소 김지안의 곁에 함께 모여 지친 몸에 기운을 불어넣던 네 정령들이 오늘만큼은 따로 모여 회동하고 있던 것이다.
“큐우, 큐우우(문제가 발생했다, 제군들).”
“뀨삐이. 삐. 삐이잇(확인했다. 언데드를 다시 살린다니, 믿을 수가 없군).”
“키이이익(이쪽 세상에서 부정한 존재도 생자와 동일한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것도 납득하기 힘든데, 섭리를 거스른 대가로 주어진 완전한 죽음마저 다시 거스르려 하다니).”
몇 달 전 33차원의 세계수를 잘라 만든 조각에서 탄생한 그들에겐 범차원 세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6-2차원의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들은 하나의 세계수에 깃들어 있던 네 정령에서 분화되어 나온 새로운 조각.
고로, 그들은 33차원의 정령들이 지니고 있던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김지안의 활약으로 두 번째 세계수가 심기고 엘프들의 미래가 열렸다든지, 그런 기억들 말이다.
하지만 이쪽 세상에서 통용되는 ‘상식’만큼은, 아무리 김지안의 숙소에서 TV와 기타 매체를 통해 확인하더라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죽음을 거부한 사자가 생자와 함께 자원을 누리고, 심지어는 살아 있는 이들보다 더한 특혜를 누리는 세상.
전기 제품과 마도공학으로 대표되는 현대 문명의 구성 요소 대부분을 거부하고, 산탄초넬로 죠사벨라 숲에서 명맥을 유지하던 엘프들과 함께 살아오던 정령들에겐 이곳에서 보고 듣는 모든 것이 큰 충격을 주고 있었다.
비록 이 몇 달 사이 TV의 연속 드라마와 영화, 애니메이션까지 두루 섭렵하게 된 그들이지만, 신의 명령에 의해 태어난 존재인 만큼 정령들은 섭리를 어긴 행동에 관해선 충격이 아닌 거부감부터 느꼈다.
그런데 그들의 구원자라고 할 수 있는 김지안이 언데드의 목숨을 연장하는 연구에 도움을 주고 싶어 하다니.
“뀨삣뀨(구원자를 말려야 하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이지).”
바람의 정령을 필두로 모인 정령들이 결론을 도출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김지안을 설득해 이번 일에서 손을 떼게 만들기로 결심했다.
“비잇(하지만, 어떻게)?”
다만, 문제는 방법이었다.
정령의 언어는 인간에게 닿지 않았다.
오로지, 대정령이라고 불리는 상위 존재만이 사람과 직접 소통할 수 있었다.
“…….”
김지안의 숙소에 머무는 정령들 역시 예외가 아닌지라, 이쪽 세상의 언어를 전부 알아들을 수는 있어도 자신들의 의견을 표현하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이는 신이 봉사종족인 정령을 만들며 부여한 족쇄.
정령은 몸으로 글자를 표현하는 것을 비롯해 그 어떤 방식으로도 직접 다른 지성체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할 수 없었다.
“삐이이이이(이것은 정령 차별이다)!”
“큐규규규규(노조를 만들어 신과 맞서자)….”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땅의 정령과 불의 정령을 바라보며 바람의 정령은 탄식했다.
저 둘은 뉴스를 몇 번 보더니 또 이상한 걸 배워서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피이이피피피피이카(무언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직접 현장 실사인가 하는 데에 따라간다면 구원자가 우매한 실수를 범하는 걸 막을 수 있지 않을까).”
“뀻…(좋은 생각이다, 형제여. 구원자의 스마트폰에는 세계수의 조각을 깎아 만든 케이스가 달려 있다. 그 안에 숨어든다면…).”
“비이(아니야. 분명 구원자가 눈치채고 우릴 감추려 들 걸세. 내게 더 좋은 생각이 있으니 들어 보게).”
책사의 역할을 맡고 있던 물의 정령이 목소리를 낮추고 자신이 떠올린 아이디어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삐뀨(과연, 그 방법을 사용한다면 우리가 무력시위를 하는 것도 가능하겠군).”
정령들은 조용히 움직였다.
물체에 자유롭게 빙의하는 그 힘을 사용해 거실 한복판에 장식된 콜로서스 마크 2의 내부에 스며드는 건 그들에게 있어 호흡하는 것 이상으로 쉬운 일이었다.
-기이잉!
단원자 금만이 아닌 4대 정령의 힘까지 얻은 콜로서스의 눈이 무지개색으로 빛나고 있었지만, 곤히 잠에 든 김지안은 무엇 하나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 * *
현장 실사 당일.
전날까지도 누가 동행하는지 통지받지 못했던 나는 한 줌 불안을 안고 집을 나섰다.
가방 안에는 콜로서스 마크 2가 담겨 있었다.
이유는 당연히 혹시 모를 범죄에 대항하기 위해서다.
“…저번처럼 목숨이 위험해지는 건 사양이니까.”
구체적으로 말하면, 베르나데 박사가 앞서 누군가의 사주로 병원 앞에 전문 시위꾼의 집단이 모여들었다고 경고한 까닭이었다.
나는 저번에 엘라마와 33차원을 방문했을 당시 고대 엘프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은 적이 있다.
만일 이번에도 시위 중인 이들 사이에 종교 집단 과격파에 소속된 미치광이가 섞여 있다면, 대출 심사를 위해 현장 실사를 나온 우릴 공격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이상 최대한의 대비를 갖추는 게 옳을 터.
가방 안에 실전 능력을 갖춘 변신 합체 로봇이 들어 있으면 조금은 마음이 든든해진다.
어쩌면 나만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시간은 오전 6시 반.
일찍 집을 나선 나는 미리 키키와이로 건너와 더 래리어트 키키와이에 투숙 중이었던 이로울과 만나 아이작과 셋이서 조식을 먹었다.
아이작은 이번 실사에 동행하지 않는다는데, 그래도 우리 둘이 골치 아픈 문제에 휘말렸다는 사실만큼은 인지하고 있는 듯, 밥 먹는 내내 가엾어서 견디지 못하겠다는 시선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체할 거 같으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동기의 커리어가 한 번에 날아갈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걱정이 되지 않는다면 사이코패스겠지.”
“…….”
그걸 굳이 당사자 앞에서 이야기하는 걸 보니 이 녀석 역시 배려심이 꽝이다.
“괜찮아요, 지안 형제. 우리 주께서 올바른 길로 인도하실 겁니다.”
대책 없는 소리를 해 대는 이로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쪽 세상에 신이 대체 몇이나 있는데.
하여튼 천사들의 오만함은 알아주어야 한다.
그들의 신이 정말로 길을 인도한다면 애초에 세상이 어그러지는 일은 없었을 거다.
천사들의 창조주는 다른 신들과 같이 개입을 포기했고, 피조물들의 자유 의지를 방관하고 있었다.
그가 다른 신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여타 신들처럼 사람들 사이에 섞여 지내지 않는다는 점이겠지.
“됐어. 우린 그냥 가서 보고 들은 걸 그대로 보고하면 돼. 같이 가는 행원들도 그렇게 할 거고. 몇 가지 우선순위를 고려해야 하긴 하겠지만.”
“우선순위라….”
아이작이 작게 중얼거렸다.
“듣자 하니 어린아이의 목숨이 걸려 있다고 하는데.”
“맞아. 한 번 죽었다 살아난 언데드만 걸리는 기이한 증상 중 하나라는데. 영혼이 소멸하게 되는 모양이야. 연구가 성공하면 살릴 수 있다지만, 자세한 건 모르겠어.”
“대출이 진행되면 아이를 살릴 수 있지만, 그 대신 은행 전체가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 이건가.”
“이번 연구가 성공하면 그 이상으로 위험한 연구들이 여기저기서 차례차례 진행되어 사람들이 죄다 네크로맨시 시술을 받고 싶어 하는 세상이 될지도 모른다더라고.”
“너무 상상이 과한 건 아닌가.”
“나야 모르지. 그냥 미지에 대한 공포일지도.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이로울.”
“음… 언데드는 사이한 존재라 남김없이 토막 내서 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
나와 아이작은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
어째서 본점에서 이런 미친놈을 실사에 보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로울이 16차원에서 잘못 입을 놀렸다간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을지도.
“하하. 형제님들 너무 그렇게 정색하지 마시길. 전부 농담이었습니다.”
이로울은 무엇이 유쾌한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지난 전쟁의 시대야 그런 식으로 교육받았던 게 사실이지만. 지금은 저희도 언데드가 사회의 훌륭한 구성원 중 하나라고 인정하고 있으니 안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교구장 형제님들도 이젠 언데드에게도 상냥하게 대해 주라고 가르치고 계실 정도입니다. 그들은 다시 육신이 재로 돌아갔을 때 드높은 천상에도 지옥에도 속할 수 없는 가엾은 존재라고 하시더군요.”
근처 테이블에 앉아 있던 손님 중에 섞여 있던 언데드가 동그래진 눈으로 이로울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라즈마 과장과 달리 행운이 따라준 케이스로 최신식 네크로멘시 시술을 받아 생자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비주얼의 시체였는데, 멀쩡하게 우리와 같은 음식을 먹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오감 역시 정상적으로 느낄 수 있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겉모습에서 별로 차이가 안 나니까 거부감도 적다.
저런 모습이라면 언데드로 살아가며 수명을 연장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아, 이게 아닌데.”
잠시, 들다 말았다.
역시 사람은 사람답게 살다 죽어 사후 세계로 가야 옳지.
괜히 이쪽 세상에서 새로 접한 개념 탓에 그동안 내가 지녀온 인생관을 뒤집고 싶지 않았다.
딱히 죽는 게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저, 죽음을 거스르고 얼마든지 이 세상에 머물 수 있는 네크로맨시 기술에 조금 의구심이 든 까닭이었다.
정말로, 언데드가 되면 아무런 리스크 없이 이 세상에 계속 남아 있을 수 있는 걸까.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사후 세계를 포기함으로써 지상에서 불완전한 영생을 이어 가는 것이 과연 가장 좋은 선택지인 걸까.
만일 언데드가 된 자들이 포기한 죽음 너머의 삶이 우리가 상상한 이상으로 아름답고 좋은 것이라면 어떨까.
의문은 꼬리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전부 진정한 의미로 죽음에서 돌아온 자만이 대답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나는 생각하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당연히 이쪽 세상에 온 뒤로 내가 알던 상식의 대부분을 포기하긴 했는데, 삶과 죽음에 대한 관점만큼은 원래 살던 곳에서도 크게 고민해 본 적이 없던지라 범차원 세계로 이주한 다음에도 영 달라지지 않고 있었다.
“어쨌든, 개인적으론 모두가 만족하는 결과가 나왔으면 해. 너무 어린 나이에 죽는 건 불쌍하니까 아이도 계속 살 수 있으면 좋겠고, 차원신용금고도 피해를 보지 않았으면 싶어.”
“지안 형제님은 욕심쟁이군요.”
“…원래 그림 그리다 와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어. 이상주의적인 부분이 있는 거 말이야.”
“그래도 저는 그런 형제님을 응원하고 있답니다.”
이로울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트레이드마크인 치렁치렁한 장발이 흔들리며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어떻게 된 게 천사가 인간보다 더 리얼리스트인지 모르겠네.”
어차피 이번 실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린 식사를 마치고 아이작의 차를 타고 출장소로 향했다.
예상대로 우릴 인솔하는 건 엘라마였고, 나는 그의 지시를 따라 필요한 각종 서류 등을 점검했다.
그런데 출발 준비를 마치고 차원 관문 앞에 섰을 때 이상하리만치 오한이 느껴졌다.
위화감이 느껴져 뒤를 돌아봤는데, 어째서인지 내 뒤에는 라즈마 과장이 서 있었다.
“왜 과장님이 여기에…?”
“금일의 실사는 저도 동행하기로 했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언데드에 관한 연구이지 않습니까.”
아니, 그게 무슨 소리죠, 과장님?
개인 대출 관련 업무 맡은 사람도 아니고… 프라이빗 뱅킹 섹터에서 일하는 당신이 왜…?
라즈마의 머릿속에선 연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아마도 이사회에서 찬성 의견을 표한 구C를 대표해 실사에 참가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
어찌 됐든 나는 이번 대출이 은행 안에서도 밖에서도, 상당히 정치적인 것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 될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