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69화
사태는 비슈티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방검복과 방탄복에 헬멧까지 착용한 채 누워 있던 나는 소란이 일어나자마자 침대에서 일어나 불을 켰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칼침을 맞은 거대한 구렁이와 스텔스 슈트를 입은 비슈티가 한 덩이로 엉켜 바닥을 뒹구는 모습이었다.
“이걸 진짜 들어오네….”
회의가 끝난 직후, 비슈티는 내가 콜로서스가 분석한 결과를 보고 지적한 호위망의 허점이 의도된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러 한 군데 빈틈을 만들어 두면 암살자가 알아서 기어들어 올 거라고 판단했다는데, 나를 미끼로 삼겠다고 대놓고 말하길래 일단 거절했다.
문제는, 대화를 듣고 있던 엘라마가 곧바로 다가와 내 뒤통수를 후려쳤다는 점이었다.
‘까라면 까. 소 대가리가 지켜 준다는데 뭐가 걱정이냐.’
그렇게, 나는 불안에 떨며 방호구를 착용한 채 이불 속에 누워있게 된 것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비슈티 과장이 만에 하나 실수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콜로서스 역시 대기시켜 두었다.
무서운 것도 무서운 건데 잠도 못 자고 콘택트렌즈 끼고 있어야 해서 눈 따가워 죽는 줄 알았다.
그래도, 일단은 잡아서 다행인가.
“…하하, 좋아. 인정할게. 내가 졌어.”
그런데 어째서인지 비슈티에게 구속당한 암살자는 유쾌하다는 듯 웃고 있었다.
말하는 뱀을 보는 건 썩 기분이 좋은 일이 아니었기에 오래 쳐다보기도 좀 그렇다.
특히나 그게 우리의 목숨을 노리는 자라면.
단검이 몸에 꽂혀 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시시덕거리는지라 그 모습을 바라보는 행원들은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졌으니까 하는 수 없지. 의뢰인 정체 빼고는 궁금한 거 다 물어봐도 돼.”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소. 그쪽 목숨은 내 손에 달려 있는데.”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유독 비슈티만 냉철한 눈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제발 부탁이니까 상대가 암살자라고 해도 내가 보는 앞에서 비슈티가 녀석의 모가지를 썰어 버리거나 그러진 말았으면 좋겠다.
“내가 당신 손에 죽는다는 전제가 틀려먹었단 얘기지. 지금 항복 선언하는 것도 누구 하나 안 죽이고 의뢰 완수하기 까다로워 보여서지 딱히 여기 있는 사람들 못 죽인다는 소린 아니거든.”
정체불명의 암살자는 한동안 키득대다 뱀 같은 몸을 비틀었다.
-콰득
단검이 꽂혀 있던 부분이 퍼즐 조각처럼 몸에서 떨어져 나가더니 녀석의 모습이 사람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낮에 로켓 쏜 놈은 사람이었는데 웬 구렁이가 있나 싶었는데 변신 능력을 지닌 놈이었군.
마법이 실존하는 세계라 그런지 이젠 뭘 봐도 신기하다기보단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어 버렸다.
“무슨 속셈인진 모르겠는데 입 터는 거 수상하니까 똑바로 무력화시켜 둬. 탈출하면 골치 아프니까.”
“동의합니다. 암살자의 말에 귀 기울일 이유는 없죠.”
엘라마와 라즈마는 어서 암살자를 치워 버렸으면 하는 눈치였는데, 비슈티는 의견이 달랐다.
“죽이지 않고 의뢰를 완수? 그게 무슨 뜻이오.”
여전히 금속으로 만든 로프로 전신이 구속되어 있지만 여유롭게 웃는 암살자를 바라보며 비슈티가 물었다.
그는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무언가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말한 대로야. 난 당신들도 그렇고 저기 다른 방에서 자는 신혼부부도 죽일 생각이 없어. 죽이지 말고 겁만 줘서 헤어지게 만들라는 의뢰였거든.”
-퍼억
녀석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비슈티의 군홧발이 그 얼굴을 걷어찼다.
“이 상황에서 그 말을 믿으라는 것이오?”
평범한 사람이라면 두개골이 부서져 숨이 끊어지고도 남을 법한 강렬한 일격.
하지만 녀석은 비슈티의 발차기에 얻어맞는 순간 머리를 반투명하고 물컹한 젤리처럼 변화시켜 그대로 충격을 흡수했다.
“그만해, 형씨. 형씨는 나 못 죽여.”
다시 얼굴을 원래대로 되돌린 녀석은 비슈티에게 조언하듯 말했다.
“나는 여전히 언제든 당신들을 토막 낼 수 있다고. 이딴 장난감으로 날 구속할 순 없어. 지금 나는 의뢰 수행을 위해 성실하게 참고 있는 거야.”
그 말이 거짓말은 아닌 듯, 암살자는 기괴한 각도로 사지를 비틀더니 순식간에 비슈티가 사용한 구속구에서 빠져나왔다.
반응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는 압도적인 속도였다.
“잘 봐.”
-츠팟
뭘 보라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하려던 순간 암살자의 손이 흐릿한 잔상을 남겼다.
무슨 일인가 싶어 녀석의 주먹 쥔 손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천천히 펼쳐진 손바닥에는 누군가의 손톱이 네 개나 올라가 있었다.
“……!!”
뒤늦게 정수리를 뚫을 기세로 치솟아 오르는 통증.
통증을 상실한 지 오래 지난 엘라마 과장과 간신히 공격을 피한 비슈티를 제외한 나머지 셋의 입에서 한 박자 늦게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어 나왔다.
나와 엘라마, 그리고 아이작의 오른손 엄지에서 새빨간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분명 안전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암살자는 자신의 손만 변신시켜 우리들의 손톱을 하나씩 뽑아 가는 말도 안 되는 기예를 선보인 것이다.
“미친….”
암살자는 공기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핏물조차 묻어 있지 않은 손톱을 던졌다가 잡길 반복했다.
이쪽의 반응을 즐기는 눈치였다.
“원래는 당신네들 반죽음 만들어서 타깃 앞에 끌고 가려 했어. 이혼 서류 도장 찍지 않으면 모조리 죽이겠다고 협박할 생각이었지.”
-피슉
날카롭게 찔러 들어오는 비슈티의 군용 단검을 피하며 암살자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근데 내 기감을 피해 가는 실력자가 있었지 뭐야. 그래, 여기 흰털 미노타우로스 형씨 말이야.”
암살자는 손등으로 비슈티의 공격을 쳐 냈고, 그 순간 나는 계속해서 명령으로 붙잡아 두고 있던 콜로서스를 움직였다.
<침입자 격퇴 시퀀스 기동.>
-콰아아아!!
베개 뒤에 숨어 있던 콜로서스가 황금빛 궤적을 남기며 돌진했다.
단원자 금의 에너지가 최대 출력으로 뻗어 나온 빔 사벨.
사람 하나 통째로 베어 낼 수 있는 길이로 늘어난 빛의 칼날이 일직선으로 암살자의 정수리를 내리고 떨어졌다.
-부웅!!
공기의 구성 성분이 빔 사벨이 발하는 초고열과 만나 플라스마로 화하자 낯선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하지만 콜로서스의 참격은 암살자를 포착하지 못했다.
놈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신체를 변신시켜 비슈티와 콜로서스의 연계를 벗어났다.
“난 싸울 생각 없다니까. 손톱 하나 뽑은 건 그래도 내가 최대한 노력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해서 그렇다고.”
“아까부터 계속 헛소리를….”
“워워. 형씨,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 봐.”
순식간에 거리를 벌려 창가에 걸터앉은 녀석은 비슈티를 진정시키려는 듯 두 손을 뻗었다.
일단 뭐라 지껄이는지는 들어 봐야겠다고 판단한 난 콜로서스에게 명령해 공격을 멈췄다.
“말했듯이, 내겐 댁들 다 죽일 능력이 있어. 난 이쪽 일엔 천부적이거든. 근데 여기 미노타우로스 형씨, 25차원에서 이름 좀 날리던 ‘쌍각雙角의 사신’ 맞지?”
“…….”
비슈티가 노골적인 적개심을 드러내며 혀를 찼다.
저런 별명으로 불렸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소문은 익히 들었어. 댁이 여기 지키고 있는데 한 명도 안 죽이고 의뢰 수행할 수 있다고 믿을 정도로 난 오만하지 않아.”
“힘 조절하지 않으면 날 죽일 수 있다는 말로 들리오.”
“당연하지. 근데 아무도 죽이지 말라는 게 의뢰인의 지시라서.”
아까부터 콜로서스로 살핀 놈의 감정은 흔들림이 없었고 살의 또한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녀석이 아무런 살의 없이 사람을 죽이는 사이코패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거짓을 말할 때 발하는 특유의 노이즈가 렌즈에 표시된 데이터에 섞여 있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보아 그의 이야기는 전부 사실인 듯했다.
“내가 포기한다는 건, 의뢰인이 책정한 보수가 난이도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낮아 거절하겠다는 뜻이야.
누군가 죽이지 않으면 수행 못 할 의뢰인 데에다 형씨랑 붙으면 나도 어느 정도는 피해를 감수해야 하니까.”
“의뢰가 실패한 게 아니라, 의뢰인이 잘못된 정보를 주었으니 거절하는 형태로 마치겠다 이건가.”
“정확해. 나는 나대로 커리어를 지킬 수 있고 복도 건너편에서 자고 있을 신혼부부 역시 헤어질 필요가 없어. 서로 좋게좋게 끝내자는 거지.”
녀석을 경찰에 넘기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하지만 이쪽이 지닌 최강의 전투 요원인 비슈티와 콜로서스가 합격을 펼쳐도 무력화시키지 못한 프로 청부 살인 업자를 이곳에 묶어 두는 건 불가능하다.
너무 위험하기도 하고.
일단은 놈이 원하는 대로 이탈하게 놔두는 게 상책일까.
엘라마와 다른 행원들이 내게 힐끗 시선을 보냈다.
콜로서스의 레이더와 내 눈의 힘이 합쳐지면 인사부의 밀라만큼은 아니어도 타인의 속내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는 건 아까 말해 두었다.
다들 암살자 녀석이 하는 말이 거짓이 아닌지 나를 통해 확인하고 싶어 하는 거다.
-끄덕
한 번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엘라마가 신음을 흘렸다.
아직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
실은 나 역시 저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 힘들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네게 정말 아무도 죽일 생각이 없었다면 어째서 은행 창구에 대전차 로켓을 쏜 거지?”
진짜 아무도 죽이지 않고 바이나우스 부부를 헤어지게 만드는 것이 의뢰 내용이었다면 출장소에 폭발물을 발사할 이유는 없었을 터.
그렇게 생각했는데, 암살자가 보인 반응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쏜 건 최루탄이 든 가짜였다고. 애초에 폭발한 적도 없잖아.”
“뭐라고?”
제일 충격을 받은 건 비슈티였다.
“그럴 리 없소. 콜로서스가 잘라낸 탄두 안에는 화약이 가득했단 말이오.”
“…뭐라고?”
이번에 경악한 건 암살자였다.
“그럴 리가… 분명 비살상 무기라고 들었는데….”
녀석은 낭패한 얼굴로 자꾸만 무어라 중얼거렸다.
“자신이 사용한 무기가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 못하다니. 상대하기 까다로운 능력을 쓰는 건 사실이오나 암살자로선 삼류라고 해도 될 것 같소.”
“…형씨 말 다 했어?”
비슈티의 도발에 암살자가 발끈했다.
킬러라는 족속들에 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말이 많을 줄은 몰랐다.
아니면 이 자식만 좀 특이한 걸지도.
“그보다 방금 말한 거, 증명할 수 있어? 당신네들한테 내가 머저리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는데 무기 판 녀석이 날 속인 거라면 일이 커지거든.”
우린 짧게 시선을 교환했다.
어쩌면 이번 사태, 우리가 모르는 내막이 있을지도 모른다.
대화로 이 녀석을 쫓아 보낼 수 있다면 시도할 만한 가치는 있다고 모두가 암묵적인 동의를 표했다.
“콜로서스, 블랙박스 데이터 조회해.”
<한 건의 기록을 확인. 대전차 로켓 탄두의 절단면을 표시하겠습니다.>
생생한 슈퍼 슬로우 모션 홀로그램 영상으로 허공에 투영된 콜로서스의 시각 데이터.
“가가멜 새끼, 어째 연락이 안 된다 싶더니… 내 뒤통수를 쳐?”
그것을 지켜보던 암살자의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분노로 새빨갛게 물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