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68화

“뭐냐고, 도대체!”

투숙객으로 변신해 빈 객실에 숨어든 요하네는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대체 무엇에 독이 무효화되었는진 알 수 없다.

가가멜이 준비한 독은 둘째치고 자신이 변신 능력으로 분비해 낸 독 역시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마법이나 다른 힘이 이 섬에 작용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설명이 불가능한 현상.

요하네는 이번 의뢰가 자신의 능력을 넘어선 게 아닐까 의심했다.

물론, 그렇다 해도 미션을 완수해야 한다는 사실에 변함은 없다.

포기할 생각 역시 없었다.

단지, 여태껏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쌓아 온 커리어에 흠집이 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조바심이 날 뿐이었다.

비록 타깃을 죽이는 미션은 아니어도 정점에 선 암살자인 요하네에게 있어 두 번이나 계획을 실패한다는 건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가가멜을 근처로 불러내 화풀이하려 했지만, 어째서인지 연락이 닿지 않았다.

“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무기 상인은 암살자 이상으로 원한을 사기 쉬운 직종이다.

그러다 보니 가가멜이 잠수를 타는 건 가끔 일어나는 일이었다.

다만, 타이밍이 너무 나빴다.

요하네의 수중에 있는 건 전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무기.

타깃을 죽이지 않는 무기를 구해야 했기에 이번 의뢰엔 가가멜의 도움이 필수 불가결했다.

반드시 죽이는 암살자인 요하네에게 있어 절대로 죽이면 안 되는 임무는 상당히 까다로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리스크를 고려하지 않고 육탄전으로 뛰어든다면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타깃과 주변 인물을 때려눕히고 겁을 줄 수 있겠지만, 그건 분명 의뢰인이 원하는 방식이 아닐 터.

아무리 변신이 가능하다 해도 직접 타깃을 엄호하는 비전투 요원인 은행원들 앞에 나서서 직접 그들을 두들겨 패는 건 스마트한 방식이 아니다.

요하네가 배워 온 암살은 그보다 훨씬 이지적이고 도시적이며 세련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방식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그렇다고 주어진 의뢰를 포기하는 건 더더욱 싫었다.

-지이이이잉!

요하네는 두 의뢰인에게서 교대로 오는 연락을 무시하고 생각에 잠겼다.

어느 한쪽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면 의뢰를 완수하는 것을 선택하는 게 낫다.

일류의 미학을 잠시 내려 둠으로써 커리어를 지킬 수 있다면 선택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으니까.

“이런 짓까진 하고 싶지 않았는데.”

요하네는 몇 번인가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맨손으로 사람을 때리는 건 오랜만인지라, 힘 조절에 실패할까 걱정하면서.

“스승님 얼굴에 먹칠을 할 순 없으니까.”

이 의뢰는 ‘그 남자’가 직접 소개한 것.

이대로 물러나는 건 용납되지 않으니까.

* * *

“그렇게 됐나. 건투를 빌겠네. 나머진 일을 마친 다음 얘기합세.”

옛 부하의 연락을 받은 네스먼토 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슈티가 김지안을 죽을 위기에서 구해 냄으로써 오커스 디스파테르 행장에게 진 빚을 갚는다는 그의 계획은 생각보다 순조롭지 않았다.

비슈티의 보고에 따르면 금일 있던 암살 시도는 두 번.

모두, 비슈티의 간섭 없이 다른 원인에 의해 저지되었다고 한다.

“어렵게 되었는걸. 설마 자체적으로 몸을 지킬 수단이 있을 줄은….”

네스먼토는 바이나우스와 레오니아브가 가문의 막내들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선 위험한 방법도 가리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친절한 척 아디젠과 미놀리에게 차원신용금고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에서 대출을 받도록 유도했다.

하지만 이대로 김지안이 제대로 된 위기에 처하는 일 없이 대출이 끝난다면 어떻게 될까.

신혼부부가 무사히 6-2차원을 떠나 어딘가 다른 곳에서 삶을 꾸려가게 되는 거야 상관이 없지만, 행장이 지닌 징수의 권능을 피하는 건 불가능해질 것이다.

이번에 이사회에서 상정되는 안건은 그동안 먼지 속에 파묻혀 있던 ‘그 기업’의 재정을 건전화해 재건하는 것.

만일 구E가 행장의 권능에 의해 강제적으로 찬성표를 내게 된다면 어두운 과거가 드러나게 된다.

구D의 오랜 숙원이었던 안건이다. 행장은 반드시 이사회에서 이 안건을 통과시키려 할 터.

성공하게 두었다간 과거 구E의 간부들이 했던 어두운 거래가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될 터.

물론, 네스먼토 이사가 직접 개입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은행의 돈으로 장난을 쳤다는 사실에 분개해 오히려 그 일에 연관된 구E 행원들을 숙청했을 정도였으니.

다만, 그렇다고 책임 소재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만일 당시의 사건이 밝혀진다면 행장과 이사회는 이때다 싶어 구E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제아무리 행내 융화 정책을 펼친다 해도 경쟁자의 약점을 보고도 그대로 둘 만큼 행장은 어리석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오래된 거래에 관해 어디까지 파악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자칫했다간 구E의 영향력이 더욱 감소할 수 있는 상황.

김지안이 자력으로 극복할 수 없을 정도의 위기가 닥치지 않는 한, 비슈티가 그의 생명의 은인이 되도록 유도할 순 없을 것이다.

“내가 직접 움직이는 상황만 오지 않았으면 좋겠군.”

네스먼토로선 그저, 자신의 도박이 성공하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 * *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행원들은 정해진 계획대로 아디젠 부부가 묵은 방을 경호하기 시작했다.

바캉스 시즌마다 리조트로 건너와 시설과 요인 경호를 담당하는 경호팀 역시 본점의 지시로 동원되어 비슈티의 지시 아래 각 포인트에 배치되었다.

“저어, 제 생각엔 여기 경호가 조금 비는 것 같은데.”

물론 혹시 모를 암살 시도를 대비해 철저한 대비책을 간구하려 하는 건 비슈티만이 아니었다.

김지안은 콜로서스의 분석 능력을 통해 비슈티의 인원 배치에 허점이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았고, 이를 정확하게 지적했다.

“전부 계산된 배치인데, 귀공은 오랫동안 전쟁을 경험한 나보다 AI 따위를 더욱 신용하는 것이오?”

“그건 아니지만―”

“그 정도로 해라, 김지안. 의욕이 앞서는 건 알겠지만 네놈의 일은 따로 있던 거로 기억하는데.”

김지안이 반박하려 했지만 엘라마가 이를 제지했다.

엘라마에게 있어 비슈티 역시 자신이 직접 선발한 인재.

은행원으로서 지닌 탁월한 능력 외에도 비슈티는 요인 경호와 암살을 비롯해 다양한 군사 작전을 수행한 베테랑이다.

이쪽 분야에 관한 일이라면 완전히 비슈티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 엘라마의 의견이었다.

“…알겠습니다.”

김지안은 뜻밖에도 순순히 자리로 돌아가 아디젠 부부의 대출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엘라마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김지안이 직무권능으로 확인한 부부의 잠재력은 매우 높았다.

그들이 요청한, 가문을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데 필요한 대출의 액수는 만만치 않았으나 이를 상환할 만한 능력은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본점의 여신 관련 부서도 김지안의 직무권능을 신뢰하고 있으니 대출을 거부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터.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두 사람은 각각 바이나우스와 레오니아브의 막내.

두 제과 명문가의 자제로서 어린 시절부터 가문의 비밀 레시피와 제왕학을 배워 온 그들이라면 새로운 사업을 일으키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니까.

게다가 둘은, 외부에 알려진 바이나우스와 레오니아브 가문 구성원들의 인성과 달리 유하고 겸손한 성격을 지닌 듯했다.

이 둘이 계속 부부로서 관계를 이어 간다면 바이나우스와 레오니아브의 경쟁 구도로 인해 유지되던 브랜드 마케팅도 방향을 바꿀 테고, 결과적으로 두 가문이 WIN-WIN 관계가 될 수도 있을 텐데, 그런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듯 암살자가 둘을 죽음으로 갈라놓으려 시도하고 있다.

딱히 남의 집안일에 간섭할 생각은 없어도 은행에 로켓이 날아온 시점에서 차원신용금고는 정체불명의 적과 맞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고객을 보호함과 동시에 대출을 진행하는 수밖에.

대출이 승인되면 두 사람을 안전한 차원으로 피신시키고, 그다음은 암살자를 붙잡고 의뢰인으로 추정되는 이들에게 죗값을 물어야 할 터.

“골치 아프게 되었군. 이게 은행인지, 흥신소인지 씁….”

엘라마는 다차원 출장소에서 근무하게 된 이래로 계속해서 두통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본점에서조차도 상대해 본 적이 없는 끔찍한 대출 안건이 차례대로 쏟아지는 걸 보니 이곳이 더욱 출세하기 위한 발판은커녕 자신의 무덤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몇몇 대출 안건은 구C나 구E에서 골치 아픈 고객을 부추겨 일부러 출장소에 밀어 넣은 걸지도.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솔직히 아내와 자식이 있는 몸으로서 암살 시도에 휘말리는 건 결코 기쁜 일이 아니었다.

이번 일이 무사히 해결되면 반드시 행장과 이사회를 흔들어 충분한 보상을 받아 내리라고, 엘라마는 다짐했다.

행원의 업무를 아득히 벗어난 짓까지 한 대가를 받아 내지 못한다면 이런 리스크를 감안할 이유는 없으니까.

문제가 있다면, 그가 오늘 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 * *

새벽 4시.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간대를 노린 요하네는 타깃이 묵고 있는 숙소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눈을 변형시켜 멀리서부터 경호원의 동선을 확인해 두었다.

정확히 한 곳, 침입이 가능한 빈틈이 있었다.

“귀찮게 됐네. 맨손은 영 꺼림칙한데 말이지.”

요하네는 철판을 덧댄 가죽 장갑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계획은 단순했다.

호위의 눈을 피해 행원 몇 명을 족쳐 타깃의 방으로 끌고 간 다음 고문한다.

약간이라도 비명을 지를 경우 전부 죽여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을 생각이고, 말귀를 못 알아 처먹는다면 경호 중인 녀석들까지 전부 반죽음으로 만들면 된다.

제아무리 부부의 금실이 좋다 해도 주위 사람들이 죄다 산송장이 되어 가는 와중에도 협박을 견딜 수는 없을 터.

심지어 피해자가 그들에게 있어 생명을 구해 준 은인과도 다름없는 행원이라면 양심이 견디지 못할 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든 알 바가 아니다.

중요한 건 둘이 헤어져 서로의 가문으로 돌아가는 것.

의뢰를 성사시키는 데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간다.”

요하네는 자신의 다리를 웨어울프의 것으로 변신시켰다.

-타탓!

암살자는 사람의 귀가 포착하기 어려운 수준의 소음 외엔 그 어떤 소리도 발하지 않고 리조트 부지에 깔린 어둠 속을 질주했다.

도구나 전자 장비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변형된 안구는 완벽하게 암적응을 마치고 타깃들에게로 향하는 경로를 요하네에게 알려 주고 있었다.

우측에서 다가오는 경호원을 피해 지붕 위로 도약.

그대로 허공에서 자세를 틀어 경보 장치를 속인 다음 팔다리를 변형시켜 벽에 매달렸다.

코 부근에는 뱀의 피트 기관을 모방한 장기를 생성.

아까 파악한 대로 은행원 중 하나가 방 안에서 잠들어 있었다.

꼴에 교대로 불침번을 서는 모양이지만, 숙련된 상대로 감히 편히 잠을 잘 생각을 하다니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다 네놈들이 자초한 일이라고. 나도 이런 험한 짓 하기 싫었단 말이야.”

손바닥을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빨판으로 변형시킨 요하네는 창문에 동그랗게 구멍을 내 잠금을 해제했다.

소리 없이 열린 창문.

팔다리를 수납해 뱀의 모습으로 변한 암살자가 방 안으로 기어들어 간 다음 순간.

-콰득

피트 기관으로도 체열을 감지해 내지 못한 누군가가 휘두른 단도가 요하네의 몸에 내리꽂혔다.

“잡았다.”

어둠 속에서 드러난 건 뿔 달린 하얀 사신.

불파사 비슈티의 샛노란 눈이 암살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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