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62화

‘빨리 가요. 저 배고파요.’

‘잠깐만, 잠깐만. 잠깐만.’

밀라는 내 손을 강제로 잡아끌고 가게로 향했다. 무슨 힘이 이렇게 세.

‘너 이 근처 진짜 온 적 없어? 처음이야?’

‘오빠는요?’

밀라는 머뭇대는 나를 억지로 끌고 갔다.

어제, 플루토와 그녀의 언니와 함께 식사를 했던 음식점… 의 옆에 붙어 있는 다른 가게로.

‘여기 음식이 참 괜찮다더라고요.’

‘누가?’

‘블로그에서요.’

아. 이유는 모르겠는데 불편해 죽겠다. 자꾸 뭔가 날 떠보려는 느낌인데 대체 무슨 생각인지 감이 안 잡힌다.

‘어어, 덕분에 나도 새로 가게 발굴하게 되겠네….’

‘오빠 진짜 이 근처 온 적 없어요?’

‘그럼. 키키와이 오고 나서 맨날 출장소랑 집만 왕복했으니까.’

이유는 모르겠는데 내 입에선 멋대로 거짓말이 술술 나오고 있었다.

‘흐음. 진짜?’

‘어, 어어….’

-꿀꺽

이쪽을 보는 밀라의 눈이 가늘어진다.

나와 밀라는 아무 관계가 아닌데, 굳이 거짓말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왠지 모르게 이 근처에 온 적이 있다고 말하는 순간 영 불편한 내용의 대화가 시작될지도 모른다고 직감이 속삭이고 있어 껄끄러웠다.

어제는 압박 면접에 오늘은 심문.

왜 내 주변 여자들은 다 이 모양일까.

분위기가 이상해지고 있는 데엔 나와 밀라가 들어온 식당의 상황 역시 일조하고 있었다.

어제 해물 먹은 가게는 좀 왁자지껄한 분위기였는데, 이 레스토랑은 너무나도 조용하다.

무엇보다 촛불 켜진 테이블에 앉아 있는 건 죄다 커플이었다.

‘왜 죄다 커플이지. 무슨 날인가?’

‘오빠 진짜 몰라요?’

‘뭘 모른다고 그러는 거야.’

‘…아니에요. 저도 몰라서 물은 거예요.’

밀라 녀석은 묘한 눈웃음을 배시시 짓고는 서빙된 음식을 자르기 시작했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우월감이라도 느끼고 있는 걸까.

거 더럽게 우쭐대네.

‘맞다. 커플 하니까 생각난 건데요.’

음식을 먹던 밀라는 무언가 떠올린 척 부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꿨다.

‘어제 재밌는 걸 봤거든요.’

밀라는 초콜릿 브랜드 두 곳의 직영점과 그곳에서 일하는 두 점장의 금지된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너 그거 프라이버시 침해….’

‘아, 몰라요. 궁금한 걸 어떡해.’

‘아니, 그보다 행원 배지 가져온 거야?’

질문을 던짐과 동시에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밀라의 시선을 피했다.

이번에도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냥 남에게 내 감정을 들키는 게 싫었던 거 같은데.

‘저도 대리 달고 직무권능 강화되었거든요. 일주일에 한 번은 배지 없이도 쓸 수 있어요.’

‘아, 그런 거였어?’

우리는 한동안 두 초콜릿 가게의 점장에 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과거 대립과 항쟁의 결과 유혈 사태까지 번졌다고 하는 두 초콜릿 명문가의 이야기.

레오니아브와 바이나우스에 관해 잘 아는 건 아니었지만, 연수원 시절 제과 회사의 대출 안건이 시험에 나왔던지라 어느 정도 파악은 하고 있었다.

두 가문이 운영하는 초콜릿 회사 모두 주거래 은행이 차원신용금고가 아닌지라 완전 빠삭하게 아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핏줄을 이은 이들이 서로 연애 감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충격적인 뉴스인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꼭 로미오랑 줄리엣 같네.’

‘그게 뭐예요.’

‘그런 게 있어. 다음에 영화판 블루레이 빌려줄게.’

‘또 오빠네 차원 고전 명작인가 하는 그거예요?’

‘맞아.’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거리에 관해 간단히 들려 주자 밀라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든 비슷한가 보네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란 스토리텔링에 있어 불멸의 테마 중 하나다.

어떤 세계에서도 신분이나 입장, 기타 등등의 차이로 인해 고난을 겪는 커플이란 있기 마련.

셰익스피어의 통찰력은 먼 미래의 6-2차원에서도 어김없이 빛을 발하는 중이었다.

‘이쪽에선 아예 피부색이 아니라 종種의 차이 때문에 문제를 겪는 사람들이 많아서 저한테도 남 얘기 같지 않아요.’

‘넌 남친도 없으면서 왜.’

‘혹시 모르잖아요. 제가 다크엘프보다 수명이 짧은 인간이랑 사랑에 빠질지도.’

‘…….’

‘그러다 상대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마주하게 될 고독이 무서워서 결혼을 망설이게 되면….’

‘혼자 드라마 찍고 있네.’

우린 실없이 남의 연애 얘기나 하며 시간을 보냈다. 콘텐츠는 부족하지 않았다.

밀라와 대화하는 건 언제나 그 자체만으로도 꽤나 즐거운 경험이었으니까.

‘아, 오빠. 이거 선물.’

식사를 마치고 헤어지기 전, 밀라는 가방에서 고급스러운 종이봉투를 두 개나 꺼내 내게 건넸다.

안에 든 건 금박으로 장식된 고급 수제 초콜릿 상자.

아까 연애 얘기하다가 나온 두 초콜릿 브랜드의 상품이었다.

‘비싸 보이는데 이런 거 받아도 되는 거야?’

‘오늘 하루 같이 놀아 줬으니까 선물이에요.’

둘 중 하나는 원래 아이작 녀석 몫이었으려나.

‘아이작한테 반 주면 돼?’

‘…오빠 평소에 눈치 없다는 소리 많이 듣죠?’

‘내가 왜.’

‘하아….’

밀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걸 보니 뭔가 해선 안 되는 말을 한 게 아닐까 싶다.

‘그나저나 요 며칠 동안 초콜릿 받는 일이 잦은 것 같은데.’

‘…네? 누가 또 초콜릿 주던가요?’

‘어. 나노이의 사우 박사님이랑 같이 일하는 창구 상담사가 하나씩. 내가 정말 몰라서 묻는 건데 혹시 이번 주 무슨 행사 있거나 그래?’

밀라는 잠시 동안 눈을 멀뚱대며 날 보고 있었는데, 그동안 얼굴이 점점 빨개지고 있었다.

‘그, 그런 건 따따따딱히 아니고요오오….’

별로 술도 안 먹였는데 이제야 알코올이 돌기 시작한 모양이다.

말 더듬기 시작한 거 보니 확실하다.

‘다다다다들 오빠 요즘 고생하니까 당분 보충하라고 하나씩 선물해 주나 보죠. 사사사사사랑받고 있어서 다행이네욧!’

‘오냐. 부족한 김지안 대리 사랑해 줘서 고오맙다. 취한 거 같은데 빨리 호텔 가서 자. 데려다줄 테니까.’

‘…네헤에.’

나는 밀라를 데려다줄 생각으로 술을 한 모금도 먹지 않았기에 무사히 렌터카에 녀석을 태우고 래리어트로 향했다.

밀라는 조수석에 앉은 채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린 자세 그대로 아무 말이 없었다.

편안하게 곯아떨어진 거 보니 내 운전 실력도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아. 잘 놀았다.’

차 뚜껑을 열자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닥쳤다.

숙소에 세워 둔 업무용 차량 기름값 따로 내고 쓰는 것보단 모처럼 쉬는 날이겠다, 기분 낼 겸 딱 하루만 오픈카를 빌려 봤는데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

그래서 지난 이틀간의 기억이 버스에서 내려 출장소에 출근한 다음에도 계속 주마등처럼 머릿속에 되살아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화요일 아침, 출근 후로 계속해서 이어지는 기억.

아이작과 함께 영업 준비를 마치고 대출 창구에 앉은 나는 휴가 복귀 후 첫 번째 손님을 맞이했다.

그들은 강렬한 햇빛 속에서도 선글라스와 스카프, 트렌치 코드 등으로 전신을 꽁꽁 싸맨 채 은행에 나타났다.

‘신혼부부 전용 주택구입자금대출 관해 상담드리러 왔습니다.’

얼굴을 가린 두 사람은 조용히 내 앞에 신분증을 내려놓았고, 그 위에 적힌 이름은 ‘아디젠 바이나우스’와 ‘미놀리 레오니아브’였다.

전날 밤, 밀라에게 들은 두 초콜릿 명가의 구성원.

그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내 시야에, 은행 정문 앞에 선 수상한 사내가 보였다.

신혼부부의 어깨 사이로 보이는 거동수상자.

완벽히 재단된 정장을 입은 사내는 복면을 쓰고 있었는데, 그 외에 특기할 만한 사항으로선 어깨에 묘한 물건을 얹고 있다는 점이었다.

“X발.”

그 물건의 정체를 확인한 직후, 나는 그제야 여태껏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이틀간의 기억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 * *

~5분 전~

“아디젠 바이나우스입니다.”

“미놀리 레오니아브, 아니, 바이나우스입니다.”

방금 혼인 신고 마치고 오는 길이라 신분증에 아직 예전 성이 쓰여 있는 신부.

그리고 그녀 옆에서 조용히 미소를 짓는 신랑.

모자와 스카프에 가려져 있던 고양이 귀와 개의 귀가 드러났다.

둘은 그레이트 후리텐의 국민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종족인 도베르와 페르시.

일반적인 페르시 남성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크고 호리호리한 모델 체형인 아디젠과 작고 가냘픈 푸들 귀의 미놀리는 그림에 그린 듯한 선남선녀 커플이었다.

도베르와 페르시는 먼 옛날 다른 차원에서 건너와 그레이트 후리텐의 패권을 다퉈온 종족으로 원래부터 사이가 영 좋지 않았다.

이미 몇백 년은 지난 얘기긴 해도 두 종족 사이에 존재하는 문화 차이, 뿌리 깊은 경쟁 의식, 그리고 갈등은 여전히 그들의 핏줄 속에 남아 있었다.

어린 세대라면 모를까, 흔히 다들 결혼 적령기라고 부르는 20대 후반~40대 초반의 페르시와 도베르들은 여전히 사이가 나빴다.

그들이 서로를 여전히 배척하는 건 윗세대의 계속된 교육 탓이다.

혼기가 찬 두 종족의 청년들이 결혼에 골인하는 경우는 매우 매우 드물었고, 만에 하나 성공적으로 가정을 이룬다 해도 지역 사회에서 영 좋지 않은 시선을 받는다고 한다.

고로, 도베르와 페르시 부부와 그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대부분 다른 국가나 차원으로 이민을 가는 건 굉장히 자연스러운 케이스.

…인 것으로 아는데.

출장소를 찾아온 두 남녀는 종족의 벽만이 아니라 더욱 높은 허들마저 넘어선 굉장한 커플이었다.

“확인차 여쭙겠습니다만 두 분의 성은 결혼 전을 기준으로 레오니아브와 바이나우스로 틀림없으신지요.”

“정확합니다.”

“…….”

무슨 우연일까, 이건.

어젯밤 밀라가 밥 먹다 말해 준 금단의 커플.

이 사람들이었구나.

“두 분의 직장도 각각 ‘메종 데 레오니아브’와 ‘바이나우스’시고요.”

“네. 각각 키키와이 플래그십 스토어의 점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맡고 있었다는 건 어떤 뜻인가요.”

“둘 다 모아 둔 유급 휴가 쓰는 중입니다. 휴가 다 쓰면 퇴사할 예정입니다.”

“퇴사하신다고요?”

“예. 대출 가능한 액수를 책정하는 데에 영향이 크려나요? 너무 큰 금액을 빌려 갈 생각은 없긴 합니다만.”

이 사람들 하는 얘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데 내가 멍청해서 그런 걸까.

방금 들은 이야기만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 둘은 가족 경영에 서로 앙숙인 거로 유명한 수제 초콜릿 브랜드의 오너 가문의 자제로.

부모가 맡긴 직영점의 경영을 때려치운 다음, 신혼부부 전용 대출에 관해 상담하기 위해 이곳을 찾아왔다는 소리인데.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 두 집안이 화해했거나 브랜드를 합치려고 정략결혼을 진행하기로 결심했거나 그런 걸까.

그리고 이 둘은 결혼 소식이 외부에 유출되면 주가가 폭등할 게 두려워 비밀리에 혼인 신고부터 먼저 진행한 거고?

“…….”

아니지. 그럼 대출은 왜 받으러 오겠어.

신혼부부용 대출 상품은 빌릴 수 있는 액수가 한정적이다.

이쪽 세상에서 초콜릿 업계의 금자탑이라고 불리는 두 집안의 자제가 꼴랑 그 돈이 없어 은행에 빌리러 오는 건 말이 안 된다.

게다가 이 둘은 얼굴까지 가리고 오지 않았나.

정황상 가족의 눈을 속이고 온 건 확실해 보인다.

이거, 함부로 대출 신청 받아 주었다가 어마어마한 일에 휘말려 버리는 건 아닐까.

하지만 고객의 프라이버시를 건드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가족분들께서 결혼을 반대하고 계시진 않으신지요’ 같은 질문을 함부로 던질 수도 없는 상황.

그보다, 애초에 이 둘이 출장소를 찾아온 건 우연일까?

두 브랜드의 주거래 은행이 아닌, 차원신용금고를 찾아온 시점에서 이미 어느 정도 머리를 굴렸다는 건 알 수 있는 상황.

자연스러운 흐름일지도 모르겠지만 직감이 경고를 보내는 건 어째서일까.

…더 이야기를 들어 보기 전에 딱 하나만 확인하고 넘어가 보자.

“죄송합니다만 혹시 당행에서 대출을 상담받으시기로 정하신 계기라든가, 그런 게 있었나요.”

“그럼요. 본점의 네스먼토 이사님께서 저희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키키와이 출장소에서 이야기를 나눠 보라고 말씀하셔서―”

“네스먼토… 이사님이요?”

머릿속에서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차원신용금고에서 일하는 행원인 이상 모를 수가 없는 이름.

차원신용금고의 세 근본 중 무장 은행이란 별명으로 더욱 잘 알려진 25차원 엘라스무스 요정은행, 현 구E 파벌을 이끄는 우두머리 중 하나가 바로 그였으니까.

이곳에 오기 전 서부 포독스 지점의 델 몬테 지점장 역시 네스먼토 이사를 조심하라고 말했을 정도다.

“…….”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날아오는 게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비슈티 과장이 날 보고 있었다.

분명 뭔가 알고 있는 눈치.

구E의 우두머리라면 구D의 독주를 견제하고 싶어 할 법도 하다.

그렇다면 네스먼토 이사가 이 신혼부부에게 출장소에서 대출 상담을 받아 보라고 한 건 아마도 우릴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일 터.

“이사님께서 차원신용금고의 금리가 제일 합리적이라고 하시더군요. 필요한 서류는 전부 가져왔습니다. 천천히 확인해 주시면….”

“은행에 오는 게 이렇게 스릴 있는 일일 줄은 몰랐어요. 아버지가 알면 노발대발할 텐데.”

아디젠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옆에 앉아 있던 미놀리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자기네 아버지가 알면 나 죽이려 들지도 몰라.”

“설마…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다 이해해 주실 거야.”

“그러시겠지?”

“응, 너무 걱정하지 마.”

둘만의 세상에 빠져 창구 앞에서 손잡고 교감 중인 커플.

하지만 지금 내가 신경 쓰이는 건 두 사람의 집안 사정 같은 게 아니었다.

“아까 말씀하신 이야기, 조금 더 자세히 들려 주셔도 될까요?”

내게 지금 필요한 건 휠체어 탄 이사님이 꾸미고 있는 음모에 관한 단서였으니까.

“네스먼토 이사님이 무어라 하셨는지―”

하지만 나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다음 순간, 두 남녀의 어깨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거수자가 하나.

복면 쓴 정장의 사내는 휴대용 대전차 척탄 발사기, 그러니까 지구에서 흔히 RPG-7 등의 명칭으로 불리는 무기를 들고 있었다.

‘자기네 아버지가 알면 나 죽이려 들지도 몰라.’

죽이려 들지도 모른다는 거.

진짜 말 그대로, 물리적으로 살해한다는 뜻이었냐?

-투쾅

굉음과 함께 발사된 대전차 로켓이 이쪽을 향해 날아왔고.

“X발.”

나는 생애 처음으로 주마등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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