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61화
“오늘부터 또 출근인가….”
화요일.
주말 이틀에 더해 월요일까지 푹 쉰 나는 다시 버스를 타고 출장소로 향하는 중이었다.
사흘이나 편하게 놀고먹은 데에다 정령들의 도움도 있어 컨디션은 만전.
또 오늘부터 업무가 시작된다.
이번엔 대체 어떤 차원에서 누가 대출을 받으러 올까.
고대 엘프부터 시작해서 현미경으로도 보이지 않는 초소형 인간까지.
상상도 못한 고객님들이 종족 혹은 행성의 미래가 걸린 대출 안건을 들고 찾아오는 곳이 바로 내 직장, 차원신용금고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다.
“하아….”
역시 인간인 이상 가끔은 쉬어 줘야 한다.
아직은 일이 너무 재밌으니, 정말 가끔씩만.
여러모로 지치는 건 사실이니까.
“서울도 한번 들러 보고 싶은데. 좀 길게 쉬는 거 아니면 무리겠지.”
이번엔 꼴랑 사흘이라 3-1차원에 다녀오는 건 생각도 못했다.
다음 기회에 가 보든가 해야지.
“다음엔 언제 쉴 수 있으려나.”
버스 안에서 창밖을 보며 멍을 때리다 눈을 감으니 지난 사흘의 기억이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토요일은 집에서 푹 쉬었고.
일요일은 미행을 피하다가 플루토와 그녀의 가족을 밖에서 우연히 만나 맛있는 걸 먹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다행히 집에 갈 때까지 별일 없어서 엘라마에게 보고하진 않았고.
월요일엔 또 밀라를 만났다. 원래는 아이작과 셋이서 볼 생각이었는데.
“…….”
생각해 보니 두 번의 만남 전부 상당히 기를 빨리고 말았다.
쉬는 날인데 전혀 휴식을 취했다는 기분이 들지 않을 정도로.
그나마 토요일 하루 뻗어 있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그대로 지친 상태로 출근할 뻔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지.”
이번 휴가 때 만난 사람들, 죄다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일단은 일요일에 만난 플루토랑 그녀의 언니라는 사람.
처음엔 그냥 잡담이나 하다 밥만 먹고 헤어질 생각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식사하다 체할 뻔했다.
‘흠. 은행원, 이신가요.’
‘실은 저도 금융권에 몸을 담고 있어서 말입니다.’
뜻밖에도… 까진 아니더라도 저런 데에서까지 동종업계 종사자와 맞닥뜨릴 줄은 몰랐다.
분명 처음 봤을 땐 말수가 적은 인상이었는데, 어째 술이 조금 들어가고 나서부터 분위기가 묘해지기 시작했다.
가장 큰 문제는, 이 사람이 초면인데도 상당히 까다로운 질문을 계속해서 던져 댔다는 사실이었다.
‘훌륭합니다. 실무 1년 차라고 믿어지지 않는 업무 이해도군요. 그럼, 다음은 수신 관련 질문입니다.’
‘지안 씨께선 매월 발생하는 연장 만기 관리 고객의 숫자를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
대충, 이런 식으로.
면접 본 날의 기억이 떠오를 정도였다.
날것 먹는 자리인데 절대 날로 먹게 두지 않겠다는 것처럼.
플루토의 언니는 차례차례 밥 얻어먹는 사람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딥한 질문을 던져왔다.
말투야 점잖을 진 몰라도 솔직히 엘라마 처음 본 날 상대했던 압박 면접보다 심했다.
아니, 뭐, 한 끼 사는 거로 생색낼 생각은 없긴 한데.
어떻게 처음 보는 사람한테 상사처럼 굴 수가 있는 거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플루토만 해도 은근 초면부터 반말로 신경을 살살 긁어 댔는데, 이쪽 역시 친언니라서 그런지 방향성이야 달라도 사람 속 뒤집어 놓는 데엔 일가견이 있는 모양이다.
‘헤헤. 대리님 쩔쩔매고 있어.’
‘플루토. 술자리라 해도 예의는 지켜야지.’
그렇게 말해 놓고 본인은 마구 이쪽의 지뢰를 밟으려 든다.
아무리 같은 업계에 종사하고 있다 해도.
내가 1년 차 햇병아리라 해도.
이쪽 업무에 관해 쓸데없이 질문 공세를 할 권리는 저 여자에게 없다.
뭐, 어쩌면 점잖은 사람이 술이 들어가서 선을 넘어 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자신의 업무를 사랑해 마지않는 워커홀릭 같긴 한데.
젊어 보이는 외모와 달리 평소 부하들하고만 대화하느라 제대로 된 커뮤니케이션의 방식을 배우지 못한 게 원인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결국 참지 못하고 한 소리 했다.
‘플루토 씨 가족분. 그쪽이 같은 업계에서 일하는 선배인 건 잘 알겠는데, 너무 타인의 업무에 관해 관심이 많으신 건 아닌지요.’
‘아, 실례. 나쁜 버릇이 나왔습니다.’
점잖게 불쾌함을 드러낸 다음에야 그녀는 정중하게 사과를 건넸다.
다만, 나는 식사가 끝나갈 때 즈음에야 왜 그녀가 그런 질문을 던진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원인은 작은 오해였다.
‘저, 지안 씨.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그런 거 신경 안 쓰시는 줄 알았는데 인제 와서 물으시니 당황스럽습니다.’
‘언니 되는 사람으로서 묻는 건데, 플루토와 관계는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요.’
‘부흡.’
‘컥.’
그 말을 들은 나와 플루토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입에서 음료를 뿜어냈다.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은데 저랑 플루토 씨는 평범한 직장 동료입니다.’
‘대리님 내 스타일 아니야. 근데 왜 대리님이 나보다 먼저 부정하는 건데? 좀 화나네?’
‘그보다 그….’
‘오커스입니다.’
‘오커스 씨는 어쩌다 그런 오해를….’
내가 묻자 오커스인가 하는 여자는 진지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동생이 밖에서 우연히 만난 지인에게, 개중에서도 이성에게 같이 밥 먹으러 가자고 말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
‘저는 제 동생을 잘 알고 있습니다. 플루토는 먼저 이성에게 식사를 함께하자고 쉽게 말을 꺼낼 아이가 아닙니다.’
어째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려 하는지라, 나는 계속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옆에 앉은 플루토를 보니, 그녀 역시 정색하며 손사래를 치고 있었다.
과연, 그녀가 압박 면접 비스무리한 짓을 한 건 내가 플루토와 친근한 관계라고 오해한 탓이었나.
우리 둘이 있는 힘껏 오해라고 어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의심 어린 시선을 던지는 걸 보니 아직 완전히 납득하지 않은 모양이다.
골치 아프고 기가 빨린다. 휴일인데 왜 내 돈 내고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거지.
플루토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 미인에 속하지만 그와 별개로 이렇다 할 친근감이 없는 사람과 연인으로 오해받는 썩 유쾌한 일이 아니다.
아마도 플루토 역시 같은 생각이겠지.
‘주제넘은 질문을 던지고 말았습니다. 실례가 많았군요. 동생이 처음으로 사귀는 남자라고 생각하니 그만….’
일단은 오해도 풀렸겠다, 나는 끝까지 이 악물고 불편한 소리 하는 일 없이 하하 호호 웃으며 식사를 마쳤다.
셋 다 상식 있는 사회인이고(플루토는 조금 의심스럽지만) 술은 화이트 와인 한두 잔 마신 게 전부였던지라 진상을 부리거나 토하는 일은 없었다.
‘식사는 제가 사는 거로 하죠.’
아까 실수한 게 미안했던 건지 오커스는 굳이 자기 카드로 밥값을 긁었다.
조명이 어두워 잘 보진 못했지만 카드 색깔이 꼭….
모르긴 몰라도 정말 잘나가는 사람인 듯했다.
딱히 잘난 척하는 모습도 없이 자연스러워 그냥 말리지 않고 잘 먹었다 말하고 넘어갔다.
‘대리님 입가심!’
한편, 플루토는 무슨 생각인지 다시 평소처럼 나사 빠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입가심?’
음식점 앞에서 작별을 고할 생각이었는데 녀석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건넸다.
‘초콜릿?’
‘응. 의리!’
‘의리?’
그게 끝이었다.
녀석은 짧게 한마디, ‘미안’이라고 사과한 다음 근처에 있던 리무진을 타고 언니와 돌아갔다.
‘운전수가 따로 있네….’
언니가 능력자거나 집이 잘살거나, 아니면 둘 다려나.
어느 쪽이든 괜히 밥 사겠다고 깝친 게 후회될 따름이었다.
그날, 나는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다시 미행을 당할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적당한 호텔에서 묵고 일어나 독신 행원 숙소로 돌아간 건 날이 밝은 다음의 일이었다.
‘어. 준비 끝났어. 지금 데리러 갈게.’
나는 그렇게 옷을 갈아입고 이번엔 밀라를 만나러 출발했다.
기껏 귀중한 휴가를 써서 먼 곳까지 여행 온 밀라를 버스에 태울 수도 없는지라 렌터카를 빌렸다.
남들 다 일하는 시간에 놀러 나간다는 사실에 묘한 배덕감을 느끼며 래리어트 앞에서 밀라를 픽업.
그런데, 밀라 녀석.
평소와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안녕. 지안 오빠.’
풀 메이크업.
기합 바짝 들어간 복장.
예전 동기 모임 할 때 몇 번 사복 입은 모습을 보긴 했는데 오늘은 진짜 분위기가 달랐다.
옅은 화장에 단정히 머리를 땋고 다니던 애가 9 대 1 가르마로 머리 가지런히 풀어 넘겼는데, 나랑 밥 먹고 어디 소개팅이라도 가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뭐야, 오늘.’
‘왜요.’
다만, 그래 봤자 밀라는 밀라.
시크한 척 치명적인 척 입꼬리 비죽대며 썩소 날리는 꼴이 같잖아 웃었더니, 녀석은 바로 평소처럼 방방 뛰며 성을 내기 시작했다.
‘여행지 왔으면 꾸미고 다닐 수도 있지! 나도 패션 관심 많거든요?’
확실히, 밀라의 센스는 훌륭했다.
내가 아는 미술 종사자들 나름 옷 잘 입고 다니는데 전혀 꿀리지 않을 정도로.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저번에 나 33차원 라이노밀 출장 갈 때 엄청 부러워했었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화는 왜 내.’
‘눈빛이 맘에 안 들거든요?!’
뭐, 나도 얘 비웃을 때가 아니다. 모처럼 동기 모임 나온다고 안 쓰던 모자까지 챙겨 쓰고 왔으니.
‘출발해요, 김 기사.’
‘어느 댁 사모님이냐, 넌.’
‘시집도 안 갔는데 사모님은 무슨. 양가 규수님이거든욧?’
‘컨셉도 참….’
뒷자리도 아니고 옆자리 타 놓고 우아하게 다리 꼬아 봤자 밀라는 밀라다.
‘네에, 그럼 경치 좋은 데부터 안내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이것저것 인사부 정보 흘려 줄 귀중한 인맥이다. 오늘 하루 정도는 어울려 주는 수밖에.
우린 다이아몬드 펄 헤드부터 시작해 차례차례 명승을 돌았다.
황금 연휴 전인데도 저번에 방송에서 나온 패키지 때문에 키키와이 여행 뽐뿌 와 버린 관광객들이 여기저기에 보이고 있었다.
…어찌 된 게 죄다 커플이네.
‘차암. 좋을 때다.’
‘취업 1년 차가 나이 먹을 대로 먹은 사람 같은 소리 하지 마.’
헛소리 좀 하다 밀라의 인생 허세샷 찍어 주고, 얼떨결에 둘이서 같이 찍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시간이 벌써 오후 6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밥 먹자. 아이작 부를게.’
‘…아이작 씨요?’
‘왜. 동기 모임이잖아. 기껏 키키와이 왔는데 오랜만에 보고 가야지. 어제 아이작한테도 연락했는데 퇴근하고 시간 된다고 그랬어.’
그때였다.
밀라의 표정이 노골적으로 어두워진 건.
‘…….’
점점 눈빛이 매서워지는데 혹시 나 지뢰 밟은 건가.
설마, 이 녀석 아이작이랑 썸타다 깨졌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내가 당황하는 사이 밀라는 빠른 손놀림으로 스마트폰을 조작하고 있었다.
-띠링
10초도 지나지 않아 내 전화기가 울렸다.
[아이작: 급한 용무가 생겼다.]
[아이작: 모임은 다음에 가도록 하지.]
‘…뭐지. 아이작 일 생겨서 못 온다는데.’
밀라의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그 주위에선 왠지 모르게 싸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에이. 어쩔 수 없네요. 둘이서 먹으러 가요. 맞다, 오빠 나 가고 싶은 가게 있는데.’
‘키키와이 언제 와 봤다고 가고 싶은 가게가….’
‘당연히 블로그 리뷰로 봤죠.’
밀라는 스마트폰으로 지도 맵을 켜서 내게 보여 주었다.
대략적인 위치를 확인해 보니 중심가 쪽이었다. 그쪽에 괜찮은 가게가 많긴 하지.
그런데, 차를 주차장에 세우고 밀라가 고른 가게 앞에 선 순간 나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여긴….’
이상하다.
나 어제도 여기서 밥 먹은 거 같은데.
‘왜요, 오빠. 온 적 있어요?’
밀라는 생글생글 웃으며 순진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