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56화
나노이인들이 0.1차원 태양계에서 우주 괴수의 씨를 말린 지 일주일이 지난 즈음.
“…진짜 잡혀갔네.”
독신 행원용 숙소에서 편한 복장으로 모처럼 느긋한 주말 아침을 즐기고 있던 김지안은 즐거움과 감탄이 섞인 얼굴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한 손에는 커피.
다른 손에는 조간신문.
신문 1면에 실린 기사는 오미나이 발로마의 긴급 체포 소식을 알리고 있었다.
“이게 진짜 되네.”
그레이트후리텐의 두 대형 정당 중 여당의 중견으로 이름을 날리는 이가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못하고 잡혀간 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다들 알다시피 국회의원에 대한 체포 동의안이 가결되는 건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만장일치에 가까운 숫자의 의원들이 찬성에 투표하는 일은 더더욱이나.
“하긴, 뇌물 수수에 탈세, 배임·횡령, 살인 미수 교사 등등 화려하게 저질렀으니까.”
생각해 보면 납득 가는 결말이긴 했다.
오미나이 발로마는 하나의 차원에 사는 수십, 수백억의 인구를 몰살시키려 한 장본인이었으니까.
저만큼 저지르면 아무리 무기명 투표라 해도 소속 정당의 다른 의원들에게까지 모조리 손절당해도 이상하지 않다.
어쭙잖게 옹호하려 들다간 같이 피를 볼 것이 자명한 상황이니까.
“…다른 거물들도 엮여 있겠지.”
다만, 김지안이 생각하기에 이번 체포 동의안의 가결 과정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았다.
개중 하나가, 바로 오미나이 발로마가 소속된 여당의 의원들이 죄다 찬성표를 던져 손절 의사를 밝힌 점이었다.
마치, 거대한 영향력을 지닌 누군가의 명령 아래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계파가 한둘이 아닐 텐데, 의견 합치가 이렇게 잘되는 게 정상인가.”
이미 6-2차원의 정치권 이야기에도 익숙해진 김지안이 보기엔 무척이나 부자연스러운 광경이었다.
오미나이 의원이 직접 총대를 메고 이번 전파 납치 사건에 관여한 건 사실이지만, 인제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그 배후에 또 다른 거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오미나이마저 거대한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뭐.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닌가.”
다만, 평범한 은행원인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을 거란 생각에 김지안은 신문을 내려놓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흐아암….”
침대에 누운 그의 곁으로, 창가에 자그마한 숲을 만들어 쉬고 있던 정령들이 다가왔다.
“어, 그래, 그래. 이리 온.”
원본보다 훨씬 조그마한 모습을 가진 정령들.
세계수로 만든 가구나 공예품에 깃들게 된 이들은 김지안의 쓸쓸한 독신 숙소를 끊임없이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으로 가득 채워 주고 있었다.
몽실몽실한 털 뭉치처럼 생긴 바람의 정령은 김지안의 가슴팍 위에 올라타 찹쌀떡 같은 몸뚱이를 납작하게 펼치고 휴식을 취했다.
그 옆에는 도자기로 만든 구슬처럼 생긴 흙의 정령이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허공에 떠 있는 건 물의 정령과 불의 정령.
정교하게 조각된 수정과도 같은 아름다움을 지닌 둘은 끊임없이 타원형의 곡선을 그리며 김지안의 머리 위를 비행했다.
-고오오
창밖에서 불어오는 편안한 바닷바람과 정령이 발하는 기운은 김지안의 몸에 쌓인 피로와 독소 그리고 스트레스를 말끔히 씻어내기 시작했다.
마치 33차원의 울창한 자연 속에서 쉬는 듯한 편안한 감각.
세계수에 사는 고대 엘프가 아닌 이상 누릴 수 없던 정령들의 관심과 사랑이 한 명의 인간에게 주어지고 있었다.
잠시 눈을 감고 누워 있기만 해도 모든 번뇌가 사라지며 머릿속이 맑아지는 신비로운 경험.
근래 들어 김지안이 업무를 수행함에 있어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일 수 있던 데엔 정령들이 준 도움이 적지 않았다.
“하아… 주말 최고.”
김지안은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내게 된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것처럼 눈을 감은 채 황홀한 미소를 지었다.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에서 일한 지 어언 수개월.
하지만 이 섬에 온 이후로 주말 아침에 이렇게나 여유로운 시간을 가진 적은 여태껏 단 한 번도 없었다.
“진짜 얼마 만에 쉬어 보는 거지. 하….”
김지안은 힘들었던 지난 나날을 떠올리며 상념에 잠겼다.
주중의 업무를 마치고 주말이 되면 아침 일찍 일어나 서부 포독스 지점에선 경험하지 못한 유형의 새로운 업무에 관한 지식을 갖추기 위해 공부에 매진했다.
그게 아니면, 출장을 준비하거나 다른 차원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거나.
“…….”
특히, 저번 33차원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이후로 김지안은 자신의 부족함을 통감하고 타 차원의 환경과 그곳에 거주하는 종족들의 특징.
그리고 문화까지 다방면에 걸친 자료를 입수해 암기했다.
0.1차원 사람들과의 교류가 그나마 수월했던 건 출장에서 돌아온 이후 착실히 여러 종족에 관해 공부해 온 덕이었다.
“의미가 없던 건 아니지.”
한계까지 사람을 굴리는 엘라마의 밑에서 은행원의 한계와 재량을 넘어선 갖은 창의적인 방식으로 문제 해결을 요구받는 나날을 보낸 김지안이 무너지지 않았던 건 이러한 준비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대를 다니던 시절부터 실력을 늘리기 위해 어떤 연습을 해야 하는지, 자신의 모자란 점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분석하며 노력해 왔다.
김지안의 향상심은 그때부터 변한 적이 없었다.
3-1차원 지구를 떠나 익숙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쪽 세상에서도 무사히 적응해 연수원 수석을 따낼 수 있던 것 역시 그 타고난 성실함 덕분이었다.
다만, 그런 생활은 김지안 본인에게 상당한 부담을 안겨 주고 있었다.
“아, 왜 이리 늘어지냐.”
다시 엄습해 오는 졸음.
쉬는 날에도 긴장을 풀지 못하는 생활을 했던 탓일까, 너무 오랜만에 휴식이라는 것을 접한 김지안의 몸은 침대에서 일어나길 거부하고 있었다.
“으으….”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번아웃… 와 버렸나.”
키키와이에서의 생활은 다른 지점의 행원들이 생각하는 만큼 이상적이지 않다.
김지안은 늘 역량 이상의 무언가를 해낼 것을 요구받았고, 지시받았다.
다행히도, 김지안은 여태껏 맡아온 모든 대출을 무사히 성사시켜 왔다.
물론 과정은 언제나 위태로웠다.
그리고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이 계속 잘 풀릴 거란 보장 역시 어디에도 없다.
정령들이 정신적 육체적 피로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해도 고작 주말에 이틀 쉬는 정도론 턱도 없을 정도로 김지안은 지쳐 있었다.
“연가, 쓸까….”
이번 주말에 쉴 수 있던 건 엘라마의 ‘강요’ 때문이었다.
본래였다면 평소처럼 공부하며 지낼 생각이었지만, 엘라마는 일에 관한 생각 자체를 그만두고 휴식을 취하라며 협박했다.
‘이번에 쉬지 않으면 영원히 쉬지 못하게 만들어 주지.’
자살을 그만두지 않으면 직접 죽여 버리겠다고 말하는 듯한 기이한 문장.
이게 바로 츤데레의 정석인가?
결국, 필요하다면 하루 이틀 정도 더 영업일에 쉬라고까지 말하는지라, 차마 상사의 권고를 듣지 않을 수도 없어 이렇게 모처럼 편하게 누워 있는 것이다.
“실적 냈으니까, 하루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콜로서스 로보틱스는 홈쇼핑과 크라우드 펀딩으로 모은 자금으로 충분한 양의 콜로서스를 생산해 전쟁에서 승리했다.
빌린 돈을 일시불로 상환한 건 당연한 결과였다.
추가로 자금을 지원했던 차원신용금고는 순식간에 거액의 이자에 더해 기업 후원자 자격으로 대량의 콜로서스를 획득했다.
전부 기체 외부 장갑에 은행 로고가 박힌 한정판.
이를 경매를 통해 컬렉터들에게 판매한다면 대출로 얻은 이자 이상의 수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나노이가 우주 괴수의 위협에서 벗어남으로써 이전에 그들이 차원신용금고에게서 빌려간 자금 역시 계획대로 돌려받을 수 있게 되었다.
당연히 이는 대출을 담당한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
개중에서도 특히 김지안의 실적에 짙게 반영이 될 예정이다.
전쟁을 엔터테인먼트화해 나노이를 구하는 데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자고 제안한 건 순전히 그의 아이디어였으니까.
엘라마가 휴식을 강요한 건, 김지안이 이번 일을 진행하는 동안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하루만 더 쉬자.”
화요일까진 쉬어도 된다고 이미 엘라마가 말해 두었지만, 그래도 토, 일, 월, 화까지 4일 내리 쉬어 버리면 감각이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된다.
월요일까지 총 3일만 쉬자.
그렇게 결심하고 김지안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딩동
택배입니다.
그리고 3초도 지나지 않아 울린 현관 벨.
“아 뭔데, 잠 좀 자자. 진짜….”
김지안은 머리를 긁으며 밖으로 나가 택배를 수령한 다음 발신인을 확인했다.
“박사님?”
김지안은 사우 박사가 보낸 선물임을 확인한 순간 상자를 방 안으로 가져와 곧바로 개봉했고.
“…와.”
생각지도 못한 내용물을 집어 들고 감탄을 흘렸다.
“미친.”
쌓여 있던 피로가 한순간에 날아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 * *
6-2차원 후리텐이 자랑하는 거대 은행 차원신용금고次元神用金庫.
그 모든 점포 중에서도 린딘 본점과 더불어 지금 가장 주목받고 있는 출세 코스로 알려진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
그곳에서 일하는 은행원은 대리 둘을 제외하면 모두 차원신용금고를 구성하는 세 파벌이 자랑하는 최고의 실력을 가진 실무자들.
비록 출장소의 실적을 올리기 위해 느슨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긴 해도 행내 융화 정책을 펼치는 구D를 제외한 두 파벌은 호시탐탐 우위에 점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
이런 연고로 건물 안에 고객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출근 시간대와 퇴근 시간이 되기 직전의 출장소에는 언제나 불편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매일같이 엘라마와 다른 두 과장 사이에 날 선 조롱이 오가는 건 물론이고, 심지어는 가혹한 욕설마저 들려 오는 로비.
“또 싸우고 있군.”
“냅둬. 원데이 투데이도 아니고.”
오늘도 서로 잡아먹으려 드는 세 베테랑들을 지켜보며 김지안과 아이작은 퇴근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서둘러 시재 점검과 다른 작업을 마친 둘은 간단하게 인사만 던지고는 도망치듯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어어… 단 거… 주려 그랬는데.”
사탕을 가져와 김지안에게 건네려던 출장소의 유일한 창구 상담사 플루토는 뻗었던 손을 거둬들였다.
“하아….”
직원용 통로로 빠져나가는 두 대리의 뒷모습을 주시하며 플루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퐁!
-펑!
그녀가 권능을 거둬들이자 멀리서 빈둥거리며 본체를 바라보던 분신들이 분홍색 안개로 화해 흩어졌다.
“고생했어! 먼저 갈게! 머머리!”
플루토는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말투로 엘라마에게 소리치고 통로로 향했다.
-퍽!
뒤에서 서류철이 날아왔지만, 미리 예상하고 있던 듯이 고개를 숙여 가볍게 회피.
“앗싸 퇴그으은…!”
마침내 건물 밖으로 나온 플루토가 고양이처럼 몸을 쭉 늘리고 기지개를 켰다.
바닷바람에 분홍색 보브컷이 찰랑거리는 모습은 지나가던 이들의 눈길을 끌 정도로 인상적인 것이었다.
플루토의 미소는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에게서 다양한 감정을 끌어내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창구에 앉은 그녀와 분신의 웃음을 마주한 고객들은 성별과 관계없이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곤 했다.
은행에 불만을 품고 찾아온 이들도 플루토의 미소 앞에선 차마 인상을 찌푸리지 못하고 조곤조곤 상담만 마치고 돌아갈 정도였으니까.
그녀가 아직도 타인에게 ‘존댓말’을 쓰는 데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대부분의 경우 반말로 응대하고 있는데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었다.
아마도, 플루토를 직접 뽑은 출장소장 엘라마나 그녀의 가족 말고는 불가능하리라.
“하음. 이따 장이나 보러 갈까.”
막상 당사자인 플루토는 타인의 시선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늘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해 왔다.
존댓말 같은 건 살면서 해 본 적이 없었고.
즐겁고 재미난 걸 찾아 수많은 분신을 만들어 모든 차원을 거닐었다.
지금도 플루토는 분신을 여럿 만들어 고객을 응대하다 스트레스가 쌓일 경우, 실시간으로 분신을 생성해 쇼핑을 보내거나 카페에 가서 단 걸 먹게 하는 식으로 이를 상쇄하고 있었다.
그 어떤 일이든, 그녀는 자기 자신과 기억 그리고 감정을 공유하는 분신을 만들어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집안은 부유했고, 강대한 영향력 역시 지니고 있었다.
고로, 플루토의 삶을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오로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아온 인생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는데.
유독, 은행에서 일하게 된 것만은 유일한 예외라 할 수 있었다.
플루토의 친언니는 집에서 빈둥대는 그녀에게 무언가 경제 활동을 시작하도록 강요했고, 어쩌다 보니 차원신용금고의 비정규직 창구상담사가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썩 이 일이 즐겁지만은 않았지만, 이젠 자기 손으로 번 월급으로 맛있는 것도 사 먹으며 삶의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가고 있는 플루토였다.
“다녀왔습니다.”
오늘도 플루토는 버스를 타고 혼자 사는 투룸 월셋집으로 귀가했다.
그녀는 나름 식도락이라고 할 수 있는 삶을 살아왔기에, 중간에 들른 마트에서 고른 식재료는 하나같이 신선하고 보기 좋은 것들이었다.
최근 플루토는 퇴근 후에 요리를 만드는 것을 소소한 삶의 낙으로 삼고 있었다.
집을 떠나 홀로서기를 시작한 지 이미 몇 달이 지났지만, 직접 음식을 만드는 일은 전혀 질리지 않았다.
“흥흐흥~”
콧노래를 부르며 야채를 냉장고에 정리한 플루토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고.
“집 안 꼴이 말이 아니구나.”
모르는 사이 손님이 찾아와 있었다.
플루토는 안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짧은 백발의 미녀와 마주했다.
하지만 플루토는 당황하는 일 없이 눈앞의 상대에게 말을 걸었다.
그곳에 있는 건, 여태껏 기나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질릴 정도로 마주한 가족의 얼굴이었기에.
“뭐야. 올 거면 연락해 두지 그랬어.”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린 여인은 바로 차원신용금고 은행장.
“오커스 언니.”
플루토 디스파테르의 유일무이한 혈육, 오커스 디스파테르.
친언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