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49화
범차원 세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6-2차원.
수많은 종족들이 모여 사는 경제 대국 그레이트후리텐.
한 달 후에 있을 대형 연휴를 앞둔 4월의 주말, 오전 7시.
상당수의 직장인이 피곤한 주중의 업무를 마치고 맞이한 토요일엔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지만.
여느 때와 다름없는 시간에 기상한 소수파들은 우연히 컴퓨터와 TV를 켰다가 생각지도 못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콜로서스 로보틱스의 입체 기동 로봇의 크라우드 펀딩, 금일 론칭 예정.]
[화제의 크라우드 펀딩, 개시 시각은? 금일 정오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애디즈에서―]
[0.1차원 태양계를 구할 마지막 기회. 지금 즉시 동참하십시오.]
기사에 첨부된 동영상 스트림 사이트의 주소는 불길처럼 인터넷 세상에 퍼져 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뭐야 이거.]
[광고가 아닌 거 같은데?]
[딱 봐도 영화 티저잖아.]
[개소리하지 마. 크라우드 펀딩 홍보 영상인데 무슨 영화 같은 소리.]
업로드된 건 나노이인들이 사용하는 초소형 고성능 드론으로 촬영한 콜로서스 제작과 시험 기동 영상이었다.
그리고 영상에 등장하는 생산 설비와 로봇의 디자인은 뭇 사내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 정도로 멋들어진 것이었으니까.
[와 씨… 쌌다.]
[로봇 퀄 개쩐다잉.]
[누구 디자인이냐.]
[스포츠카가 두 발로 살아 움직이면 이런 느낌인 거 같음.]
[아니 왜 실전에서 사용될 애들을 이렇게 멋있게 만듦.]
[아까워서 어떻게 출격시키냐….]
[나노이 사람들한텐 거대 로봇인데 우리 입장에서 보면 진짜 그냥 프라모델 사이즈네.]
[하나 사서 집에 두고 싶다 ㄹㅇ루다가ㅋㅋㅋ]
[구매 ㄱㅈㅇ!!!!!]
사람들은 영상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에 감탄했다.
콜로서스의 비주얼, 카메라 워크, 음악, 편집까지 전부.
모든 것이 완벽 그 자체.
[내레이션 들어간 거 보니 다큐멘터리 예고편이네.]
[크라우드 펀딩 소개 페이지에 왜 이런 고퀄 영상이 있는겨.]
나노이의 위기를 틈타 돈을 벌려는 사기꾼들을 욕하러 영상을 클릭한 사람들조차 어느샌가 영상미에 빠져들어 끝까지 시청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들은 ‘돈이 많이 들었다’라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퀄리티를 자랑하는 홍보 영상의 끄트머리에서 익숙한 이름들을 발견했다.
[스탭롤 실화임?]
스탭롤 혹은 엔딩 크레딧.
영화나 드라마, 게임 등의 매체가 끝나며 나오는 제작진 명단을 뜻하는 단어.
그리고, 영상의 엔딩 크레딧엔 몇몇 눈에 띄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제작: 베르게네프 매스터한트]
로렐트리의 거장 매스터한트 감독.
[여기서 매스터한트 감독이?]
[베동님 등판시키는 인맥 대체 무엇ㅋㅋㅋㅋㅋ]
그리고 통칭 ‘매스터한트 사단’이라 불리는 로렐트리 최고봉의 프로들 중 배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인원의 이름이.
[브금 어디서 많이 들은 느낌인데.]
[…잘못 들은 거 아니지?]
귀가 밝은 몇몇은 영상의 배경에 흐르던 음악이 누구의 것인지 눈치챘고, 그 추측은 크레딧에 표시된 이름을 보고 확신으로 변했다.
[판스 짐메르만 머선129]
[여덟 소절밖에 안 들었는데 벌써 가슴이 웅장해진다….]
[거장이 왜 광고 음악 만들고 있는 건데ㅋㅋㅋㅋㅋ]
그중엔 베르게네프 매스터한트와 오랫동안 일해 온 영화 음악의 거장 ‘판스 짐메르만’ 역시 있었다.
[뭔 상황이냐 대체 이건ㅋㅋㅋㅋ]
[꼴랑 3분짜리 티저에 베르게네프 사단을 태워?]
업계 최고봉의 몸값을 자랑하는 베테랑들의 솜씨.
모두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근데 저 회사 문제 있다 그러지 않았냐?]
[괜히 엮였다가 감독님 나락 갈까 걱정되는데.]
[왜? 뭐가 문젠데? 0.1차원 구하려고 저러는 거 아닌가.]
다만, 영상을 본 이들 중엔 무언가 꺼림칙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저번에 탐사보도 PD노트에서 의혹 제기했잖아. 안전한 곳으로 건너와서 돈만 모아 먹튀하려는 놈이 뻔해.]
[자기 고향의 위기를 틈타 한탕 하겠다는 거야?]
[여태껏 잘 지켜 온 커리어 하수구에 버리게 생겼네. 왜 저런대.]
조금의 리스크도 없이 우주 괴수와 0.1차원을 같이 날려 버리려는 이들의 선동에 넘어간 사람의 숫자는 적지 않았다.
그들은 콜로서스 로보틱스가 모든 차원을 상대로 거대한 사기극을 꾸미고 있는 거라고 주장했다.
[생각해 봐. 로봇 만들 돈 모자란다는 놈들이 어떻게 매스터한트 사단을 통째로 불러왔겠냐고.]
[말 되네.]
어지간한 비용 갖고는 부를 수 없는 기라성 같은 프로들이 고작 광고 영상 찍는 데에 동원된 사실이 사람들의 의심을 더욱 부추겼다.
논란이 거세짐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매스터한트 감독의 SNS 계정에 댓글을 남기거나 메시지를 보내 그가 사기에 연루될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어째 답글 하나 안 달아 주냐.]
[답답해 죽겠네.]
[짐메르만도 말이 없네.]
[그 인간은 작업물 낼 때 말고 핀스타 안 하잖아 이 화상아.]
사람들의 불안감은 고조되어 갔지만, 여전히 대답이 없는 감독과 스태프들.
그렇게 맞이한 오전 10시.
베르게네프 감독이 움직였다.
[방금 베르게네프 감독 핀스타에 세이브 나노이 태그 달고 글 올림ㅋㅋㅋㅋㅋ]
[리바이 사우 샤라웃 했네.]
[?????????????]
[그, 자칭 나노이 행성 의회 전권 대리자?]
[사기꾼이라며, 그 여자.]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주기적으로 온갖 추잡한 사건이 터지는 로렐트리.
그곳에서 지내면서도 지난 수십 년간 단 한 번도 스캔들이나 범죄에 연루된 적이 없어 깨끗한 영화인의 대명사라 알려진 매스터한트 감독이.
평소라면 손도 대지 않았을 3분짜리 광고 영상을 제작했을 뿐만 아니라, 사기꾼의 꼬리표가 달린 리바이 사우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플랫 샤펜도라가 제일 비싼 패키지 산대.]
[아니, 나노이 돕고 싶으면 후원하면 되지 왜 저딴 사기꾼들한테서 로봇을 사….]
[플랫 후원 진즉에 했잖아 멍청아ㅋ]
[아ㅋㅋㅋ 맞네ㅋㅋㅋ]
감독만이 아니라 그와 친분이 있는 정‧재계, 체육계의 셀럽들이 잇따라 나노이를 구하자는 발언을 SNS에 쏟아 내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들 중 대부분은 크라우드 펀딩에 참여할 예정이라고 선언하며 링크를 공유하고 있었다.
바이럴, 이라고 하기엔 과할 정도의 열기.
마케팅 업계에서 일하는 이들은 10초도 걸리지 않아 결론을 내렸고, 이내 합리적인 주장을 시작했다.
[바이럴 같은 게 아니야. 저 사람들 죄다 한마디씩 하게 만들려면 회사 기둥뿌리 뽑아도 모자라.]
[애초에 광고 영상 하나에 매스터헌트 사단 총출동한 게 말이 안 되지.]
[매스터한트가 직접 굴리는 회사가 아니면 불가능하고, 만일 그게 맞아도 실패했다간 적자 나고 이미지까지 말아먹을 수 있는 규모의 마케팅이야.]
[저 사람은 감독 겸 프로듀서인데 코스트에 민감한 직종의 인간이 저런 일을 직접 벌일 리가 없지.]
[그럼….]
[자발적 참가?]
직장인 익명 게시판은 당혹스러워하는 업계 관계자들의 목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 나 무서워….]
[그냥 평소처럼 감성팔이 위선자짓 하는 거 아니냐?]
[우리 오빠가 나노이 사람들 돕자는데 이게 그렇게 나쁜 일임?]
[그게 아니라 사기꾼을 돕고 있는 게 문제잖아.]
[어쩌면 리바이 사우가 사기꾼이 아닌 데에다 우리가 모르는 걸 쟤네가 아는 걸지도 모르지.]
평소부터 클린한 이미지로 널리 알려진 유명 인사들이 차례차례 베르게네프 매스터한트를 따라 콜로서스 로보틱스를 지지하는 발언을 시작하자, 여론은 빠르게 크라우드 펀딩에 참여하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뭐, 진짜로 나노이를 돕든 아니든 상품 자체가 꽤 고퀄 같으니 하나쯤 구매해 보는 것도….]
[이만한 규모로 일 벌여 놓고 먹튀하진 않겠지.]
[나노이 생각 안 해도 그냥 진짜 여름에 모기 퇴치하는 용도로 사도 좋을 듯ㅋㅋㅋㅋ]
[집사람 몰래 사야겠네요ㅎㅎ …메카만 보면 어릴 적 추억이 새록새록… 차 트렁크에 고이 소장해 두고 낚시 갈 때마다 꺼내서 감상해야겠습니다.]
끝없이 올라가는 영상 조회 수.
나노이인들의 생존을 바라는 이들도, 그들에게 별 관심이 없던 이들도, 로봇의 디자인에 끌려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에 가입했다.
<이 전쟁이 끝난 다음, 콜로서스 로보틱스사는 모든 기체를 회수해 전부 수리한 다음 펀딩 참여자분들의 집으로 보내 드릴 예정입니다.>
<나노이가 보유한 로봇 공학의 정수인 콜로서스는 저희를 도와주신 영웅인 여러분들께 기념품이자 훈장이 되어 줄 것입니다.>
<슈퍼 얼리버드 D 패키지 이상의 금액을 후원하신 분께는 2기 이상의 콜로서스가 합체 가능한 파이널 퓨전 프로토콜 AI를 동봉 예정입니다.>
물론, 그중엔 시세 차익을 노리고 투기 목적으로 펀딩에 참가하려 하는 이들도 존재했다.
[아니ㅋㅋㅋ 세상을 구하고 로봇도 얻을 수 있는데 왜 돈을 아끼냐고ㅋㅋㅋㅋ]
[근데 그거랑 별개로 이거 전쟁만 무사히 끝나면 개떡상할 거 같지 않음? ㅋㅋㅋ]
[당연한 소릴. 소장 가치 있다 이거. 실제로 움직이는 데에다 전투 참가한 다음 배송되는 건데.]
[띠부띠부 씰 같은 거 사서 모을 때가 아니야 멍청이들아!!]
[주식 X까! 다 빼서 몰빵 간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20배만 가즈아~!!!]
콜로서스는 나노이 사람들에겐 거대 로봇일진 몰라도 다른 차원 사람들에겐 손바닥보다 조금 큰 사이즈의 프라모델과 다를 바가 없다.
게다가 디자인이 훌륭하고 우주 괴수와 다른 해충을 제거하는 유용성까지 갖추고 있다.
그뿐만인가.
발표에 따르면 각각의 콜로서스는 전투에 실제로 투입된다고 한다.
우주 괴수와의 전쟁에 승리한 다음은 말끔히 수리되어 외부 카메라의 영상과 함께 배송된다고 하지 않는가.
‘수집품’으로서 높은 값어치를 지닌 콜로서스에 0.1차원을 구했다는 역사적인 가치가 더해지는 것이다.
심지어 희망자는 외부 장갑의 손상을 그대로 두고 내부만 수리한 ‘빈티지 에디션’을 수령할 수 있다고 하니, 컬렉터들 입장에선 군침이 돌 수밖에 없었다.
구매에 필요한 명분과 예술성, 실용성 등 모든 요소를 충족하고 있는 궁극의 상품.
프라모델 덕후들은 죽어가는 차원을 구매하기 위해서라며 떳떳한 이유를 내세우고 카드를 긁었고, 농가는 새로운 해충 제거 시스템 구축을 위해 구매를 검토했다.
아트 컬렉터와 예술품 투자가들 역시 기존 수집품의 범주를 뛰어넘은 콜로서스의 가능성에 주목해 리서치를 시작했다.
남자라면 누구나 가슴이 뜨거워지는 소장품.
자신만의 슈퍼 로봇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 2차 판매로 큰 수익을 남기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부푼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펀딩 참여를 결심했다.
[리바이 사우 박사, “우리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
[시사평론가 마데이라 바칼리의 주말 칼럼: 리바이 사우-나노이의 구원자인가, 간교한 사기꾼인가.]
사실 남성층의 구매 의욕이 폭발한 데엔 리바이 사우 박사의 미모 역시 한몫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녀를 공대 여신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결제 태도를 바르게 하겠나이다….]
다만, 아무리 나노이를 살린다는 대의명분이 있다 해도 수많은 여성들은 자신의 남자친구 혹은 남편이 움직이는 로봇 피규어를 사는 걸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현기증 나… 남자들 몇 살인데 정신을 못 차리고 저러나.]
[저 돈 주고 애들 장난감 사고 싶나 진짜.]
[아니 나노이를 돕고 싶으면 그냥 후원을 하든가.]
[움직이는 이족보행 로봇이 로망이니 뭐니, 키덜트 존나 많아서 문제.]
[가격 봐 미친ㅋㅋㅋ 두 개 살 돈이면 여친이랑 바캉스 갈 수 있겠다ㅋㅋㅋ]
[남자들 진짜 이해 안 가네… 왜 저렇게 철이 안 드는 거지.]
당연한 얘기지만 로봇이나 메카에 로망을 품는 건 대부분이 남자.
그것도 평소 프라모델을 모으거나 관련 애니메이션과 영화를 즐기는 키덜트층에 국한된 이야기.
상당수의 여성들은 대부분 이번 크라우드 펀딩에 이렇다 할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애디즈의 ‘세이브 더 나노이-콜로서스 오너 펀딩’ 기획, 거대 홈쇼핑 채널 포르테 스토어와 깜짝 파트너십 공개 후 연계 판매.]
[유례없는 판매 전략에 업계 관계자들은 충격을 받는 중.]
[콜로서스 로보틱스 측은 크라우드 펀딩과 홈쇼핑, 각각 다른 혜택을 준비 중이라고 밝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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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테 스토어, 금일 오전 11시 황금 연휴 전용 키키와이 여행 초특가 패키지 판매 예정.]
[7성급 호텔, 더 래리어티 키키와이 숙박권과 항공권을 합친 패키지.]
[관계자에 따르면 가격은 시세의 10% 이하.]
[프로그램 후반에 소개되는 특별 상품과 함께 구매하면 추가 혜택이?]
김지안의 부탁으로 아이작과 래리어트 그룹이 준비한 비밀스러운 특별 패키지의 정보가 공개되자 홈쇼핑 채널에 여성 고객들의 문의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모두의 심금을 울린 크라우드 펀딩과 홈쇼핑 사상 최고의 걸작이 세상에 드러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