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48화
키키와이.
우주 괴수와 함께 나노이를 멸망시키려 하는 강경파 집단의 어용 깡패들이 묵고 있던 호텔 지하 주차장.
사내들은 사우 박사와 그 부하들이 묵고 있다고 알려진 더 래리어트 키키와이를 향해 출발하려 하는 중이었다.
트렁크에 넣어 둔 건 일반적인 지성체의 몸에 거의 무해한 극소량의 독극물.
이를 나노이인들이 묵고 있는 객실에 살포하면 별다른 증거를 남기지 않고 저들을 죽일 수 있다.
고도로 발달한 과학 기술을 다룬다고는 해도 비행선인지 우주선 밖에 나와 쉬고 있다면 문틈을 통해 들어온 극약 성분에 순식간에 사망하고 말 터.
“고향이 위태롭다면서 주말이라고 느긋하게 호텔에서 쉬고 있으면 혼날 만하지.”
“자, 이제 벌레들 잡으러 갈 시간이다.”
낄낄대며 차에 올라탄 사내들은 곧바로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물론, 차 안에서 가짜 수염이나 마스크로 변장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깔끔하게 처리한 다음 휴가나 즐기다 돌아가자고.”
“당연하죠.”
가장 중요한 건 두 가지다.
증거를 남기지 않는 것과 그들에게 돈을 쥐여 주는 거물 정치가가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것.
굳이 비싼 암호 통신 장비까지 사용해 가면서 연락을 취한 건 이를 위해서였다.
24시간 동안 3교대 체제를 유지하며 전파 납치 임무를 수행하던 것도 오늘이 마지막.
나노이의 잔당을 소탕하면 넉넉한 보수와 편안한 생활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출발해.”
기분 좋은 고양감이 가득한 차내. 운전수가 액셀을 밟았다.
지하 주차장을 나와 질주하는 12인승 밴.
목적지인 더 래리어트 키키와이는 섬의 반대편에 있다.
도착할 때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있으니 눈이라도 붙이자는 우두머리 격 사내의 제안에 운전수를 제외한 전원이 후방 좌석을 한 줄씩 차지하고 드러누웠다.
그리고 교차로를 지나는 순간.
-콰앙!!
오른쪽에서 달려온 8톤 트럭이 밴의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끼이이익!!!
차도 위에 기다란 스키드 마크를 남기며 미끄러지던 밴은 이내 중심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다.
“으그악….”
사내들은 내장이 찌부러지는 것만 같은 고통을 견디며 밖으로 기어 나왔다.
사망자는 0.
하지만 모두 어딘가 한 군데씩 부러진 듯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유일하게 안전띠를 매고 있던 덕에 비교적 상처가 얕았던 운전수만이 간신히 밴 밖으로 기어 나와 사고를 낸 트럭을 향해 비틀대며 걸어갔다.
“개 같은 새끼가! 사고 냈으면 대가리를 박아야 할 거 아니야!! 당장 튀어나오지 못해?!”
찌그러진 트럭 운전석을 들여다보았지만 그곳에 사람의 모습은 없었다.
핸들에 달린 주먹만 한 기계만이 트럭이 원격으로 운전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었을 뿐.
-푸슉
“아.”
그리고 다음 순간, 목에 느껴지는 따끔한 통증.
반사적으로 손을 가져다 대자 부드러운 털실과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뽑아서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이런 씹―”
-털썩
마취제가 담긴 주삿바늘이 날아와 차례대로 일행의 목덜미에 꽂혔고, 그들이 모두 잠들기까진 채 1분이 걸리지 않았다.
[타깃 침묵. 수송팀 작전을 개시하라.]
멀리서 화면을 통해 모든 것을 지켜보던 비슈티가 지시를 내렸다.
이윽고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사고 현장에 도착한 구급차 수 대.
타고 있던 구급대원들은 재빨리 사고 현장에 널브러진 ‘환자’들을 들것에 태워 차에 싣고는 처음 나타났던 것처럼 신호를 무시하고 쏜살같이 현장을 떠났다.
잠시 후.
뒤늦게 ‘진짜’ 구급대원들이 도착했지만, 도로 위에 남아 있는 건 망가진 차량 두 대뿐.
그리고 앞서 출발한 구급차가 향한 곳은 병원이 아닌, 어두운 굴다리 아래에 설치된 아공간 특수 격납고의 입구.
바로, 비슈티 과장이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 현판식의 주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본토에서 공수해 온 물건이었다.
-촤악!
“으프우으읍!”
가짜 구급차에서 끌려 나온 사내들의 얼굴에 물벼락이 쏟아졌다.
마침내 전파 납치범들과 마주한 미노타우로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욕심에 눈이 먼 아마추어들 탓에 군인이 희생당해선 안 되는 법이오. 그들의 목숨은 더욱 값진 목적을 위해 존재하니까.”
복면을 써 얼굴을 가렸고, 음성 역시 변조되고 있던 탓에 사내들은 비슈티에 관해 아무런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그저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끊임없이 시뮬레이션하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사방에서 자신들에게 겨눠진 총부리가 두려워 반항할 수도 없는 상황.
갓 마취에서 깨어나 의식이 흐릿한 와중에도 포로들은 납치범을 설득하는 것 말고는 이렇다 할 선택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디서 정보가 새어 나간 건지 도저히 짐작도 가지 않았다. 어쩌면 호텔에 둔 전파 송수신 장치 탓에 자신들의 위치가 노출된 걸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내부자의 배신이거나.
어느 쪽이든 어쩌다 발각된 건지 당최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사실 그것보다 궁금한 건, 상대가 무슨 의도를 갖고 자신들을 납치했느냐다.
일단, ‘희생당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데에다 자신들을 이곳으로 끌고 온 거로 보아 복면을 쓴 사내가 누구의 편을 드는지는 쉬이 짐작이 갔다.
“나노이의 협력자냐?”
“그렇소.”
“그 자식들 네 눈에 보이긴 하냐고! 어지간한 벌레보다 작은데 같은 사람 취급을 해 줘야 하냐 이 말이야! 그놈들을 살려 뒀다간 우리까지 죽어!”
이건 대의를 위한 선택이니 방해하지 마라.
약 기운에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아 그런 뻔한 이야기 말고는 꺼낼 수가 없었지만, 사내들은 애써 비슈티에게 자신들의 정당성을 늘어놓았다.
“그대들의 눈엔 고향을 위해 싸우는 용맹한 젊은이들이 하찮은 벌레만도 못한 존재로밖에 비치지 않는 거로군. 잘 알겠소.”
무덤덤한 말투로 대답을 마친 비슈티가 손짓하자 곁에 있던 부하가 리모컨을 조작했다.
-쾅!
천장에서부터 떨어져 내린 두께 20cm의 강화 플라스틱 케이지가 전파 납치범들을 가뒀다.
“뭐 하는 짓이야!”
물 샐 틈조차 남지 않도록 접지면에 수지를 발라 틀어막는 위장복 차림의 군인들을 본 사내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케이지에 난 유일한 구멍은 직경 5cm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곳에는 투명한 파이프가 연결되어 있었다.
자신들이 나노이 사람들에게 하려 했던 것처럼 독가스를 흘려보낼 생각일까 추측하던 와중, 어딘가에서 시끄럽게 앵앵대는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25차원이 한창 전쟁으로 피폐해지던 시절의 이야기오.
일손이 모자라 한 명의 장교가 다양한 일을 맡아야 했소.
낮에 적을 죽이고, 밤에 포로를 심문했소. 반대인 날도 많았지만.”
“…심문?”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사내들이 움찔거렸지만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미노타우로스는 그대로 말을 이어 갔다.
“말이 좋아 심문이지. 전쟁터에선 정보를 캐내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법이오. 사람들은 보통 고문기술자, 라고 부르더군.”
어느샌가 그의 음성에 형용하기 어려운 비애가 묻어나오기 시작했다.
“적군은 독재자의 밑에서 싸우는 군인이었고, 그들은 주어진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소.
그들은 혼자 벙커에 숨은 지도자를 증오했지만 군사 시설의 위치를 알려 주지 않았소. 동료를 팔아넘길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
“그는 고문 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소. 명예를 아는 적이었지. 우린 장례를 치른 다음 시체를 고향으로 돌려보냈소.”
미노타우로스가 바닥에 놓여 있던 금속제 케이스를 열어 내용물을 꺼냈다.
안에 든 건 강화 유리로 만든 큐브. 내부에선 익숙한 형태의 생명체가 요란하게 날개를 진동시키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25차원 에라스무스의 군사 독재 정권은 다른 차원으로 도망간 정적을 암살하기 위해 유전자 조작으로 끔찍한 생명체를 만들어 냈소.
관리 소홀로 알을 밴 암컷이 실험실에서 탈출해 다른 차원으로 흘러간 모양이지만.”
케이지에 갇힌 사내들의 시선이 큐브 안에 든 벌레, 아니, 우주 괴수에 고정되었다.
“미친.”
키키와이로 건너오기 전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로 들었던 브리핑 내용이 머릿속에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아, 아냐. 안 돼.”
눈이 하나밖에 없는 기괴한 벌레.
모기와 닮았지만 그 주둥이는 어지간한 방호복조차 가볍게 뚫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만에 하나 우주 괴수에게 물린 다음 혈청을 맞지 않을 경우, 서서히 전신의 혈액이 응고되어 사망.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는 고통은… 사람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다고 전해진다.
“본래는 배후에 누가 있는지 물어볼 생각이었으나 마음이 바뀌었소.”
-철컥
케이지에 달린 파이프에 큐브가 연결되자 출구를 찾던 우주 괴수가 맹렬한 기세로 관을 타고 사내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명예를 알지 못하는 쓰레기에게 보일 존중은 없소. 벌레의 상대는 벌레에게 맡기기로 하겠소.”
“잠깐!! 아는 건 뭐든 말할 테니까 제발 나만이라도 살려…!! 오지 마!!! 그만…!!! 이 씨발 으아아아!!!!”
비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비슈티 과장은 차분히 무전기를 들어 다음 타자에게 공을 넘겼다.
“나머진 맡길 테니 혈청을 주든 죽게 두든 마음대로 하시오.”
격납고 벽에 삐딱하게 등을 기대고 있던 프라이빗
뱅커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대 태우는 동안 살아남는다면 고민해 보는 거로 하죠.”
“…격납고는 금연이오.”
사실 라즈마를 비롯해 삶과 죽음의 경계가 오래전에 희미해진 구C 출신 뱅커들에게 있어 타인의 생사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하여튼 생자는 까다롭다니까.”
상대가 살았든 죽었든, 그들은 언제나 필요한 정보를 얻을 자신이 있었으니까.
* * *
오전 11시.
차원신용금고 다차원 출장소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김지안의 숙소.
혼자 살기에도 그리 넓다 할 수 없는 면적의 아파트인데, 오늘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김지안의 생활 공간이 모조리 없어진 건 아니다.
그의 집에 방문한 건 일반적인 크기의 사람이 아닌 유한 회사 콜로서스 로보틱스의 사원들이었으니까.
[결국 신세를 많이 지고 말았네요. 감사해요.]
사우 박사는 비행선에서 김지안의 엄지손가락만 한 사이즈의 홀로그램을 사출해 감사를 표했다.
“별말씀을요. 지저분한 방을 보여 드려서 민망할 따름입니다.”
김지안은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여자를 자신의 생활 공간에 들이는 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쑥스러움이 앞서고 있었다.
사우 박사 외에도 수천 명의 인원이 저 비행선에 탑승 중이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 대화 중인 건 그녀였으니.
[이 정도면 깔끔한 편 아닐까요? 최소한 제 방보단 훨씬….]
“아….”
김지안은 2030 독신 청년들의 방 꼬락서니가 대부분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떠올리고 쓰게 웃었다.
실제로 남의 방을 자주 본 적은 없지만, 밀라도 여자들 방이 의외로 지저분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으니 사실이리라.
-뀨…!
한편 김지안의 책상을 근거지 삼아 아기자기한 미니어처 숲을 만들어 낸 33차원 출신 정령들은 적극적으로 나노이 사람들과 교류하려 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과 그리 크기가 다르지 않은 비행선이나 사우 박사의 홀로그램이 신기한지 마냥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정령. 실존하는 생명체였군요. 마도공학 학계에서 6-2차원에 이 아이들이 사는 걸 알면 엄청 좋아하겠는데요?]
“그건 맞지만… 비밀로 해 주시면 좋겠어요. 얘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터전을 마련해 주신 분께 폐가 될 수도 있어서요.”
[아… 뭔가 사정이 있나 보네요. 좋아요. 그러죠, 뭐.]
사우 박사의 홀로그램이 털 뭉치 같은 바람의 정령에게 손을 내밀며 미소를 지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지안이 이들을 집으로 데려온 건 강경파 정치인들이 부리는 건달들의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엔 괜한 우려일까 싶었지만, 방금 비슈티에게 연락을 받고 생각을 바꿨다.
납치조가 붙잡은 이들의 목적이 사우 박사의 암살이었으니 결과적으로 나노이 사람들을 생산 기지와 호텔에서 피신시키는 판단은 옳았다.
일단 첫 습격자들을 역으로 납치해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알아냈다곤 해도 아직 방심할 순 없다.
비슈티가 상대한 놈들 외에도 나노이 사람들을 노리는 자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크라우드 펀딩과 연계된 홈쇼핑 방송에 사우 박사와 아프로가 출연할 때까지.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진실을 전한 다음 콜로서스가 완판되기 전까지.
넘어서야 할 고비가 아직 남아 있다.
“박사님.”
[네.]
“슬슬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우를 바라보며 김지안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자그마한 홀로그램과 눈높이를 맞췄다.
“최고의 쇼를 만들어 봅시다. 준비는 되셨나요?”
이제부터 시작되는 건 나노이를 구원할 계획의 대미를 장식하는 피날레.
[당연하죠.]
김지안이 내민 손에 사우 박사의 홀로그램이 주먹을 가져다 댔다.
“그럼, 아프로 씨와 감독님을 만나러 가 봅시다.”
소리 없이 떠오르는 비행선.
김지안과 수천 명의 연구원들은 키키와이섬 북쪽 해안을 향해 출발했다.
바야흐로 공순이와 은행원, 그리고 뼈군인이 만드는 엔터테인먼트가 모든 차원에 생중계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