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47화
과타노차가 전파 납치를 자행하는 이들의 위치를 밝혀내기 수 시간 전.
더 래리어트 키키와이 호텔 최고층, 1박에 수천만 굴덴을 호가하는 프레지덴털 스위트에는 두 사내의 모습이 있었다.
오로지 건물 안에 네 곳밖에 존재하지 않는 프레지덴털 스위트는 복층 구조로, 방에 존재하는 모든 기호품은 하나하나가 막대한 값어치를 지닌 것들이었다.
높은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와 대리석 바닥, 벽난로와 양탄자까지.
호사스러운 취향을 가진 상류층 투숙객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특별한 공간.
개중에서도, 일반 투숙객에게 공개되지 않는 11111호 객실은 다른 프레지덴털 스위트보다 한층 더 특별한 공간이었다.
전속 메이드와 셰프 등 다른 식솔들이 거주하고 있는 데에다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전용 승강기까지 있을 정도였으니.
이유는 간단했다.
이곳이 래리어트 그룹 오너와 그 가족들이 키키와이를 찾을 때 묵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
공항에서 자신이 초대한 ‘조력자’를 리무진에 태우고 돌아온 이 방의 주인.
아이작 래리어트는 위스키 잔을 들고 창가에서 밤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래리어트 그룹의 회장, 필립 래리어트는 자신의 손주인 아이작을 끔찍하게 아꼈다.
처음엔 그도 아이작이 은행원이 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막상 아이작이 6-2차원 그레이트후리텐의 1금융권 은행 차원신용금고에 취업해 출세 코스라고 알려진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에서 일하게 되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심지어 아이작을 발탁한 건 본점 기업여신부의 에이스이자 구D 파벌의 실세인 슬리크 엘라마.
회장의 정보망은 멀리까지 뻗어 있었기에 슬리크가 어떤 사람인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권위를 두려워하지 않는 실력 지상주의자.
행 내 파벌 융화를 바라는 구D의 우두머리인 행장이 가장 신뢰하는 부하.
그리고 구D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끔찍하게 싸워 대는 무투파 은행원.
여기서부터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아이작 래리어트는 오로지 실력만으로 차원신용금고의 전략 점포인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의 오프닝 멤버로 선발된 것이다.
‘할애비는 기쁘단다. 네가 은행원이 된다 했을 때 걱정 많이 했는데, 우리 손주 다 컸구나. 아이고 이쁘다.’
주책 섞인 말과 함께 회장은 아이작에게 더 래리어트 키키와이의 프레지덴탈 스위트룸 11111호를 내어주었다.
덕분에 아이작은 어릴 적부터 키키와이에 올 때마다 묵던 익숙한 방에서 지낼 수 있었다.
“의외네, 네가 은행원이 되어 있을 줄이야.”
아이작의 등 뒤, 거실 한복판에 놓인 큼지막한 소파에서 소리가 났다.
큼지막한 소파는 카펠리노 디 드리아데의 걸작으로 동물의 가죽 대신 33차원에서만 자라는 특수한 나무에서 벗겨 낸 껍질과 솜을 사용한 명품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걸터앉은 건 상쾌한 미소가 어울리는 젊은 사내.
매든 G 패러몽거.
고작 20대 후반의 나이에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을 창업해 업계의 총아였다.
“헛소리하지 마. 다 알고 있었으면서.”
아이작은 수년 만에 만난 대학교 동창을 돌아보고 말했다.
“당연히 알고 왔지. 동기들 사이에서 소문 쫙 났던데?”
“…….”
아이작은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매든을 가만히 주시했다.
이번에 매든을 부른 건 어디까지나 래리어트 가문의 일원으로서 ‘사업’을 논하기 위함이었지만, 예상대로 상대는 아이작이 요즘 뭘 하고 있는지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아마 연락을 마친 직후 곧바로 동기들에게 이것저것 물었을 터.
하지만 딱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예전부터 매든은 한결같았다.
호불호가 갈리지 않고 누구에게도 미움받는 일 없이 매일 생글생글 웃으며 모든 곳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도움을 받는 남자.
녀석은 뭐든지 알고 있었고, 언제든 도움을 구하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집이 부유한 것도, 성적이 특출난 것도, 외모가 수려한 것도 아니지만 놈은 흔히 말하는 인싸.
그중에서도 특히나 발이 넓고 좋은 안목을 갖춘 녀석이었다.
친화력과 공감 능력이 강하고, 누구에게나 좋은 인상을 주는 흔치 않은 인재.
매든은 이러한 성격을 살려 다양한 스타트업 기업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고객과 판매자의 두 가지 입장에 이입해 상품의 장점을 분석한 다음은 플랫폼에 소개.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해 막대한 수수료를 벌어들이고 있었다.
그런 젊은 거물이 기꺼이 아이작의 부름에 응해 새벽 비행기를 타고 키키와이로 날아온 건, 둘이 학창 시절에 꽤나 가까이 지냈던 까닭이었다.
절대 불평 따윈 할 수 없는 상황.
아이작은 오히려 바쁜 와중에 마다하지 않고 시간을 내준 그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은행원이 되었다고 듣고 놀란 건 사실이라고.”
“어째서지?”
잠시 뜸을 들이다 이어진 매든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아이작은 곧바로 되묻고 말았다.
대학을 나오면 취업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싶었기에.
“래리어트 그룹에서 커리어 시작할 줄 알았거든. 지금쯤이면 초고속 승진해서 부장님 소리 듣고 있으려나 했더니…. 설마 은행에 들어갈 줄이야. 예상 못 했어.”
과연 그런 이유였나.
“…한 번쯤은 내 손으로 쟁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머리에 달린 고양이 귀를 까딱대던 매든은 미소 띤 얼굴로 아이작을 주시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너다운 선택이야. 훌륭해.”
“흠.”
이번엔 아이작이 쓰게 웃었다.
같은 나이에, 자신보다 한참 가진 것이 없던 친구는 어느샌가 몸뚱어리 하나로 많은 것을 이뤄냈다.
그에게 훌륭하단 찬사를 들었을 때 왠지 모르게 뿌듯함이 느껴질 정도로.
언젠가 크게 될 녀석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 남자의 자산 규모는 여전히 자신보다 한없이 적었지만.
그는 아이작에게 없는 것을 갖고 있었다.
예전부터 매든의 앞에 설 때마다 아이작은 가진 게 래리어트의 핏줄과 돈 말곤 없는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지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가문의 후광을 내려놓고 오직 능력으로만 판단받는 키키와이 출장소에서 일하는 지금.
아이작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떤 부분에 특출난 능력을 발휘하는지 확실하게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는 지난 몇 주 동안 스스로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알아가며, 입행 동기인 김지안이 이뤄낸 쾌거를 목격하며, 계속해서 업무 능력을 갈고닦아 왔다.
선배 행원들에게서 끊임없이 배우며, 김지안이 해낸 것처럼 자신만의 무기를 날카롭게 벼려냈다.
결과, 아이작은 오직 래리어트 가문의 일원으로만 살아가던 시절에는 느낄 수 없던, 실존의 감각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래리어트 가문의 아이작이 아닌, 아이작 래리어트라는 자기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더욱 뚜렷하게 획득해 낸 것이다.
그렇기에 아이작은 예전엔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꺼렸던 가문의 인프라 역시 은행 업무에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엄격한 규율로 통제받는 래리어트 가문의 막내라면 감히 엄두도 못 낼 일.
하지만 이미 자기 자신에게 한 명의 남자로서 ‘자격’을 증명한 아이작 래리어트는 오만해지거나 비굴해지는 일 없이 가문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동안 외면하던 래리어트 가문의 아이덴티티 역시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일 정도로 아이작이라는 개인의 그릇이 크고 견고해진 까닭이었다.
“그래서, 날 부른 이유는 언제 설명해 줄 건데?”
마침내 본론으로 들어가길 청하는 친구의 물음에, 아이작은 대답 대신 몇 장의 서류를 건넸다.
이 제안서에는 0.1차원 태양계를 구하는 계획이 적혀 있었다.
“…이건.”
서류를 읽고 경악한 매든을 보고, 아이작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집안 어르신들의 눈치만 보던 과거의 자신이었다면 불가능했을 짓을 겁도 없이 벌인 보람이 있었다.
예전부터 놀라게 하는 건 언제나 매든이었기에, 그를 놀라게 하는 데 성공한 아이작의 성취감은 두 배로 컸다.
“크라우드 펀딩으로 승리로 이끈다 이건가.”
“정확해.”
“적이 지성체가 아니어서 가능한 일이군.”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의 은행원들이 세운 계획은 단순했다.
첫째.
0.1차원에서 날아오는 모든 신호를 납치하는 자들의 위치를 추적해 무력화시킨다.
이를 위해 비슈티는 군인 시절의 부하들을 불러냈고, 김지안은 전파 탐지에 적합한 과타노차를 데려왔다.
그리고 둘째.
아이작과 라즈마가 유리해진 전세를 몰고 그대로 판을 뒤집는다.
아이작이 맡은 일은 자금 조달이었고, 그에겐 이를 스무스하게 처리할 인맥이 있었다.
“크라우드 펀딩 페이지에서 자금을 조달함과 동시에 또 하나의 목적을 이룬다 이건가. 매스터한트 감독이 온 건 이걸 위해서였나.”
“네 말대로다.”
“비상식적이야. 누구 계획인진 몰라도 크라우드 펀딩에 대한 이해도가 전혀 없는 건 분명해.”
곧바로 나온 부정적인 반응.
당연하다.
하지만 아이작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매든이라는 남자가 이런 걸 봤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런 거였으면 더 일찍 알려줬어야지. 당장 준비해도 시간이 모자랄지도 몰라. 서둘러야겠어.”
매든은 이런 말도 안 되는 걸 너무나도 좋아하는 녀석이었으니까.
역시나 괴짜인 건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
“어디 보자. 특설 페이지 오전 내로 준비하려면…당장 직원들 불러야겠네. 매스터한트 감독이 왔다는 건 영상은 알아서 준비해준다는 거지?”
“당연한 소릴.”
“좋아. SNS부터 시작해서 소문 쫙 돌려 보자고. 안 사고는 못 배기게 만들 테니. 참, 남자 고객만으론 모자라. 여성 고객에게 어필할 방법도 찾아봐야겠어.”
“방법이라면 생각해두었다.”
“어떤 거?”
빠른 손놀림으로 스마트폰을 조작하던 매든이 예고 없이 고개를 홱 돌리고 물었다.
“나만 할 수 있는 거.”
“…그게 무슨 소리야.”
아이작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매든에게 자신이 준비한 방법을 알려주었다.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의 은행원 중, 오직 그에게만 가능한 궁극의 한 수를.
“…할아버지, 아니 회장님 허락은 받았고?”
“그룹 이미지가 좋아진다고 찬성하셨다. 오랜만에 웃으시더군.”
매든은 딱 한 번 만나본 아이작의 할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린 듯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만, 조부가 자주 웃을 것처럼 생긴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아이작도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언제 이런 일까지 꾸밀 수 있게 된 거야, 너.”
“글쎄다. 요즘 영향을 조금 받아 버려서.”
“누구한테?”
“그런 놈이 있다, 동기 중에.”
“오.”
“말도 안 되는 짓만 벌여 대는데, 그걸 결국엔 해내는 녀석이.”
“대학? 나?”
위스키. 알코올이 돌기 시작해서일까.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피식
“뭐야. 갑자기 왜 웃고 그래. 기분 나쁘게.”
“…….”
아이작이 보기에 분명 둘은 닮아 있었다.
매든과 김지안이 마주치면 어떤 그림이 나올지 조금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너 말고.”
가진 것 하나 없이 나타나 자신을 계속해서 놀라게 하는 라이벌들.
저들과 나란히 달릴 수 있다면.
“직장에 있어. 하나.”
더욱 멀리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