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46화

키키와이 차원 공항, 도착 층.

“400만 굴덴.”

과타노차와의 재회는 최악이었다.

“일급, 400만 굴덴.”

“아 선생님 그러지 마시고 제발 좀….”

“400만 굴덴.”

급거 본점 근무를 마치자마자 야간 비행으로 린딘에서 날아온 과타노차는 몹시나 기분이 좋지 않았다.

“비즈니스 타고 왔잖아. 수당 추가로 본점이 준다는데 이제 그만 일 좀―”

“400만.”

“…….”

김두한과 마주한 미군 양반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내가 예산 내는 것도 아닌데 나한테 그런 얘길 해도 소용없다고.”

“400만.”

일단은 사우 박사님한테 얘긴 해 둘게.”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탄소 기반 생명체.”

녀석은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을 한 번 찌푸린 다음 촉수를 움직여 노 룩 패스로 캐리어를 밀었다.

얘는 어찌 된 게 본점에서 사회생활 하고 있는데도 성격이 계속 이따구일까.

“동기분 입담이 굉장히 재밌군요.”

그때였다.

등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온 건.

“오셨군요.”

“오랜만입니다. 안 본 사이 그을리셨네요.”

어색하게 웃으며 돌아선 곳엔 키 작은 드워프가 선글라스를 쓰고 웃고 있었다.

“하하… 아무래도 남반구는 햇살이 세다 보니.”

“건강해 보여서 좋네요.”

로렐트리의 명감독 매스터한트.

비교적 키가 작은 종족인지라 내 허리춤 정도의 높이에서부터 들려 오는 목소리.

다만 그의 음성엔 베테랑만이 지닐 수 있는 위엄과 힘이 깃들어 있었다.

“저번부터 느끼는 건데 배우 해도 되는 비주얼 같은데, 혹시 이쪽 관심 없어요?”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빈말 같긴 한데 거물 감독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소리 하고 다녀도 되는 건가.

내가 주제 파악이 되는 인간이라 다행이지.

화제를 돌려 보자.

“로렐트리에서 제일 바쁘신 분이 시간을 내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가끔은 소규모 팀을 꾸려 현장에서 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서 말입니다.”

마스크를 내린 매스터한트 감독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의 뒤에선 따라온 스태프들이 바쁘게 촬영용 기자재를 실어 나르고 있었다.

그들은 전용기를 타고 온 듯 하나같이 VIP 전용 통로에서 나오고 있었다.

“감독님 먼저 들어가서 쉬고 있겠습니다!”

“어어. 그래. 내일 밥차 미리 예약해 두고.”

“저도 그럼 준비하고 가 보겠습니다. 대표님.”

“어어. 킴 변. 수고해 줘.”

촬영 스태프들과 정장 입은 변호사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차례대로 감독에게 인사를 건네고 사라졌다.

12차원에서 새벽 비행기를 타고 온지라 피곤할 법도 한데 어째 모두 들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기운이 넘치시네요.”

“촬영 끝나면 휴가를 줄 겁니다. 키키와이, 다들 오고 싶어 했거든요. 와이프도 애들 데리고 내일 도착할 예정입니다.”

“아하….”

어쩐지. 그런 거였구만.

저들 역시, 내가 부탁해서 매스터한트 감독이 데려온 인원들이다.

이번에 그가 키키와이를 찾아온 건 마케팅의 일환이자 우리의 계획을 돕기 위해서다.

다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사우 박사님이랑은 전화로 못 한 얘길 마저 해야겠군요.”

“안심하세요. 오전에 미팅 잡아 두었습니다.”

“아주 좋군요.”

감독은 흡족하다는 듯 웃었다.

매스터한트 감독은 이번 우주 전쟁에 참전할 파일럿의 자서전 판권을 독점 구매하기로 했다.

그에 더해, 그는 몇 시간 후에 발생할 ‘귀중한 상황’을 카메라에 담을 기회까지 요구했고, 거절할 이유가 없던 콜로서스 로보틱스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가 아직 내용조차 정해지지 않은 자서전의 판권을 사려 하는 건 이번 사건을 영화화하는 것까지 시야에 둔 행동이었다.

만일 콜로서스 실전 테스트의 영상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다고 판단했을 터.

0.1차원의 위기에서 새로운 흥행 요소를 발견한 거물 영화감독.

바람 앞의 촛불 같은 태양계의 운명을 엔터테인먼트로 포장해 모든 차원에 퍼뜨림으로써 필요한 지원을 확보하려 하는 사우 박사.

두 사람의 수요는 나라는 공통의 지인을 통해 완벽하게 매치되었다.

철저히 각자의 목적을 위해 시작된 협업이지만, 이들이 힘을 모으면 최고의 결과가―

“저보다 작은 친구들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기회라니. 제가 언제 이런 경험을 해 보겠습니까. 하하.”

…어쩌면 꼭 비즈니스만을 위해 돕는 건 아닐지도?

“그럼 가 볼까요? 커피 마시면서 촬영에 대해 간단히 얘기 나눠 보죠.”

“피곤하시진 않으신가요?”

“비행 중에 충분히 잤습니다.”

“감독님만 괜찮으시다면 저야 좋죠. 숙소로 모시겠습니다. 리무진이 대기 중입니다.”

나는 매스터한트 감독을 데리고 공항을 나섰다.

감독과 그가 데려온 스태프, 그리고 변호사는 과타노차와 함께 이번 계획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 줄 것이다.

비슈티 과장의 옛 동료나.

저기 보이는 아이작과 라즈마 과장의 손님들만큼이나.

“…….”

이동 중 자신이 데려온 협력자와 대화 중이던 라즈마 과장과 아이작을 살폈다.

라즈마 과장은 나를 무시했고, 아이작은 나와 시선을 교환하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다들 알아서 잘하겠지.

* * *

내가 과타노차를 데리고 향한 곳은 키키와이에서 그나마 가장 높은 산이자 대형 천문대가 있는 곳으로 유명한 다이아몬드 펄 헤드였다.

왜 시가지가 아닌 이곳으로 이 까다로운 촉수 뭉치를 데려왔느냐 하면, 이유는 간단했다.

그건 바로, 녀석의 종족이 일반적인 최첨단 기계 이상으로 전자파를 감지하는 데에 특화된 능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차원신용금고의 모든 정규직 은행원은 직무권능이라 불리는, 각자의 개성이나 특기에 신의 축복이 깃들어 생겨난 능력을 다룰 수 있다.

그리고 과타노차에게 주어진 권능 역시 그의 특이한 체질과 그 괴팍한 성격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주위의 전자 기기에 자유롭게 간섭할 수 있는 라이프 핵生體干涉은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받지 않고, 역으로 자신의 기분대로 환경을 바꿔 버리는 개 X 마이웨이한 마음가짐이 반영된 것이었다.

“시작해 볼까.”

[아, 아직 준비가.]

과타노차는 사전에 천문대 근처에서 우릴 기다리던 나노이인 기술자들의 홀로그램이 무엇을 중얼거리든 상관하지 않고 곧바로 배지를 촉수로 건드려 직무권능을 발동했다.

-파지직!

공기 중에 푸른 스파크가 튀나 싶더니 차에 싣고 온 상자가 저절로 열리며 손바닥만 한 로봇 피규어 스물다섯 대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탄소 생명체가 만든 기계치고는 꽤 하는군. 라이프 핵을 3초 이상 버텨 내다니.”

[아니, 그러니까 저희가 먼저 보안 기능 해제해 드린다고….]

“이미 늦었어.”

과타노차의 원격 조종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양산형 콜로서스 스물다섯 대가 빠르게 사방으로 흩어져 날아갔다.

“괜찮으려나….”

과타노차가 훈련을 쌓은 파일럿이 아닌 만큼 저 기체들이 실제로 우주 괴수들과 전투를 벌이는 일은 없다.

이번에 시제품으로 급하게 뽑아낸 양산형 콜로서스들이 곧 있을 아프로 사스와 프로토타입의 실전 테스트에 앞서 맡아 줄 임무는 바로 정찰.

그렇다.

과타노차는 여러 기의 콜로서스를 자신의 촉수의 연장선, 즉 안테나처럼 사용해 0.1차원에서 날아오는 전파가 사람들에게 닿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놈들을 찾아낼 생각이었다.

“열등한 생물 주제에 이 몸의 실력을 의심하다니. 불쾌하기 짝이 없군.”

“그게 싫으면 툴툴대지 말고 똑바로 일하든가. 전파 납치하는 놈들이 어딨는지 알아야 잡든 말든 할 거 아니야.”

“이딴 일에 나 같은 고급 인력의 재능이 낭비되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사람 살리는 일인데? 400만 굴덴도 소장님이 챙겨 준다잖아.”

“정말 그만큼 중요한 일이면 빌어먹을 대머리를 시켜 내 공적을 인사 고과에 똑바로 반영하는 게 좋을 거다. 새로 산 스마트폰이 벽돌로 변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협박의 스케일이 묘하게 작네….”

개인적으론 한번 보고 싶긴 하다.

스마트폰 먹통되어 빡친 엘라마 차장이 이 자식 머리에 총구를 겨누는 광경을.

근데 이 녀석의 몸, 머리에 총 좀 맞는다고 죽는 신체 구조일까.

갑자기 궁금해지는데, 다음에 정중히 엘라마 과장한테 이 녀석이 무슨 소리 했는지 꼰지른 다음 방아쇠 한 번만 당겨 달라고 부탁해야겠다.

조금만 더 이간질해야지. 빌어먹을 탈모충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야겠다.

“…음? 이건….”

그때였다.

과타노차의 촉수 두 가닥이 LED등처럼 빛을 발한 건.

“찾았다.”

과타노차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무전기의 전원을 켰다.

“좌표와 사진 전송하겠습니다.”

-치직

[알겠소.]

차분한 목소리가 무전기 너머에서 들려 왔다.

“사냥의 시간이다, 소머리 편육.”

나는 비슈티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헛소리를 지껄이는 과타노차의 입을 틀어막고 무전기의 전원을 껐다.

“읍! 우븝!”

“미친놈아 죽고 싶으면 혼자 죽어!”

너는 본점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나는 계속 그 인간이랑 같이 일해야 한다고!

“나머지는 잘 부탁드립니다, 비슈티 과장님.”

나는 다시 무전기를 켜고 최대한 정중한 말투로 말했다.

그래, 어쩌면.

아주 가끔은.

사람 같지 않은 놈들을 상대할 때에 한해.

적절한 폭력이 답일 때도 있겠지.

* * *

동일同日 오전.

키키와이 모 호텔의 37층 모퉁이에 위치한 코너 스위트.

그레이트후리텐 본토에서 특정 정치 세력의 비호를 받는 가짜 시민 단체 구성원들은 이곳에 묵으며 풍족한 예산을 지원받으며 지내고 있었다.

“나노이 놈들도 끈질기네요. 뚫린 채널이면 어디든 냅다 지네 신호 욱여넣으려고 하고 있어요.”

“얼마 못 버티겠지. 전부 캐치해서 이쪽 음성이랑 영상으로 덮어씌워.”

그들의 주된 활동은 파인애플 피자를 먹으며 0.1차원에서 날아오는 ‘진짜’ 나노이 사람들의 신호를 납치해 가짜 신호로 덮어씌우는 것이었다.

엄연히 범차원법과 전파법을 위반한 범법행위로 피소되어도 핑계를 댈 수 없는 짓거리.

다만 피해자인 나노이 현지 사람들은 코앞까지 다가온 태양계의 멸망을 막는 데에 분주한 탓에 이들을 찾아내 고발할 수 없었다.

이 정도 규모의 작전 행동이 가능하도록 예산과 필요한 기기가 지급된 이들은 말이 시민 단체지, 정치가들 밑에서 일하는 어용 사조직과도 같았다.

이들에게 업무는 흔히 정치 깡패, 용역 깡패 등으로 불리는 집단이 하는 것과 하등 차이가 없었고 출신 역시 대부분이 옥살이 몇 번씩 한 범죄자가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범죄 이력이 없는 자라고 해도 예전 직장이 범죄 조직과 단단한 연계를 자랑하는 중소 규모 경호업체인 등, 결코 평범한 경력을 갖고 있진 않았다.

이들은 최근 위에서 내려온 지시를 받아 각 차원에서 암약하는 중이었다.

그 활동은 곧 차원 역장이 얕은 지역에 잠입해, 그곳에 유입되는 나노이의 SOS 신호를 모조리 ‘납치’한 다음 자신들이 제작한 가짜를 흘려보내는 것이었다.

이들의 부단한 활동 끝에 나노이의 위기를 적극적으로 알리던 사우 박사와 콜로서스 로보틱스 사는 수많은 이들에게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혀야만 했다.

그 후에도, 이들은 계속해서 ‘윗분’의 지시대로 각 차원에서 방해 공작을 이어나갔다.

이들은 나노이가 우주 괴수와 함께 펄스 폭탄의 희생양이 되기 전까지 멈출 생각이 없었다.

[-.—|..—.|.—.—|. ..-|..—-|. ..--|]

그때였다.

때마침 도착한 10시 정기 연락의 신호에 코너 스위트에서 한가롭게 누워 있던 사내들이 몸을 일으켰다.

“본부인데요.”

“새 지시인가.”

“네.”

복호화를 마친 암호의 내용은 간단했다.

나노이를 구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사우 박사와 그 일행의 소재지를 발견했다는 이야기.

“생각보다 가까운 데에 있었군.”

나노이 사람들의 크기가 너무나도 작은 나머지 목격 정보를 얻을 수 없던 탓에 그동안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마침내 꼬리를 잡았다.

본부의 정보에 의하면 사우 박사와 그 부하들은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들에게 자금을 빌려준 건 차원신용금고.

대출을 담당한 건 새로 생긴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인 모양이었다.

“크라우드 펀딩이니 뭐니 요상한 짓을 벌인다 싶었는데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군.”

“어떻게 할까요?”

“그야….”

제거해야지.

키키와이에서 활동 중인 그룹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표정에는 죄책감이나 두려움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무시하기 마련이었고 사내 역시 그러했다.

그러니까, 윤리 따위 진즉에 내다 버린 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나노이의 지성체들을 죽이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놈들 숙소 찾으면 밤에 문 따고 들어가서 가스를 살포해. 사람한테 영향 없고 증거 검출 안 될 정도로 적게 뿌려도 놈들에겐 치사량일 거야.”

돈을 대주는 이들의 지시를 따라 다른 지성체에게 극심한 폭력을 가해 온 그들이다.

그들에게 있어 약간의 독극물을 풀어 나노이 사람들을 죽이는 건 모기향을 태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하우스키퍼들 매수해 둬. 방 번호 찾아내면 바로 출발한다.”

그저, 먹고 마시는 데에 쓰거나 도박에 쏟아부을 돈을 벌 소일거리일 뿐.

“펄스 폭탄, 터질 때 그렇게 예쁘다던데.”

“태양계 규모의 불꽃놀이라.”

“나쁘지 않네.”

사내들은 돈을 밝히는 만큼 이런 소일거리를 잡음 없이 처리하는 데에 도가 터 있었고 실력 또한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파지직

그들 이상으로 돈을 밝히고 능력이 출중한 누군가가 지난밤 키키와이에 도착했고.

[찾았다.]

모종의 수단을 사용해 새벽부터 자신들을 찾아 키키와이섬 전체를 뒤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여긴 비슈티. 납치조 대기하라.]

그리고, 차원신용금고 본점 전산관리부 과타노차 대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유해한 이들이.

[타깃이 외부로 나오면 작전을 개시한다. 반복한다. 타깃이 외부로 나오면 작전을 개시한다.]

커다란 검은색 밴과 트레일러를 타고 숙소 근처를 배회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