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45화

나노이의 최첨단 기술의 정수이자 우주 괴수 토벌을 위해 준비된 결전병기의 프로토타입, 콜로서스 MK-1의 실전 테스트까지 남은 시간은 단 하루.

그동안 자행되던 전파 방해.

정확히는 0.1차원에서 날아오는 전파에 자신들이 원하는 내용을 덮어씌워 정보를 바꿔치기하는 ‘전파 납치’를 막기엔 부족해 보이는 시간이다.

그렇기에, 우린 과격한 방식이라곤 알고 있어도 성공률이 높아 보이는 비슈티 과장의 계획에 각자 아이디어를 더해 최대한 보완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아… 모르겠네.”

사우 박사와 다른 이들에게 연락을 마친 우리가 두 대의 차를 나눠 타고 은행을 나섰을 때 시계는 이미 늦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20분 후.

키키와이섬 북쪽 해안가.

“확인 완료되었습니다. 통과하시면 되시겠습니다.”

이곳은 콜로서스 로보틱스가 구매한 사유지로, 우린 사전에 협조를 요청받았기에 아무런 제재 없이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다.

정확히는 콜로서스 로보틱스가 직접 사들인 땅이라기보단, 이 땅을 보유한 기업을 콜로서스 로보틱스가 자회사로 인수해 소유권을 얻은 형태.

콜로서스 로보틱스가 관문을 통해 0.1차원으로 로봇과 파일럿들을 출격시키려면 민가와 안전거리가 확보된 땅이 필요했다.

하지만 토지를 확보한 게 알려지면 분명 강경파의 방해 공작이 들어올 거라고 생각한 나는 부동산을 소유한 기업을 자회사로 인수해 간접적으로 땅을 얻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알려 주지도 않았는데 잘도 흉내 내는군요.”

하찮다는 듯 중얼대는 라즈마 과장의 목소리는 내가 이런 계략을 어디서 배워 왔는지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저번에 라즈마가 고객들 프라이빗 뱅킹 업무 상담해 주는 거 듣고 그대로 흉내 낸 게 맞다.

배워도 어디 써먹을 곳 없을 줄 알았는데 바로 이런 일이 터질 줄이야.

근데, 라즈마가 나한테 먼저 말 건 거 처음 아닌가?

맨날 나랑 아이작을 투명인간 취급하더니.

조금은 인정받은 건가?

“멍 때릴 때냐. 당장 따라와라.”

“네에.”

엘라마가 부르길래 서둘러 짐을 나르러 가다 라즈마 과장의 얼굴 없는 머리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쪽은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

인정받았다는 건 역시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잠시 후.

깎아내린 듯한 절벽 아래에 위치한 프라이빗 비치에 도착한 우린 0.1차원과 연결된 이동식 차원 관문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부동산 업체가 소유하고 있어 출입 인원이 통제되는지라 우리 말곤 사람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라 창구상담사 플루토가 대량의 분신을 생성해 망을 보고 있었다.

0.1차원을 우주 괴수와 함께 날려 버리려 하는 놈들은 여태껏 가짜 배우를 고용해 찍은 영상을 퍼뜨리는 등 갖은 음침한 짓을 해 왔다.

게다가 그 영상을 나노이에서 날아오는 전파에 덮어씌워 그들의 구조 신호가 사람들의 귀에 닿지 않게 만들기도 했고.

최근엔 사우 박사를 고향의 위기를 이용해 수금하러 온 사기꾼으로 몰기까지 했다.

이만큼 철두철미한 놈들이면 사우 박사와 접촉한 은행원인 우릴 감시하고 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이 해변이 0.1차원에서 벌어진 우주 전쟁의 전초 기지가 될 거란 사실을 알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해하려 들 터.

계획대로 놈들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선 내일 점심까진 우리가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들켜선 안 된다.

“단련이 부족한 것 같소. 놓치지 말고 똑바로 드시오.”

“과장님이 비정상인 거라고요….”

겉모습 그대로 괴력의 소유자인 비슈티 과장의 지시를 따라 나는 낑낑대며 이동식 차원 관문을 조립하는 데 필요한 파츠를 옮겼다.

“이제 조립하는 것만 남았소.”

나는 어떻게든 비슈티와 라즈마와 호흡을 맞춰 빠르게 작업을 진행했다.

차원 관문이라고 해도 구조는 간단하다.

일단, 대가족이 캠프라도 나온 것처럼 집 한 채만 한 텐트를 펼친다.

물론 평범한 텐트는 아니다.

천이 바람이나 빗물, 자외선은 물론 차원 역장을 차단하는 무지하게 값비싼 재질(엘라마 왈 이 텐트를 사려면 ‘17김지안’이 필요하다고 한다)이니까.

시제품이라 그런지 쓸데없이 조립법이 예전에 군대에서 훈련 나갔을 때 치던 야전 텐트와 비슷하다.

조립 과정이 복잡한 게 문제지만, 일단 완성되면 그다음은 쉽다.

엘라마가 현금 수송차에 싣고 온 큼지막한 쇠문을 텐트 안에 넣고 기동하면 끝.

차원 역장을 차폐하는 텐트 안에서 관문을 열면 다른 차원으로 이어진 통로를 열 수 있다.

평소엔 출장소 건물이 역장을 차폐해 주지만, 이곳은 옥외니까 이런 물건이 필요해지는 모양이었다.

이 이동식 관문은 보통 은행 강도 등 긴급 사태가 일어났을 때 행 내에 설치해 다른 차원으로 고객들을 대피시키는 등의 목적으로 사용되는 물건인데.

이번엔 외부에 알리지 않고 인도적 목적으로 콜로서스가 0.1차원으로 진입하는 통로를 만들어 주기 위해 사용하기로 했다.

물론 아무 리스크를 지기 싫다는 이유로 0.1차원과 우주 괴수를 한 번에 지워 버리려 하는 이들에게 뇌물을 먹었거나 뜻을 함께하는 정치가가 알면 노발대발하겠지만.

그런데 우린 진즉에 키키와이 자치정부에게 이 차원 관문을 어떤 목적으로 써먹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 두었다.

아니꼽다고 차원신용금고 다차원 출장소의 영업 허가를 취소하려 할 것 같지만, 뭐 그 부분은 이사회가 어떻게든 막아 주겠지.

어차피 차원 간 통로가 열려도 우주 괴수만 이쪽 세상에 풀려나지 않으면 문제없는 거잖아?

“…아예 못 써먹을 정도는 아닌 모양이오.”

“저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비슈티가 예상치 못한 말을 던졌다.

어째 칭찬 같은 느낌은 드는데 기분이 썩 좋지가 않다.

“아니 갑자기 왜….”

대답 없이 돌아선 비슈티를 지켜보다 깨달았다.

방금, 야전 텐트 사이즈의 천막 치는 데 얼마나 걸렸더라.

“…….”

군 생활이 이런 데에서 도움이 될 줄이야.

뭐, 저 사람한테 인정받는다 해서 인사 고과에 반영되는 것도 아니니까 잊어야겠다.

“일단은 준비는 끝났고.”

다만, 아직은 이 문을 열면 안 된다.

지원을 요청한 업자, 본점 전산관리과에 근무 중인 내 유능한 입행 동기, 매스터한트 감독이 보내 줄 촬영팀과 민사 전문 변호사.

그리고 비슈티 과장의 ‘예전 동료’들과 라즈마 과장의 부름에 응한 전직 프라이빗 뱅커들이 모이기 전까진, 어림도 없다.

그리고 당연히 콜로서스 시험기와 조종을 맡을 파일럿도 이 자리에 있어야 하고.

“나머진, 타이밍인데.”

기회는 한 번뿐이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전파 방해를 시도하는 정치가들을 함정에 빠뜨려 물러나게 해야 한다.

이곳에 집결할 모든 사람들은 하나하나가 이번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대체 불가능한 부품들.

정교한 기계처럼 모든 것이 작동해야만 성공할 수 있는 작전.

근데, 정말 저질러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이거 말고 달리 방법이 없으니 무조건 실행할 거긴 한데.

“김지안.”

때마침 근처에서 전화를 마치고 온 아이작이 말을 걸었다.

무거운 짐을 같이 나르는 일 없이 여유롭게 전화하고 온 걸 추궁하고 싶었지만, 이번 일에는 녀석의 인맥이 필요하니 넘어가자.

“이런 짓, 진짜 해도 되는 건가…?”

딱히 차원 관문 여는 걸 말한 건 아니다.

우리에겐 키키와이 자치정부에게 받은 사용 허가가 있는 만큼 차원 관문을 열어도 문제가 없다.

다만, 이번에 연결하려 하는 곳은 당연히 0.1차원.

우주 괴수들이 무중력 공간에 포진해 있다가 이쪽 세상으로 쏟아질 가능성은 있다.

방역 업체 대표에게 돈 찔러 주고 부른 건 이에 대처하기 위한 조치.

물론 그럼에도 위험해지는 건 피할 수 없다.

꼴에 몸을 지킨답시고 핵 발전소에서 입을 법한 두꺼운 보호복을 준비하긴 했는데.

우주 괴수의 드릴 주둥이가 워낙 강력해서 시간을 조금 벌어 주는 정도밖에 쓸모가 없다니, 말 다 했지.

다만, 아이작이 묻고 있는 건 이런 게 아니다.

“확실히 계획대로 풀린다면 전파 방해를 멈출 수 있긴 하겠지만….”

“어쩌겠어. 안 하면 수많은 사람이 죽는데. 나노이에 빌려준 원금도 날아가고.”

“은행 업무의 연장선이라 이건가.”

“그런 셈이지.”

비슈티 과장의 아이디어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이를 나와 다른 출장소 행원들의 아이디어로 보완한 결과 더욱 완전해졌고.

다만, 그 과정에서 우리 중 사상자가 나올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게 문제다.

게다가 델 몬테 지점장이 선을 넘어도 되는지 늘 자신에게 물어보라 했는데 지금부터 우리가 하려는 짓은 법을 무시하는 거니 분명 아웃.

뭐. 사실 나는 벌써 서부 포독스 지점에서 두어 번인가 법에 저촉될 일을 해 봐서 별생각이 없다.

나와 달리 아이작은 떳떳한 준법 시민이니 꺼림칙해 하고 있지만.

그래도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은 점점 쉬워지니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금방 X컬 그X이몬처럼 타락시켜 주지.

같은 파충류니까 분명 쉬울 거다.

어디서 지만 깨끗하게 살려고. 재벌 3세면 다인가.

아니. 따지고 보면 이건 올바른 행동이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때도 있는 법.

이건 숭고한 타락이다. 누군가를 위해 행하는 잠깐의 일탈.

함께 숭고해지자, 나의 동기여.

“은행원이 무력으로 무언가를 해결하는 건 아무래도 좀….”

“먼저 범죄를 저지른 건 저쪽이오. 그리고 그리 험한 짓은 하지 않을 생각이니 걱정 마시오.”

이번엔 나 대신 비슈티 과장이 아이작에게 대답했다.

그는 복면을 머리에 걸치고 있었는데 손에는 장전된 권총을 들고 있었다.

이 시간대에 총 들고 저런 복장 입은 사람이 험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하니 퍽이나 신뢰가 간다.

“그 총 들고 다니실 거면… 복면은 똑바로 쓰시는 게 어떻습니까.”

“동감이에요.”

아이작과 내가 말하자 비슈티는 실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이쪽을 흘겨보았다.

살기야 발하지 않고 있지만, 이 양반 진짜 인상 장난 아니다.

복면, 뒤집어쓰지도 않고 어중간하게 걸쳐 둔 걸 보니 혹시라도 밤마실 나온 사람들과 마주쳤다가 경찰에 신고당할까 겁이 나는데.

같이 있다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오해받으면 어떡하지?

“키키와이는 후리텐 본토와 다른 법률이 적용되지. 면허만 있다면 누구든 총기 소지가 자유롭소. 방아쇠를 당길 때에만 상대가 이쪽의 얼굴을 보지 못하면 문제가 없다는 뜻이오.”

“…….”

그건 단순 총기 소지 얘기고 방아쇠 당기라는 게 아니잖아 미친놈아.

-철컥

“후방 지원 작전은 명일 0715시 개시 예정. 건투를 빌겠소.”

정장이 아닌 어반 카모플라쥬 군복으로 시릴 정도로 하얀 털을 가린 미노타우로스는 빙글 돌아서서 해안가로 향했다.

어느샌가 침투정을 타고 상륙한 용병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대충 어디부터 캐야 할진 알겠습니다. 슬슬 후배들을 데리러 가야겠군요.”

엘라마에게 조용히 몇 가지 사항을 지시받은 라즈마 과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차로 향했다.

“실수하지 마라. 김지안.”

“실수하면 어차피 소장님 책임이니 마음 편히 하겠습니다.”

“너 이 자식.”

“그러게 사람 좀 작작 부려먹으셔야지.”

-쾅

엘라마의 당부에 적당히 대답한 나는 라즈마 과장과 아이작을 태운 차의 운전석에 올라타 재빨리 차 문을 닫았다.

“…그럼, 각자 손님 마중 나가 봅시다.”

-부릉!!

액셀을 힘차게 밟았다.

목적지는 공항.

야간 비행으로 지쳐 있을 과타노차의 히스테리를 받아 내려면, 각오가 조금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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