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40화
사우 박사와 이야기를 마친 나는 숙소로 돌아갔다.
마지막까지 그녀는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제안한 방법이야말로 이 사태를 타개하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라는 것을.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오전 9시 반.
사우 박사의 비행선이 은행에 나타났다.
-지잉!
어제 은행에선 홀로그램 메시지만 내보냈던 것과 달리 이번엔 부하들과 함께 홀로그램을 사용해 모습을 드러낸 나노이의 연구자들.
수십 명에 달하는 실체 없는 인파가 출장소 로비를 가득 채웠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 두 과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셨군요.”
나는 오픈 즉시 찾아온 그들에게 달려가 대신 번호표를 뽑아 주었다.
<덕분에 결심할 수 있었어요. 고맙습니다, 지안 씨.>
어제보다 한결 나긋나긋해진 목소리로 사우 박사는 말했다.
어젯밤의 고뇌는 이미 극복한 모양.
그녀의 얼굴엔 결의에 찬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 역시도.
“반갑습니다, 고객님.”
어디까지나, 은행원으로서 그들을 접했다.
하지만 진심을 담아.
“오늘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물었다.
우리와, 은행과 다음 걸음을 내디딜 준비가 되어 있는지.
<<대출을 신청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소리를 모아 화답했다.
단 한 번도 망설인 적이 없는 것처럼.
“성공한 사업가로 변신할 마음의 준비는 마치신 건가요?”
<까짓거, 한번 해 보죠.>
“좋습니다.”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근미래적인 복장을 두른 나노이인들이 일제히 손을 움직였다.
-파앗
허공에 반투명한 전자 서류가 수십 장 나타나더니 내 책상 위로 차례차례 날아가 쌓였다.
“차원신용금고를 신뢰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개인이 받을 수 있는 최대 한도까지 끌어모은 대출 신청 서류.
나는 사우 박사와 만난 이후 처음으로 배지를 만져 직무 권능을 발동했다.
-파앗!
그녀의 머리 위에 나타난 저울은, 크게 우측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잠재력은 차고 넘친다.
이 계획은 무조건 성공할 것이다.
“반드시 믿음에 보답하겠습니다.”
대출 서류에 나열된 글자와 숫자는 당장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머지않아 행성과 태양계 전체를 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낭만을 선사할 서사시의 첫 페이지가 되어 줄 것이다.
* * *
사우 박사와 동료들이 대출받은 돈으로 가장 먼저 한 일은 로봇을 생산할 공장을 짓는 것이었다.
법인 등록을 마친 그들이 선택한 부지는 키키와이 도심부에 위치한 상가의 한 평짜리 공간.
일반적인 기준으로 생각했을 때 로봇의 시제품을 만들기 그리 적합해 보이는 공간이 아닐 수도 있지만 이들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노이의 사람들은 6-2차원 사람들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작다.
그리고 그들에게 필요한 면적 역시도.
그들에게 필요한 건 세 가지.
연구에 필요한 시설과 생산 설비, 그리고 자재.
이틀도 지나지 않아 한 평밖에 되지 않는 작은 공간은 출입 인원이 제한된 무균실로 모습을 바꿨다.
다만, 아무리 부동산에 들이는 돈이 적다 해도 생산기지를 세우는 비용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최첨단을 달리는 나노이의 기계 공학의 정수를 기초 과학과 기타 기술이 비교적 덜 발달한 6-2차원에서 구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행선에 싣고 온 설계도를 토대로 로봇의 프로토타입을 건조하는 데에 필요한 최소한의 설비를 구축하는 데에 걸린 시간은 1주일.
사우 박사가 이끄는 팀은 0.01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이주한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을 수소문해 고용했고, 그들은 자신들이 태어난 고향 별과 태양계를 구하기 위해 빠르게 업무에 적응했다.
그렇게 완성된 유한 회사 ‘콜로서스 로보틱스’는, 본격적으로 프로토타입 제작에 돌입함과 동시에 내 조언대로 두 번째 작전을 시작했다.
박사는 자신과 팀원들이 로봇의 전투 능력과 안정성, 신경망 동기화 능력 등 성능을 개선하는 데에 집중하는 동안 다른 분야에서 진두지휘를 맡을 인재를 선정했다.
고성능의 전쟁 병기를 만들어 우주 괴수를 멸종시키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모든 차원의 사람들이 갖고 싶은 물건을 만들어 자금을 확보하는 일이다.
전자를 실현하기 위한 지식과 기술, 그리고 인재는 이미 회사에 있었다.
그렇기에, 사우 박사가 구해야 했던 건 후자.
“중요한 건 두 가지. 프로덕트의 완성도와 소문입니다.”
안타까운 나노이 행성의 사정을 듣고 온 12차원 올림포스의 마케팅 전문가에게 사우 박사는 흔쾌히 보수를 지불했다.
인도적인 목적을 지닌 사업인 점을 고려해 그가 평소 받는 보수의 3분의 1만 받고 일하는 것에 동의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쪽이 김지안 대리군요.”
자신을 엔디미온이라고 소개한 사내는 그 자리에 있던 내게도 명함을 한 장 건네주었다.
“소문은 감독님 통해 익히 들었습니다. 다음에 또 재밌는 일이 있으면 연락 주시죠.”
“어쩌다 소문까지 나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알아봐 주시니 영광입니다.”
“겸손하시군요. 아쉽지만 오늘은 시간이 없으니, 일 이야기부터 마친 다음에 궁금한 걸 여쭤봐야겠군요.”
그동안 굵직한 블록버스터 영화와 기타 콘텐츠의 마케팅을 맡아 온 엔디미온은 곧바로 자신의 장기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리서치 팀의 이야기를 듣자 하니 3-1차원에서 소비되는 로봇 관련 콘텐츠의 디자인이 뛰어나고 종류 역시 다양하다더군요.”
<3-1차원이면, 미개척 차원의?>
“예. 나노이보다 기계 공학의 수준이 현저히 떨어지는 곳이지만 창작물을 제작할 때 발휘되는 예술적 상상력만큼은 훌륭하죠.”
<그렇다면 그곳의 콘텐츠에 등장하는 로봇의 디자인을 벤치마킹할 수 있겠군요?>
“이미 완료했습니다.”
<…네?>
“저희는 지난 일주일 동안 그곳의 콘텐츠를 분석한 다음 최고의 디자이너들을 동원해 모든 차원의 고객들이 선호할 예술적인 설계를 완성했습니다.”
-촤락!
군더더기 없는 도입부와 함께 시작된 프레젠테이션은 엔디미온과 휘하의 직원들이 준비한 다양한 디자인을 담고 있었다.
건X이나 가X가이X, 캡X 사XX스 등 3-1차원 지구 출신인 나와 내 동년배들이 어린 시절 사랑해 마지않던 멋들어진 기계들의 향취가 느껴지는 설계.
거기서 더욱 나아가 오리지널리티까지 획득한 이족 보행하는 쇳덩이들의 웅장한 모습은 화상 회의에 참가해 구경하고 있던 날 감탄케 만들었다.
나노이의 전통 문양 등 아이덴티티를 나타내는 요소가 제대로 반영되었음은 물론 실용성과 예술성을 모두 갖춘 인상을 주는 디자인.
“지안 씨가 소개해 준 3D 그래픽 전문가들이 꽤나 훌륭한 실력을 갖추고 있더군요.”
나는 대답 대신 카메라 앞에서 그저 작게 엄지를 세웠다.
설계를 맡은 건 로렐트리의 거물 감독 겸 프로듀서인 베르게네프 매스터한트가 이끄는 영화 제작, 배급사인 뮤지스 파트너즈의 자회사.
서부 포독스 지점에 있던 시절 모회사의 방침을 따라 주거래 은행을 차원신용금고로 옮기느라 연락처를 받아 둔 곳이었다.
물론 매스터한트 감독에겐 연락해 동의를 구했고 흔쾌히 승낙을 받았다.
당연히 공짜는 아니다.
그가 내건 조건은 뮤지스 파트너즈의 디자이너가 제작에 참가한 사실을 공표하고 참전할 파일럿 중 한 명의 자서전의 판권의 독점 구매권.
다만 고작 이 정도 대가로 한 태양계의 멸망을 막을 수 있다면 공짜와 다름없다고 판단한 사우 박사는 이를 받아들였고.
결과는 보다시피 만족스러웠다.
<시험작의 외골격과 장갑만 바꾼 정도로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사우 박사 역시 적지 않게 감탄한 듯 고양된 목소리로 찬사를 쏟아내고 있었다.
“말씀드렸잖아요. 로망의 결정체여야만 한다고.”
미리 사전에 연구 자료로 사용하라고 부랴부랴 월차 써서 3-1차원의 한국에 다녀온 보람이 있다.
이것저것 프라모델이랑 피규어, 영상 자료를 대량으로 구매해 갖다줬는데도 박사가 ‘실용성이 부족하진 않을까요’ 같은 소리를 늘어놓았을 땐 답답했지만.
무사히 디자이너들의 손에 의해 훌륭한 디자인이 탄생해서 다행이다.
“외부 장갑의 디자인은 이 중에서 몇 가지를 정하면 충분합니다. 그럼, 이제부터 제가 실력을 발휘할 차례군요.”
카메라 너머로 보이던 앤디미온의 시선이 한층 강렬해졌다.
“마케팅의 시간입니다.”
이 배드애쓰하고 도프한 로봇을 세상에 선보일 시간이다.
* * *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갔다.
모기만 한 크기의 끔찍한 생명체에게 침공당하고 있는 작고 작은 태양계의 이야기.
그리고 그곳에 사는 이들의 목숨을 건 처절한 투쟁.
마지막으로 동포들과 태양계의 다른 별을 구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미모의 공학도에 관한 이야기까지.
[무슨 별이 모기한테 한 방 찔리면 뒤지냐.]
[그래서 보호막 쳐 뒀다잖아.]
[한 달도 못 버틴다는데?]
[그럼 어떡해.]
[어쩌긴 다 죽는 거지 뭐.]
나노이의 안타까운 사연에 관해 전해 들은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유감을 표했다.
그리고 이러한 소식이 모든 차원 구석구석까지 퍼진 즈음.
한 회사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콜로서스 로보틱스?”
6-2차원의 경제 대국 그레이트후리텐, 수도 린딘.
교외의 가정집 2층에서 인터넷 신문을 읽던 28세 독신 세무사 켐리 포웰은 홀린 듯이 기사를 클릭해 내용을 확인했고.
“이런 미친…!”
황홀감까지 느껴지는 디자인의 중후한 로봇의 사진과 스펙에 관한 설명을 읽은 켐리의 입에서 감탄 섞인 욕설이 튀어나왔다.
“알고 있었어. 언젠간 내게도 이런 사명을 짊어질 날이 올 거라는 걸.”
기사의 내용은 한 크라우드 펀딩에 관한 이야기였다.
크라우드 펀딩은 다수의 개인에게서 자금을 투자받아 하나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수법.
이번 펀딩은 나노이 태양계를 구하기 위한, 일종의 후원에 가까운 행사였다.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모인 자금은 전부 평범한 인간의 손바닥만 한, 그리고 나노이인들에겐 거대한 크기의 로봇을 제작하는 데에 사용되고.
이 로봇들은 생산이 완료되는 즉시 자기장 보호막 외엔 의지할 곳 없는 나노이와 다른 행성을 향해 사출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 로봇이 지급되면 나노이인들은 원격으로 조종해 우주 괴수를 격퇴할 수 있다.
[저 모기처럼 생긴 놈들, 요즘 다른 차원으로도 건너온다면서?]
[나노이 사람들이 막지 못하면 다음은 우리 차례라는 거야?]
[그럼 시발 돈 내야지!!!]
크라우드 펀딩 게시판에는 최근 들어 늘어나기 시작한 우주 괴수의 피해에 골머리를 썩고 있던 차원의 사람들이 올린 글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들은 인도적인 목적 외에도 자신들의 세상을 지키기 위해 크라우드 펀딩에 참가하고 있었고, 차례차례 구매 확정 화면의 스크린샷을 올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켐리가 이번 펀딩에 관심을 가진 데엔 그 이상의 이유가 있었다.
<이 전쟁이 끝난 다음, 콜로서스 로보틱스 사는 모든 기체를 회수해 전부 수리한 다음 펀딩 참여자분들의 집으로 보내드릴 예정입니다.>
<나노이가 보유한 로봇 공학의 정수인 콜로서스는 저희를 도와주신 영웅인 여러분들께 기념품이자 훈장이 되어 줄 것입니다.>
<모든 콜로서스는 AAA 건전지 하나로 30일간 쉬지 않고 반중력 상태로 가동할 수 있습니다.>
<배송 시 삽입되는 AI칩에 의해 콜로서스는 평상시 인체에 무해한 무기를 사용하는 해충 구제 모드와 근처의 우주 괴수를 토벌하는 실전 모드의 두 가지로 변형합니다.>
<슈퍼 얼리버드 D 패키지 이상의 금액을 후원하신 분께는 2기 이상의 콜로서스가 합체 가능한 파이널 퓨전 프로토콜 AI를 동봉 예정입니다.>
<각 기체는 제각기 다른 전투 기록을 지니고 있습니다. 해당 영상은 기체 내부의 메모리에 동봉되며 언제든 구매자의 단말과 연동되어 실감 나는 전투 영상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모든 정보를 확인한 켐리는 자신도 모르게 지갑에서 신용 카드를 꺼내 정보를 입력하고 있었다.
-타다다다닥!!!
세무사로 일할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의 타이핑.
카드 한도가 빠듯했지만 저렴한 가격으로 실제로 구동하는 합체 로봇을 손에 넣기 위해선 달리 방법이 없었다.
“제발, 제발, 제발…!!!”
켐리는 눈을 꽉 감고 기도했다.
자신이 마우스 왼쪽 버튼을 클릭하는 동안 일찍 펀딩에 참여한 사람들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얼리버드 패키지의 잔량이 0이 되질 않기를.
간절하게, 간곡하게, 절절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