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39화

<지렛대, 입니까.>

사우 박사의 홀로그램 메시지가 흔들리고 있었다.

거기서 느껴지는 건 의문. 그리고 약간의 흥미.

-삑

작은 기계음이 들리나 싶더니, 물컵에 둥둥 떠 있던 비행선이 또 다른 홀로그램을 사출했다.

“…….”

이번엔 글자가 아니었다.

내 앞에 나타난 생생한 입체 영상은 20대 중반을 간신히 넘겼을까 싶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근미래적인 데에다 고급스러움이 느껴지는 디자인의 복장을 몸에 두르고 있었는데. 자연스러운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우아함이 느껴졌다.

사우 박사, 남자일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착각이었다.

여태껏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어 성별조차 몰랐지만 멋대로 편견을 품은 걸 보니 나도 아직 멀었군.

<개개인의 전문 분야가 있기 마련인데, 공학도인 제게 그런 이야기를 하시다니 굉장히 자신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정갈하게 땋아 올린 머리를 매만지며 사우 박사는 내게 말했다.

이번엔 소리 없는 메시지가 아니다.

홀로그램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한 건진 모르겠다만 아무튼 나노이의 기술력은 대단했다.

<저는 도전적인 사람을 선호합니다. 물론, 저와 함께 일하는 사람 이야기입니다만.>

허스키하지만 어둡지 않고 호감을 주는 목소리.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말투도 모습을 드러내기 전보단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다.

“칭찬 감사드립니다. 조금 오해받은 것 같지만요.”

<제가 무언가 오해했나요?>

내가 한 말을 도발이라고 받아들였으면서도 그녀는 흥미를 보였다.

왕성한 호기심의 증거.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언제나 열어 두고 모든 것에서 배우고 그것을 검증하려 하는 연구자의 태도.

그녀가 지니고 있을 천재성의 편린을 그 됨됨이에서 파악한 이상, 나는 거기에 합당한 존중을 보여야만 한다.

“은행원인 제가 어떻게 감히 박사님과 지식을 겨루려 하겠습니까.”

상대는 젊은 나이에 한 분야의 정점에 서서 여러 별들을 위기에서 구하려 하는 천재.

그녀의 전문 분야에 내가 왈가왈부하는 건 잘못되어 있다.

아까 전까지 나는 무언가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

사우 박사는 진지하게 이 일에 임하고 있고 해당 분야의 권위자다.

그녀가 로봇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으니, 아마 높은 확률로 그것이 옳을 것이다.

문외한인 내가 왜 로봇이 필요한지 모르겠다고 생각해 봤자 그게 운 좋게 정답일 가능성은 거의 없을 테니까.

만일 그녀가 조금 틀렸다 해도, 나는 그녀에게 협조해야만 한다.

모기와 싸우는 게 우주 전투기든 멋들어진 디자인의 이족 보행 로봇이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지금 최선의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그건 바로, 모든 것을 빠르게 진행하는 것.

어떻게 생긴 병기든 일단은 대량으로 찍어 내 저 가증스러운 우주 괴수와 싸우게 해야 한다.

만일 그 과정에서 일개 은행원인 내가 감히 결정권자인 사우 박사의 계획에 관해 왈가왈부한다면 그건 시간 낭비 외의 무엇도 아니다.

고로, 내가 지금 해야 하는 건.

사우 박사의 뜻대로 계획이 진행되도록 돕되 그 계획이 최대한 큰돈을 낳도록 만드는 것이다.

당연히, 전제는 우주 괴수를 퇴치하고 모두가 안전해지는 거다.

하지만 은행이 돈을 빌려주기 위해선, 고객의 상환 계획이 제대로 잡혀 있어야만 하고.

이는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상 몇 번을 강조해도 부족할 정도로 중요한 사실이다.

“저는 단지 은행원인 저조차 알고 있을 정도로 간단한 과학 상식이 은행과의 관계에서도 적용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 드리려 했을 뿐입니다.”

<흥미롭군요. 들려 주시죠.>

내가 최대한의 겸손함과 존중을 담아 말하자 사우 박사의 홀로그램이 눈을 빛냈다.

규모가 작은 자영업자와 기업을 대표해 돈을 빌리러 온 사람들에게 몇 번이나 해 온 설명.

달라진 건 하나.

상대가 한 태양계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거물이라는 사실뿐이다.

긴장할 필요는 없다.

그저 평소처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박사님께선 증명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빠뜨린 서류가 있던가요?>

“아니오. 박사님에겐 아직 자격이 없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홀로그램 메시지로 대화할 때보다 더욱 뚜렷하게 전해지는 감정.

모멸감을 느낀 걸까 냉랭함이 그 목소리에 깃들어 있었다.

“잘못 들으신 게 아닙니다. 박사님께는 자격이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사우 박사의 눈썹이 움찔대기 시작했다.

굳게 오므린 주먹. 홀로그램이라곤 해도 사용자의 모습을 그대로 확대해서 비추고 있는지라

자격이 없다는 말, 태어나서 들어 본 적 없을 거다.

그녀가 어떤 인생을 걸어왔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녀가 차원신용금고의 VVIP로 대우받고 있다는 건 내가 일하는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가 생기기 이전부터 0.1차원이 아닌 이쪽에서 활발한 경제 활동을 펼쳐 왔다는 사실을 뜻한다.

모르긴 몰라도 부동산이나 유가 증권은 물론 돈 되는 특허 같은 것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보유하고 있을 거다.

어느 쪽이든 내가 본 적 없는 자릿수의 자산을 쥐고 있는 부자인 건 틀림없다.

그뿐만인가.

리바이 사우는 지위와 명예 또한 갖추고 있다.

그녀는 나노이 행성방위연구소의 총책임자.

아무리 생각해도 업무에 투입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신입 은행원인 나한테 자격이 없다는 소릴 들을 만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는 그녀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조언을 줄 수 있다.

“박사님은 40조 굴덴을 빌릴 자격이 없습니다. 박사님이 나노이 행성의 모든 사람들을 대표하고 있다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수십억에 달하는 사람들의 목숨의 가치가 40조 굴덴보다 낮다는 뜻인가요?>

“그만한 돈을 빌리기 위해선 필요한 단계를 밟아 사람들에게 증명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증명….>

알고 있다.

여태껏 그녀가 수없이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 왔을 거란 사실을.

젊다고 무시하는 이들을 꺾고 저 자리에 오르기까지 어떤 일을 겪었을지도 쉽게 상상이 간다.

그러니까 이건 사우 박사에게 굉장히 익숙한 과정.

못 할 이유는 없다.

“예전에도 병기를 설계하신 적이 있나요?”

<병기까진 아니더라도 행성방위연구소는 모든 잠재적 위협에서 0.1차원의 나노이 태양계를 지키기 위해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거죠?”

<숙련된 군인의 움직임을 그대로 초거대 로봇이 트레이스해 위험 지역의 구조 작업이나 소행성 폭파 등의 임무에 동원하는 ‘프로젝트 콜로서스巨神計劃’입니다.>

“…그래서 로봇을 만들겠다고 하신 거군요.”

아무래도 그동안 연구해 온 기술이니까 당연히 빠르게 실물로 구현하기 좋겠지.

<예. 물론 인공 지능으로 움직이며 지형지물을 문제없이 이동하는 형태의 로봇도 만들 수 있지만 이족 보행 형태를 선택했습니다.>

“인간과 같은 형태라면 훨씬 직감적으로 조종할 수 있어서… 인가요?”

<그렇죠. 파일럿을 키우는 데에 드는 코스트와 시간이 압도적으로 적거든요. 물론 백업을 맡을 단순한 형태의 로봇도 대량 생산에 돌입할 생각이긴 합니다만.>

로봇이라고 들었을 때 아무래도 사람의 형태를 띤 걸 만들 거라는 생각에 뭔가 현실성 없는 계획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역시나 예상은 들어맞은 모양이다.

다만 이렇게 구체적인 이유를 듣고 나니 단순히 이족 보행이 멋있어서 그런 결정을 내린 건 아닌 듯하다.

그럼, 여기서 내가 확인해야 할 건 단 하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주 괴수와의 싸움에서 쓸 만한 병기를 만들어 낸 적은 아직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사우 박사는 무언가 반론하려다 포기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머리가 좋은 사람 같으니 내가 이만큼 말하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했을 거다.

<제겐 아직 실적이 없었군요.>

“정확하십니다.”

지금의 그녀를 일반적인 자영업자로 비유한다면, 사우 박사는 처음으로 창업에 도전하는 초짜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여러 분야에 조예가 깊고, 다양한 지식을 갖춘 완성된 인재라 해도.

그 기술과 재능이 주위를 감탄시킬 만큼 뛰어나다고 해도.

투자자를 찾는 이상은 자신이 세상을 향해 발신하려 하는 서비스를, 새로운 프로덕트를 눈으로 볼 수 있는 형태로 제공해야만 한다.

음식도 똑같지 않은가.

아무리 레시피가 뛰어나 보여도 완성된 음식을 먹지 않는 이상은 대박이 날지 예측할 수 없는 법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주머니를 열게 하는 건 결국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실존하는 무언가다.

그것 없이 달랑 계획만 가져와서 큰돈을 빌려달라고 하는 건 자격 없는 자들이나 할 법한 행동.

사우 박사는 조바심이 난 나머지 자신과 나노이 행성이 지닌 장점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박사님, 대출은 대국적으로 받으셔야 합니다. 비상금 대출이든 신용 대출이든, 영혼까지 끌어모아 신청하세요. 무조건 승인될 겁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그 돈으로?>

“수천, 수만 개의 양산형 로봇의 원본이 되어 줄 1/1 원오프 프로토타입을 먼저 만드는 겁니다.”

<프로토타입…?!>

“네. 프로토타입이요.”

소싯적 로봇 나오는 애니메이션 안 본 한국 남아가 얼마나 있겠나.

그 추억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는 마저 말을 이었다.

“우월한 스펙, 누가 봐도 멋진 디자인, 탁월한 실전 능력을 갖추고 있어 혼자 다수의 우주 괴수를 상대할 수 있는 궁극의 전쟁 기계를 만들어 선보이는 겁니다.”

가슴 한켠에 남은 동심과 로망에 불을 지폈다.

오래전 잊어버린 열기를 내 눈에, 내 말에 담아 박사에게 전했다.

<누구에게, 보여 주는 거죠?>

현실의 벽에 부닥쳤던 공돌이의 마음 그 깊은 곳에 던진 불씨가 크기를 키워 간다.

뿌리부터 불이 붙어 타오른다.

기대감에 부푼 눈빛.

그래. 바로 이걸 기다렸다.

차게 식었던 마음의 숯에 불이 옮겨붙어 타오르는 것을.

0.1차원 태양계의 위기고 사람들의 목숨이고 전부 잊고.

공돌이의 메마른 심장이 진심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득 차는 순간을.

역설적이지만 그 마음이 결국 나노이 사람들을 구할 테니까.

“누구긴요.”

다리 따윈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 따위.

이족 보행 로봇의 비현실성을 성토하는 목소리 따위.

귀를 막고 무시하며 우직하게 무소의 뿔처럼 나아가야만 도달할 수 있는 약속된 땅.

모두가 찬양해 마지않는 영광은 그곳에 있다.

“당연히 은행―”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원동력은 바로, 비효율적인 열망과 동경이 합쳐져 탄생하는 압도적인 로망.

“그리고 전 세계, 전 차원의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박사의 홀로그램.

그 눈가에는 투명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기억하십시오. 보는 이들마다 그 웅장함에 넋을 놓게 되는 로봇을 만들 수만 있다면, 나노이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 꼭 멋있어야 하나요? 현실적으로 실용성과 디자인을 완벽하게 양립할 순 없을 텐데 꼭 둘 중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전 실용성을―>

“양립하셔야만 합니다. 합체가 가능하다면 더욱 좋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죠?>

아니, 왜 이걸 이해하지 못하는 거지.

“박사님. 프로토타입은 지레입니다. 그 끝에 가해지는 작은 힘은 초호기 생산에 필요한 은행 대출이고요.”

<설마―>

“예. 저는 프로토타입의 전투 영상을 샘플로 공개한 다음 전 차원의 고객을 대상으로 한.”

은행에서 필요한 만큼 자금을 빌릴 수 없다면.

“크라우드 펀딩을 제안 드리고 싶습니다.”

모든 차원에서 돈을 쓸어 담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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