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33화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나른한 오후, 카펠리노 디 드리아데의 툴레아 대표는 비서와 함께 직접 차원신용금고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를 방문했다.
“여러분께는 정말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는 차원 관문을 넘어 출장소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나를 보고 허리를 90도로 접어 인사를 했다.
“대표님…!”
반갑게 툴레아를 맞이한 나는 곧바로 그를 2층으로 안내했다.
툴레아가 도착한 소식을 들은 엘라마가 곧바로 따라 올라왔다.
입에 걸린 환한 영업용 미소. 점포가 오픈하자마자 거대한 실적을 올리게 만들어 준 상대가 반갑지 않을 리가 없었다.
“묘목은 잘 자라고 있나요?”
“예. 영맥에 심은 덕에 몇십 배는 빠르게 자라고 있습니다.”
“다행입니다.”
내 질문에 툴레아는 환한 미소로 답했다.
숙원이 이루어짐으로써 근심이 가신 듯 그의 표정은 예전보다 훨씬 밝았다.
“세계수 컬렉션의 첫 작품이 제작되기 시작했습니다. 가지 끝부터 시작해 천천히 최고의 목재만을 골라 가구로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다만 아무래도 자신의 지시 아래 세계수가 잘려 나가고 있다는 책임감은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 걸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표님은 옳은 결정을 하신 겁니다.”
툴레아는 순순히 엘라마의 격려를 받아들였다.
그 직후 플루토의 분신이 다과를 가져왔고, 테이블 위에선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세계수에서 도망친 자일리니 주교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 탓에 고발할 수 없게 된 일이나.
세계수의 일부를 잘라냈는데에도 정령들이 잠잠히 그것을 받아들였다거나.
새로운 묘목을 심고 상환 계획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겪은 자잘한 사건들을 얘기하는 툴레아의 눈가는 조금씩 젖어가고 있었다.
“저희의 힘만으론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는 손을 뻗어 우리에게 악수를 청했다.
“감사합니다. 몇 번을 말해도 부족하겠지만 거듭 말씀드립니다. 두 분과 차원신용금고는 저희 종족을 구해 주셨습니다.”
장인의 손은 단단했고, 열기를 띠고 있었다.
그 감각은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되새길 기회를 내게 주고 있었다.
은행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가 이 일을 사랑해 마지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분께 드릴 선물이 있습니다.”
“당치 않습니다. 저희가 선물을 드려야 옳죠.”
내규상 고객에게 금전적인 보상을 받을 순 없는지라 엘라마가 너스레를 떨었지만 툴레아는 고개를 저었다.
“약소하지만 직접 제작한 기념품입니다. 최대한 실용적인 물건으로 골라 봤는데 마음에 드실는지 모르겠군요.”
툴레아의 비서가 손바닥보다 조금 큰 사이즈의 상자를 두 개 꺼내 우리에게 건넸다.
“이건….”
안에 든 건 원목으로 만든 스마트폰 케이스였다.
아무런 장식도 조각도 없이, 나무를 깎아 매끄럽게 다듬은 물건.
언제 모델명을 확인한 건진 몰라도 내가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과 완벽히 맞아떨어지는 사이즈였다.
“저번에 통화하실 때 소장님 전화기가 떨어진 것 같아서 준비해 봤습니다.”
“거기까지 배려해 주시지 않아도….”
“아닙니다. 한 분께만 드리긴 죄송하니 두 분 몫을 모두 준비해 왔죠. 수수하긴 해도 나름 자신작입니다.”
가구 회사 대표가 제작한 폰케이스는 단단하고 아름다운 곡선을 담고 있었다. 나무로 만든 건 확실한데 감촉이 특이하다.
표면이 비단처럼 부드럽지만 안에 단단한 심이 자리 잡고 있다. 만지고 있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감촉.
여태껏 원목 가구 등을 만져 본 적이 아예 없던 건 아니다 보니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건 장인의 손길로 구현 가능한 무언가가 아니다.
특별한 목재가 사용된 물건이 틀림없다.
설마―
“이거, 설마 그… 나무로 만든 겁니까?”
내가 물었지만 툴레아는 그저 웃기만 했다.
“보시다시피 나무로 만든 겁니다. 저희가 만드는 모든 것은 원목으로 제작되니까요.”
당연한 걸 왜 묻냐는 것만 같은 말투였다.
근데, 이게 정말 당연하게 받아도 되는 물건인가?
“…귀중한 선물을 받았군요. 솔직히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실용성만을 고려해 짧은 시간에 제작하느라 모양이 조금 소박한 점 사과드립니다.”
“당치 않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내 눈은 방금 받은 스마트폰 케이스를 주시하고 있었다.
손이 다 떨린다.
진짜 가져도 되는 건가, 세상에.
“매달 이자는 빠짐없이 성실히 납부하겠습니다. 카펠리노 디 드리아데를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주거래 은행으로 삼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맺고 싶습니다.”
“좋습니다. 본점 회의실에 멋진 테이블을 선물하겠다고 행장님께 전해 주십시오.”
툴레아와 엘라마의 사이에 영양가 없는 대화가 오갔지만 그들의 눈빛은 복잡한 정보를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 이만. 다음 달에 다시 뵙겠습니다.”
툴레아는 주위의 눈을 의식하며 서둘러 은행을 떠났다.
“음….”
“왜. 석연치 않은 구석이라도?”
엘라마는 재밌다는 듯 웃으며 내게 물었다.
“왜 저리 서두르시나 해서요.”
“네가 뭘 선물로 받았는진 알고 그런 소릴 하는 거냐?”
“선물… 세계수로 만든 거죠? 이거.”
“꼴에 환쟁이였다고 눈썰미는 나쁘지 않군.”
엘라마는 특유의 사나운 미소를 내비치며 스마트폰 케이스를 고이 상자에 도로 집어넣었다.
“이게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진 네놈의 심장이 계속 건강할 수 있도록 비밀로 남겨 두도록 하지.”
“아니, 그딴 식으로 말하시니까 더 신경 쓰이잖아요!!”
“그렇다면 특별히 이번만 알려 주마. 툴레아 대표씩이나 되는 장인도 가공할 수 없는 목재를 정령들이 직접 깎아 만든 작품의 가치를.”
“아….”
맞다, 세계수의 가구는 사람 손을 거치지 않고 정령들이 직접 가공한다고 그랬지.
어째 스마트폰 케이스의 곡선이 인조적인 느낌이 없다 했더니.
“낮게 잡아도 16김지안이다.”
“10억…?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왜 저번부터 자꾸 남의 연봉을 단위처럼 쓰는 겁니까?!”
“잃어버리지 말고 잘 갖고 있어. 누구한테 받았는진 절대 떠들고 다니지 말고. 아, 맞다 그리고 하나 더.”
“네.”
“이제 CCTV 켜 두시라고 경비 아저씨한테 전해.”
“…예?”
근처에 있던 다른 과장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속삭인 엘라마는 다시 소장실로 돌아갔다.
“뭐지.”
뭔가 나한테 말하지 않은 게 있는 모양이다.
툴레아 사장은 그게 뭔지 알고 있던 듯한데.
세계수로 만든 물건을 갖다준 사실이 드러나는 게 그리 두려운 걸까.
“으음….”
아무리 봐도 평범한 스마트폰 케이스다.
세계수라고 해도 원시 엘프가 아닌 이들에겐 그냥 크기만 큰 나무일 뿐, 차이점이 있다면 그나마 감촉이 좀 다르다는 거?
“이게 뭐라고 호들갑인지.”
일단은 시키는 대로 경비 아저씨를 찾아가 엘라마의 말을 전하기로 했다.
온화한 인상의 은행 경비는 마른 체구에 온화한 인상을 가진 노인이었는데 한쪽 눈이 불편한 듯 안대를 차고 있었다.
“대략 어떤 상황인진 알고 있어서 조금 전에 다시 켜 두었습니다.”
설명을 들은 경비는 이렇게 대답했는데 왠지 모르게 이런 상황에 몹시 익숙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그럼 다시 업무 보러 가 보겠습니다.”
이런 일이 자주 있는 걸까.
하긴, 차원신용금고는 예전부터 프라이빗 뱅킹 서비스도 해 왔으니 고객의 정보를 보호하기 위해 갖은 시도를 했을 것이다.
지구의 경우 워싱턴 조약으로 브라질리언 로즈우드처럼 멸종 위기에 처한 희귀한 목재는 국외 반출이 불가능하긴 하다.
다만, 이쪽 세상은 세계수로 가구를 만들어 수출하는 엘프들이 사는 곳이다.
가구 만들다 남은 재료로 휴대폰 케이스 깎아서 나눠 줬다고 뭐라 할 사람은 없을 텐데.
왜 CCTV까지 꺼 가면서 저렇게 호들갑을 떠는 걸까.
“수고하셨습니다.”
어느새 퇴근 시간이 되었길래 플루토와 과장 둘에게만 인사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선물받은 스마트폰 케이스는 역시나 굉장한 값어치를 지닌 물건인 듯해 차마 전화기에 끼우지 못하고 상자에 담긴 그대로 집으로 가져왔다.
동기인 아이작이 검진 간다고 하루 쉬었던지라 같이 밥 먹을 사람도 없고 하니, 배달 음식을 시키고 옷을 갈아입었다.
“세계수로 만든 가구. 보고 싶었는데.”
나 같은 서민에겐 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겠지.
분명 어딘가의 돈 많은 부자들이 경매에서 낙찰한 다음 자기만 볼 수 있는 곳에 두고 매일같이 천천히 감상할 게 분명하다.
정령들이 세계수의 조각을 다듬어서 만든 가구.
분명 33차원의 자연이 낳고 기른 지고의 목재로 만든 보물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런 가구 대부분이 미술관에 전시되는 게 아니라 이름 모를 개인의 서재에 박혀있게 될 거라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우울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름 나도 공로 컸다고 생각하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멋들어진 원목 테이블이 이사회 회의실에 놓일 걸 생각하니 뭔가 조금 분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도 세계수 가구려나. 그건 아니겠지?”
빡세게 구른 건 그들이 아닌 나였으니까.
뭐, 그래도 딱히 툴레아 사장에게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건 아니었다.
“이걸 선물 받은 것도 기적이겠지.”
나는 스마트폰 케이스를 상자에서 꺼내 들어 스탠드 조명에 비춰 보았다.
아깐 갑자기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에 놀라 꼼꼼하게 살피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나뭇결이 무척이나 곱고 아름답다.
상관없는 얘기지만 이딴 식으로밖에 어휘를 구사하지 못하는 걸 보니 글이 아닌 그림을 택했던 게 그나마 다행인 듯하다.
감촉 말곤 딱히 특징은 없어 보이는데, 세계수로 만든 가구가 가구의 개념을 바꿀 거라고 했던 툴레아 대표의 말은 허풍인 걸까.
아니면, 그냥 내가 문외한이라 보는 눈이 없는 걸지도.
-지리리리리
때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침대 옆 충전기에 꽂아 둔 스마트폰이 요란한 진동을 발하길래 봤는데 발신인이 밀라였다.
“어. 무슨 일이야.”
<오빠! 저 기념품!>
“…아.”
<…….>
“…담달에 들르니까 그때 사 올게.”
<아으 이 오빠 진짜…!>
맞다.
엘프 정보 받은 대신 기념품 사 오기로 해 놓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
* * *
야심한 밤, 김지안이 33차원에서 겪은 일들을 한창 밀라와 공유하는 동안, 그의 책상 위에선 기이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사아아아
김지안이 꺼내 둔 원목 스마트폰 케이스의 표면에서 흐릿한 광채가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퐁!
모습을 드러낸 건 손톱만 한 크기의 정령들이었다.
“뀨우우.”
“큐귯.”
“미이이….”
전화를 들고 주방 쪽으로 걸어가는 김지안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정령들이 제각기 소리를 발했다.
그것이 자식이든 무엇이든, 자신의 형상을 닮은 흔적을 세상에 남기려 하는 것은 모든 생명들이 품고 있는 간절한 소망.
엘프도, 정령들도, 세계수도, 모두가 마찬가지.
도태되어 잊혀져 가던 자신들의 수를 다시 늘릴 수 있도록 기회를 준 사내.
그에게 작은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 정령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