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27화
불침번을 제외한 이들이 모두 잠든 이른 새벽.
세계수의 1층에서 대치 중인 두 세력의 엘프들 사이를 소리 없이 지나가는 털 뭉치의 모습이 하나.
“뀩…… 규귝!”
새하얀 털을 몸에 두른 바람의 정령은 팔다리도 없는 몸을 고무공처럼 열심히 바닥에 튕겨가며 세계수를 나섰다.
그가 맡은 임무는 엘프들이 세계수의 고층과 저층을 오갈 수 있도록 승강기를 움직이는 것.
하지만 지금.
정령은 세계수를 떠나 라이노밀 시가지를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규웃, 규우 규우우…!!”
조그마한 몸을 바닥에 튕기며, 앞으로, 앞으로.
평소였다면 지닌 힘을 사용해 바람을 타고 움직일 수도 있겠지만, 이곳은 세계수의 밖이고 힘을 빌려줄 엘프는 이곳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무리를 해서 능력을 사용했다간 차원 이동의 충격을 견딜 수 없으니, 지금은 참고 견딜 수밖에.
도시에 가까워질수록 새하얀 솜털 같은 몸이 먼지로 더럽혀졌다.
오염된 공기에 순수한 생명력이 침식되어 갔다.
하지만 바람의 정령은 포기하지 않았다.
세계수가 품을 수 있는 엘프의 숫자에 한계가 있듯이, 같은 정령이 둘 이상 거주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 별에서 단 한 그루를 남기고 모든 세계수가 사라진 결과.
바람의 정령은 모든 동족을 잃고 외톨이가 되었다.
홀로 세상에 남은 그의 유일한 희망은 툴레아가 보관한 두 그루의 묘목이 영맥에 뿌리를 내림으로써 새로운 바람의 정령이 태어나는 것뿐.
그런 소중한 묘목을, 같은 정령을 시켜 억지로 태우려 한 자일리니 주교를 가만둘 순 없다.
엘프의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고 그 지배력을 따르는 정령으로서 주교에게 직접 해를 가하는 건 불가능하다.
허나, 정령은 간밤에 손에 넣고야 말았다.
주교의 모든 권리를 실추시키고 그의 모든 음모를 저지할 수 있는 열쇠를.
자일리니와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을 지닌 남자 사이에 오간 모든 대화를 엿들음으로써.
“큐우아아아!!”
새벽의 야음을 틈타 정령은 달렸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 그 모습이 기거나 굴러가는 것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정령은 필사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숲속에 난 도로를 따라서.
먼저 떠난 ‘그 남자’가 남긴 냄새를 따라.
남쪽으로, 남쪽으로.
그 남자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은행원이라고 불리며 툴레아가 특별히 신경을 써서 대하고 있었지만.
엘프만큼 오래 살지도, 정령들에게 일방적으로 명령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훨씬 특별한 것을 지니고 있었다.
바깥세상에서 정령술이 잊혀지기 더욱 오래전 소실된 힘.
잊혀진 여신의 권능이, 옆에 있던 민머리가 지닌 것보다 훨씬 큰 파편이, 그의 눈에는 깃들어 있었다.
정령은 엘프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지만, 반대로 엘프는 정령의 의사를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눈’을 지닌 남자라면.
바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오래된 신의 권능의 조각을 불완전하게나마 소지한 그에게라면.
분명 자신이 지난밤 엿들은 대화를, 자그마한 몸속에 남김없이 기록한 공기의 떨림을 재생해 줄 수 있다.
바람의 소리를 들려 줄 수 있을 것이다.
“귯…!!!”
그리고 장장 수 시간이 지났다.
희끄무레한 아침햇살이 내리쬐는 라이노밀 시가지.
죽을힘을 다해 굴러서 도착한 목적지.
-퐁!!
정령은 굳게 닫힌 차원 관문의 비좁은 문틈에 자신의 앙증맞고 말랑말랑한 몸뚱이를 욱여넣었다.
사람이 아닌 자신이 차원 이동의 위험을 온전히 견뎌 낼 수 있기를, 자신의 목소리가 닿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 * *
다음 날 아침.
아직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
-쾅!
혼자 직원용 통로를 통해 들어온 나는 곧바로 소장실 문을 열어젖혔다.
“좋은 아침입니다.”
“거창한 인사군.”
이쪽을 돌아본 엘라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듬성듬성 돋아난 수염. 초췌한 몰골은 그가 은행에서 밤을 지새웠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었다.
책상에 흩어진 오래되고 두꺼운 서적.
컴퓨터 모니터에는 개미처럼 자그마한 글자가 빽빽하게 채워진 화면이 떠 있어 보고 있기만 해도 눈이 아파질 정도다.
“퇴근하지 않으셨군요.”
“그런 네놈이야말로 제대로 잔 얼굴은 아닌데.”
우린 서로를 보고 말없이 웃었다.
엘라마가 말한 대로였다.
그와 달리 나는 숙소로 곧바로 돌아가긴 했지만 쉬거나 잠들진 않았다.
나는 지금 엘라마가 보고 있는 것과 같은 똑같은 자료를 밤새도록 확인했다.
어렵게 구매한 고대 엘프들의 경전과 교리 해석.
우리가 이번에 상대해야 하는 적인 주교와 정면승부를 벌이기 위해 필요한 무기들.
경찰을 부르는 대신 굳이 이런 자료를 조사한 목적은―
“…어느 쪽이냐.”
“소장님이야말로.”
“손목에 철판을 던져 버린 이상 더 세게 나가는 건 입장상 어렵겠지. 설득… 그러니까 수비에 집중하는 게 한계다.”
“공격은 제 몫이겠군요.”
여기까진 예상했던 대로다.
이번 일을 해결하기 위해선 엘라마와 내가 각자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야만 한다.
엘라마는 주교가 묘목을 태우면 안 되는 이유를 역설해 추종자들을 흔들어야 하며.
그동안 나는 주교를 공격해 무너뜨려야만 한다.
“…못 미더운데.”
엘라마는 잠시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주시하다 말했다.
“확인해 보시든가요.”
입을 제외하면 그 어떤 파츠도 움직이지 않는 게 꼭 면접 봤을 때가 떠올랐다.
그래. 저건 나를 시험하려 할 때 짓는 표정이었지.
“신목교의 교리가 정한 금기에 관해 말해 보도록.”
“음주, 문란한 교제, 이자가 발생하는 금전의 대여.”
“그렇다면 세계수를 섬기는 성직자의 덕목은?”
“사제는 무릇 청렴함을 모자로, 고결함을 장식으로 삼아야 하며 별의 신령에게 축복받은 어머니 되는 나무 앞에 일생을 온전히 바쳐야만 합니다.”
“…아주 기본적인 건 외워 둔 모양이군. 그렇다면, 누군가가 주교에게 교리문답을 청했을 땐?”
“어떤 상황이든 반드시 응해야만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이번 사태를 해결할 열쇠가 되어 줄 규율이었다.
교리문답敎理問答이란 종교적인 가르침을 질문과 대답으로 나누어 신도를 훈육하는 행동.
상대가 누구든지 물음을 청하는 자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자에게, 신목의 주교는 반드시 응해야만 한다.
너무 오래되어서 이젠 세계수의 엘프들조차 잊어버린 규칙.
신목을 섬기는 이들은 이미 오래 산 엘프들이 대부분이기에 교리에 통달해 있다.
그러다 보니, 주교에게 문답을 신청하는 이는 진즉에 사라진 지 오래다.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마지막 공식 교리문답은 480년 전.
고대 엘프들처럼 세계수와 그 안에 깃들어 있다고 하는 별의 신령을 신으로 모시는 건 아니지만, 써먹을 수 있는 수단은 모조리 써먹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해. 그 정도 지식 갖곤 교리문답으로 주교를 논파할 순 없어.”
“애초에 설득이나 논파가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말이 통하는 상대였으면 화분에 불을 지르려 하진 않았겠죠.”
“잘 알고 있군.”
엘라마가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네놈보단 내 기억력과 집중력이 뛰어난 것 같아서 말이다.”
“자랑이신가요. 잘나셔서 부럽네요.”
“끝까지 들어라. 이미 예상했겠지만 나는 주교가 묘목을 태워선 안 되는 이유를 들어 엘프들을 설득해 볼 생각이다.”
“진심인가요?”
그게 과연 가능이나 할까.
아무리 막사는 노인네라 해도 상대는 주교다.
교리에 통달한 건 물론 궤변에도 도가 텄을 법한 사람.
“당연히 아니지. 하지만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반박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면 추종자들을 흔들 수 있어.”
나는 그제야 엘라마의 의도를 이해했다.
“추종자들 앞에서 말로 밀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오만가지 핑계를 대려 하겠군요.”
“혹은 나를 보는 눈이 적은 곳으로 데려가려 하거나.”
“어느 쪽이든 주교를 한 자리에 오랫동안 묶어 둘 수 있겠군요.”
엘라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게 시간을 벌어 주려 하고 있었다.
자신이 주교를 묶어 둔 사이 대중의 신뢰를 무너뜨릴 수 있는 폭탄을 가져와 터뜨릴 수 있도록.
“세계수를 섬기는 주교가 묘목을 태우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아. 분명 무언가 교리에 어긋나는 짓을 뒤에서 벌이고 있을 거다. 높은 확률로 돈 문제이겠지.”
“헌데, 그걸 밝혀낸다 해서 주교를 따르는 노인들이 태도를 바꿀까요?”
나는 알고 있다.
이미 지구에서 수도 없이 봤다.
사이비 교주의 실체가 밝혀지더라도, 그의 더러운 추문이 드러나더라도 그를 믿고 따르던 사람들의 대다수는 현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끝까지 교주의 말만 듣고 진실을 까발리거나 교주를 추궁하는 이들을 공격해 댔지.
“어렵겠지. 사람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동물이니까.”
“…….”
나도 모르게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엘라마가 생각하기에도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한 모양이었다.
“나이를 많이 먹은 이들일수록 자존심 때문에라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짙은 법이다. 주교를 따르는 이들은 대부분이 노년층. 쉽게 자일리니를 내치려 하지 않을 거야.”
“그럼 주교를 공격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씀인가요?”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지?”
“아니, 방금―”
“네가 해야 할 일은 주교가 모든 엘프들에게 직접적으로 해가 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해 내는 거다.”
망치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렇다, 내가 해야 하는 건 주교의 도덕성을 공격하는 정도의 미지근한 일이 아니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고 있다간 멸종을 앞둔 세계수의 엘프들에게 미래를 줄 수도, 1,300억 굴덴이라는 거액의 고이자 대출을 실현시켜 출장소에 실적을 안겨 줄 수도 없다.
주교는 자신이 속한 종족의 미래를 내다 버리려 했다.
그 배경에 어떤 이유가 있든 그 행동은 악한 것.
사정을 봐줄 필요조차 없다.
그가 지닌 명망과 추종자를 없애 버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자신이 있다.
‘기억해 주세요. 어디까지 저질러도 되는지,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아니면 언젠가 선을 넘게 될지도 몰라요.’
“…….”
설령 그것이 거짓말이어도 좋다. 물론 주교가 더러운 진실을 감추고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다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그를 무너뜨릴 수 있을지는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해야 주교를 지지하는 이들이 돌아서게 만들 수 있을까.
-콰앙!
그때였다.
문밖에서 무언가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은행강도?”
곧바로 책상 서랍에서 권총을 꺼내든 엘라마가 소장실 문을 열고 밖으로 총구를 겨눴다.
여기 총기 소지 합법이었던가….
“웬 놈이냐!”
기세 좋게 밖으로 뛰쳐나간 그를 따라 조심조심 허리를 숙이고 나간 내 시야에 뜻밖의 물건이 비추었다.
“…어?”
정정.
물건이 아니라 생물이었다.
잔뜩 더러워졌지만 여전히 햄스터처럼 생긴 부들부들한 몸을 떨며 겁에 질려 있는 건.
“큐우….”
세계수에서 내게 몸을 비벼 대던 바람의 정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