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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26/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26화

차원신용금고의 은행원들이 비밀 계단을 지나 기차역으로 출발한 지 여섯 시간 후.

산탄초넬로 죠사벨라 숲의 세계수에서 벌어지던 대립은 주교를 따르는 일부 노년층 엘프들의 체력 고갈로 인해 일시적인 소강상태에 돌입하고 있었다.

정령술은 차원신용금고의 은행원들이 다루는 직무권능처럼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의 힘을 빌리는 능력이지만 술사의 기력이 소모된다.

아득한 세월을 살아온 고대 엘프들에게 있어 정령을 부리는 건 그들의 팔다리를 움직이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나이에 장사는 없는 법.

툴레아를 따르는 카펠리아 디 드리아데의 장인과 사원들이 승강기 통로를 봉쇄하기 위해 만든 바위 천장은 결국 뚫리지 않았다.

주교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고층에 있는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세계수 1층에 텐트를 치고 드러누웠다.

“어어딜 어린놈들이 감히 세계수를 지들 멋대로….”

“고마운 줄도 모르고 날뛰는 꼬라지를 보라지. 이래서 역사를 잊은 민족은 망한다는 거다.”

나이 든 엘프들은 제각기 불침번을 서는 젊은 엘프들에게 욕지거리를 던지고 침낭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아직 무력 충돌이 일어나진 않았어도 옥상에 둔 묘목이 불타지 않도록 지켜야 하는 젊은 엘프들에겐 한 치의 방심도 용납되지 않는 상황.

세계수 1층 한복판에 호화로운 대형 텐트를 세우고 자리를 잡은 신목의 주교 자일리니 밤비노의 표정 역시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다만, 그가 착잡한 심정을 품고 있는 건 비단 위층으로 올라가는 길이 막혔거나 은행원이 던진 철판 가발에 맞은 손등이 욱신거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었으면 하네.”

카펫이 깔린 텐트 안, 주교는 자신과 마주 보고 앉은 사내 앞에서 당혹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꿀꺽

정적이 감도는 천막 안, 자일리니 주교가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다.

잔뜩 긴장한 주교의 얼굴.

예상치 못한 채권자의 방문이다. 돈을 잔뜩 빌린 상대가 연락 없이 찾아왔으니 당연한 반응.

반면, 그의 텐트를 찾아온 사내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미소가 입가에 달라붙어 있었다.

“에이, 주교님도 참. 저희가 어떤 사이인데 그러세요. 당연히 기다려 드려야죠.”

사내의 말에 주교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이 아주 약간이지만 펴졌다.

걱정하고 있던 것과 달리 상대는 추심을 위해 이곳을 찾은 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이미 15년도 넘게 기다렸는데 며칠 더 기다린다고 달라지는 건 없잖아요?”

하지만, 이어진 상대의 말에 자일리니의 표정은 급격하게 썩어들어 갔다.

상대가 빌린 도박 자금을 어서 갚으라고 돌려 말하고 있었지만 주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상환 기간을 넘기고 연체 이자가 붙기 시작한 지 어언 15년.

찰나의 일탈로 사채업자에게 소액을 빌려 도박을 시작한 주교의 빚.

눈더미처럼 불어난 이자를 감당하지 못한 그는 상환 기간을 늘리기 위해 추가로 담보를 내놓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가 질권을 설정한 건 바로, 자신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은행이 나무를 담보로 잡았다간 곤란해집니다. 알고 계시죠?”

“…….”

엘프 이상으로 희다 못해 창백한 피부를 지닌 미남자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일리니 주교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돈을 갚지 못한 건 자신의 잘못이다.

잠시 수중에 자유롭게 운용할 돈이 없다는 이유로 남자에게 대출을 받은 이후로 자일리니는 몇 번이나 불법 도박장에서 거액의 자금을 잃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사내는 친절한 미소로 ‘주교의 명망과 신용도를 믿겠다’고 속삭이며 추가로 담보 등을 잡는 일 없이 상한 기한을 연기해 주었다.

사내의 말에 자신감을 되찾은 자일리니는 자신이 빌린 액수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갚을 수 있다고 믿어왔다.

이어진 방심. 주교는 해마다 설정된 상환 기한을 어기며 도박으로 진 빚을 갚는 대신 돈을 물 쓰듯 썼다.

그런 방만한 마음가짐이 불러들인 결과는 참혹했다.

복리로 늘어난 채무는 어느덧 자일리니가 갚을 수 없는 액수까지 불어났다.

뒤늦게 부랴부랴 신령교 신도들의 헌금에도 손을 댄 자일리니였지만 그 돈을 갖고도 채무를 상환하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매해 이자를 조금 갚아 봐도 빚은 줄어들긴커녕 늘어만 갔다.

그리고 최초 상환 기한을 15년이나 넘어선 지금, 사내는 주교가 잡은 담보의 소유권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중이었다.

그 담보란 바로.

“아무리 전산에 기록되지 않는다 해도 먼저 세계수에 질권을 설정한 건 접니다.”

주교와 다른 고대 엘프들이 살고 있는 세계수였다.

“그렇지. 상환이 불가능해진 지금, 이 나무는 자네의 것일세.”

“잘 기억하고 계셔서 정말로 다행이에요. 잊어버리셨으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사내는 가방에서 꺼낸 서류를 자일리니 주교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얼굴이야 생글생글 웃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저항할 수 없는 냉기가 그 주변에 감돌고 있었다.

딱히 긴장 탓에 그런 건 아니다.

사내가 무언가 말할 때마다 천막 안의 기온이 1도씩 떨어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실제로 지금 주교는 벌벌 떨고 있었고 입에서 하얀 김이 나오고 있다.

“…….”

사채업자가 지닌 정체불명의 능력에 휘말린 자일리니는 몸이 천천히 굳어가는 감각에 적잖게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화륵

몸을 덥히기 위해 불의 정령을 불러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주교의 부름에 답해 나타난 정령은 정체불명의 냉기에 겁을 집어먹고 곧바로 모습을 감췄다.

“제때 돈을 갚지 못하셨지만 괜찮아요. 충분한 가치를 지닌 담보를 내놓으셨으니. 다만, 은행이 손을 댔다간 제가 몹시 곤란해진다는 거, 알고 계시죠?”

“그야….”

“안심하세요. 제가 세계수의 권리를 가져간다고 해서 여러분을 당장 나무에서 내쫓을 생각은 없어요.”

“…쿨럭! 커어… 커허억!!!”

건조한 냉기를 견디지 못하고 주교가 맹렬한 기세로 기침을 시작했다.

입을 가린 손바닥에는 목과 입안이 찢어지며 나온 피가 흥건히 묻어 있었다.

“그만… 이제 그만… 제발….”

정령들조차 두려워하는 힘을 지닌 사채업자 앞에서 주교는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하기 시작했다.

사내의 바지를 붙잡은 노인의 손끝은 냉기에 침식당해 서리에 뒤덮여 있었다.

“이런.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일어나시죠.”

사채업자는 실수였다고 사과하는 듯 작게 고개를 까딱거리고는 바닥에 엎어진 주교를 일으켜 세웠다.

발하고 있던 혹한의 냉기를 거두자 노인은 그제야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시 소파에 파묻히듯 웅크렸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노파심에 다시 한번만 부탁드리자면. 은행이 세계수를 담보로 삼게 두지 말도록 각별히 신경 써 주시길 바랍니다.”

사내가 주교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일견 무해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주교는 그가 자신의 목숨 따윈 언제든지 거둘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대출이 성사되어선 안 됩니다. 만에 하나, 그들이 나무를 담보로 잡게 된다면―”

사채업자의 눈이 주교의 가슴팍 언저리를 향했다.

마치 갈비뼈 안에서 박동하는 심장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저는, 나무 대신 다른 것을 받아 갈 생각입니다.”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그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주교는 대답하는 대신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움켜쥐고 날뛰는 호흡을 진정시켰다.

“허억… 허억….”

세계수의 묘목을 불태우지 못하면 어떤 결말이 다가올지 상상이 갔다.

“뀻….”

그 불길한 상상 탓에, 그는 조그마한 털 뭉치의 모습을 한 정령이 천막에 달라붙어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 * *

툴레아의 차를 타고 무사히 라이노밀 시가지로 돌아온 우린 차원 관문을 통해 6-2차원 키키와이 출장소로 복귀했다.

엘라마는 돌아오자마자 소장실 문을 닫고 안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있는 듯 말소리가 들렸지만 문과 벽이 두꺼워 제대로 들리지가 않았다.

아마 주교를 설득하기 위해 여기저기 연락해 필요한 정보를 모으고 있는 거겠지.

그러고 보니 아까 엘라마가 그레이트후리텐의 전통극 카르부크의 대표적인 희극 중엔 세계수의 엘프들이 주인공인 것도 있다고 그랬던가.

카르부크를 계승하는 열두 가문 중 필두인 워치가의 장남이었던 그라면 집안의 인맥을 통해 오래된 카르부크의 자료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단서가 남아 있으면 좋으련만.”

워낙에 유능한 사람이니 알아서 하겠지만, 여전히 내 안에선 안심감보단 불안감이 앞서고 있었다.

상대는 두 그루 남은 마지막 세계수의 묘목을 불태우려 한 작자다.

그들이 신봉하는 교리가 어떤 건진 모르겠지만 세계수를 신봉한다면서 그 자식이라고 할 수 있는 묘목을 없애려 든 주교와 이성적인 대화가 가능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과연 이야기가 통하는 상대일까.

교리문답으로 설득이 가능하다면 좋겠지만 아닐 경우엔?

“…….”

카펠리노 디 드리아데의 엘프들이 처음 은행을 찾아온 날, 직무권능은 대출이 성사되고 엘프들이 1,300억 굴덴을 무사히 상환하기 위해선 개입이 필요하다고 예고했다.

그리고 그 개입이란, 엘라마가 할 게 아니라 직무권능의 주인인 내 자신이 움직여야 한다는 뜻일 터.

엘라마는 최연소로 차장 자리를 꿰찬 엘리트 중의 엘리트.

반면 나는 입행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은 신입 행원. 그야말로 졸병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엘라마도 모두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내가 할 수 없는 일까지 해낼 역량과 인맥을 모두 지니고 있다.

그런 그가 아닌 내가 굳이 이 사태에 개입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어째서 직무권능은 그가 사태를 해결하게 둘 게 아니라 내가 주동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계시를 내린 걸까.

어쩌면, 내가 해야 하는 건 ‘엘라마가 할 수 없는 일’이 아니라 ‘엘라마라면 하지 않을 일’이 아닐까.

“…….”

엘라마는 독불장군이지만 그가 지금의 자리까지 승승장구할 수 있던 건 과도한 리스크를 짊어지지 않도록 줄을 타는 밸런스 감각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가 주교를 설득하려는 이유는 본능적으로 주교를 자극했을 때 발생하는 위험과 얻을 수 있는 이득을 저울질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심지어 그는 아까 철판이 덧대어진 가발을 던져 주교를 다치게 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라고 해도 은행원이 타인을 다치게 했으니 대비를 하지 않으면 곤란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다행히 이번 일은 나머지 두 파벌의 이득 역시 걸려 있으니 주교가 은행에 클레임을 걸어도 엘라마가 불이익을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가 한 건 어디까지나 대출을 방해하려는 주교의 범죄를 막기 위한 영웅적인 행동이었으니까.

다만 그것이 과격한 행위였다는 사실에 변함은 없다.

이 이상 그가 탈법적인 수단을 사용했다간 입장이 난처해질 터.

아니. 이미 어느 정도 손발이 묶여 있는 상태일 것이다.

은행은 이미지를 먹고 산다.

은행원이 노인을 다치게 했으니 작은 문책은 피할 수 없을 터.

이번 일로 그동안 지켜온 엘라마의 완벽한 커리어에 흠집이 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시작된 건, 내가 직무권능으로 이번 대출이 성공할 거라고 예견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국.

“움직일 수 있는 건―”

나뿐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해야 한다.

“…….”

은행의 상사란 으레 부하의 공로를 가로채고 책임을 떠넘기는 족속들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슬리크 엘라마는 자신의 몸을 던져 내가 담당한 대출이 성사될 최후의 찬스를 만들어 냈다.

쌓아 올린 반짝이는 경력에 흠집을 내면서까지 만들어 낸 기회.

그걸 살리지 못하면 은행원로서 실격이겠지.

‘기억해 주세요. 어디까지 저질러도 되는지,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아니면 언젠가 선을 넘게 될지도 몰라요.’

포독스를 떠나기 전 델 몬테 지점장이 건넨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질러 볼게요, 지점장님.”

설득할 수 없는 적을 상대해야 한다면, 쓰러뜨리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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