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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25/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25화

횃불이 두 그루의 세계수 묘목을 불태우기 직전, 질주하던 엘라마가 돌발행동에 나섰다.

그가 쓰고 있던 기다란 금발 가발을 벗은 순간, 천장에 매달린 물의 정령들이 발하던 빛이 반사되어 횃불을 든 엘프의 눈을 찔렀다.

“……?!”

빛의 화살에 안구가 직격당해 주춤하는 노인.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엘라마가 벗은 가발의 뒷면에는 철판이 덧대어져 있었다.

-부웅!

전력으로 던진 가발. 원심력에 의해 펼쳐진 황금색 머리카락이 아름답게 회전했다.

-캉!

날아간 철판, 아니 가발이 엘프의 손목에 직격.

“아악!”

노인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횃불을 떨어뜨렸다.

만들어진 빈틈. 이 기회를 놓치면 세계수의 묘목이 상하고 만다.

나는 달려가던 자세 그대로 헤드 슬라이딩을 시도했다.

묘목에 불똥이 튀기 전 어떻게든 화분을 캐치한 직후.

“아뜨뜨뜨뜨뜨뜨뜨!!!!”

떨어진 횃불이 내 허리에 직격했다.

* * *

다행히도 제대로 써 보지도 못한 허리가 중도의 화상을 입는 일은 없었다.

열기를 느낀 다음 순간 툴레아와 다른 엘프들이 불러낸 정령들이 일제히 찬물을 쏟아부어 준 덕분이었다.

그나마 정장 재킷이 두툼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녹아내린 셔츠와 피부가 달라붙어 하나가 될 뻔했다.

“이상은 없습니다. 건강하군요.”

나는 세계수 내부에 위치한 병원에서 간단한 진료를 마치고 퇴원했다.

한계를 넘은 속도로 뛰어가 묘목을 캐치한 탓에 근육통이 심했지만 그 외엔 아무 문제도 없다.

정장 재킷이 불에 타고 나머지가 흠뻑 젖은 게 문제였지만.

“주교가 큰 폐를 끼쳤습니다. 정말로 면목 없습니다.”

눈앞에서 담보 현장실사 나온 은행원의 옷에 불이 붙는 걸 봐서일까, 툴레아는 침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뜻밖의 상황이었는데 저렇게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니 화도 나지 않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다친 데도 딱히 없고―”

“차원신용금고에서 오랫동안 일해 왔지만 이런 일은 처음 봅니다. 이사회에 보고할 수밖에 없겠군요.”

하지만 엘라마는 상당히 화가 난 모습이었다.

꼴에 상사라고 부하 직원 챙겨 주는 걸까.

“…저 진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나는 툴레아에게 양해를 구하고 빠른 걸음으로 엘라마를 따라갔다.

“어떡하실 생각입니까.”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 그는 특유의 사나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잘했다. 김지안. 이제 더 유리한 조건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인간, 내 옷에 불이 붙은 건으로 시비 털어서 뭔가 이득을 취할 생각이 틀림없다. 미친놈인가 진짜.

“그게 다칠 뻔한 부하 행원에게 할 소리입니까.”

“인센티브가 올라가는 게 그렇게 기분이 나쁜 일인가?”

“…….”

너무 뻔뻔하게 말하길래 대답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제 옷에 불 좀 붙었다고 1,300억 대출 안건이 날아가는 건 피하고 싶습니다.”

“이제야 뱅커다운 소릴 하는군. 목숨이 날아갈 상황이 아닌 이상 이익은 모든 것에 우선한다. 기억해 두도록.”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좀 이용당한 것 같아서 화가 났지만 차라리 이게 낫다.

엘라마가 내가 다칠 뻔했다는 이유로 화를 냈다면 대출이 성사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을 이용해 은행이 더욱 큰 이득을 취할 수 있도록 머리를 굴리고 있다.

아예 엘프들이 돈을 빌리지 못하는 것보단 이쪽이 훨씬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겠지.

“이사회를 움직여 5년에 한 번씩, 30년 동안 9%의 이자를 원금과 함께 상환하도록 요구할 생각이다.”

“9%요? 담보 대출 치곤 이자가 너무 높은데요?”

“1,300억 굴덴은 적은 돈이 아니다. 30년이나 묶여 있는 리스크를 생각한다면 9%가 비싼 건 아니지.”

“다른 은행이 먼저 이 안건을 채갔다간….”

“이 차원의 모든 은행을 돌아다녀도 빌려줄 상대가 없었으니 우릴 찾아온 거다, 멍청하긴.”

듣고 보니 그렇다.

굳이 차원을 넘어온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겠지.

행성 전체가 단일 국가이자 사람이 살 수 있는 대륙이 하나밖에 없는 윌럼데포르메는 경제적으로 썩 여유가 있는 편이 아니었다.

이곳, 북부의 바르디아주가 벌어들인 돈으로 다른 지역을 먹여 살리고 있는 상황.

여러 은행이 손을 잡고 차관단을 만들어도 세계수를 담보로 잡고 1,300억 굴덴을 가구 회사에게 빌려주긴 힘들 거다.

아까 우리만 해도 빌려주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으니, 다른 은행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진 쉽게 상상이 갔다.

즉, 세계수의 엘프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유일한 은행은 차원신용금고뿐.

9%는 분명 적은 금리가 아니지만 세계수로 만든 가구를 판다면 충분히 상환할 수 있는 액수다.

나는 차원신용금고의 은행원이다.

고객을 배려하는 동시에 은행의 이익을 좇아야 하는 입장에 있으니 엘라마가 높은 대출 금리를 고려하는 걸 반대할 순 없다.

아니, 오히려 지지하는 게 옳다.

“그렇게 생각하면 9%도 비싼 게 아니겠군요.”

“오히려 양심적인 쪽이지.”

엘라마는 언제 다시 주워온 건지 엘프들과 똑같은 기다란 금발 가발을 쓰고 있었다.

“그나저나, 네가 직무권능으로 예측한 대로 되었군.”

“예. 하지만 설마 이런 일일 줄은….”

여신판단의 힘을 사용했을 때 나는 이번 대출 안건에 내가 적극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다만 나는 예언자가 아니다 보니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입해야 할진 몰랐는데, 아예 세계수의 묘목 두 그루가 불타 없어질 뻔할 줄이야.

사실을 말하자면 아까 정신없이 구르다 물벼락 맞느라 묘목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툴레아가 안전하게 잘 모셔뒀으려나.

“아까 바로 실려 가느라 신경 못 썼는데, 묘목은 안전한가요?”

“…일단은.”

엘라마는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댔다.

그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일단은, 이란 건 무슨 뜻이죠?”

엘라마는 대답 대신 가운데가 뚫린 도넛 모양의 플로어 안쪽 난간에 기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바람의 정령의 힘으로 움직이는 승강기가 다니던 통로는 어떻게 된 일인지 거대한 바위로 틀어막힌 상태였다.

“저건… 대체….”

“네가 살린 묘목은 툴레아 사장의 측근이 꼭대기 층에서 보호하고 있는 중이다.”

“그럼 올라가는 길을 막은 것도?”

“땅의 정령의 도움으로 통로를 봉쇄했다. 주교와 추종자들이 올라올 수 없도록.”

주교였구나 아까 그 노인네. 어쩐지 종교인 느낌이 많이 나던데.

“아까 본 두 개가 영맥에 심길 예정인 거죠?”

“그래. 저게 없어지면 세계수의 엘프들은 더는 숫자를 늘릴 수 없을 거다.”

그걸 없애려 하다니, 어지간히 미친 게 아니고서야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물건을 없애려 들다니, 신앙의 대상을 잃을 바에야 천천히 죽어가겠다는 뜻일까요.”

“중세의 순교자도 아니고, 이해할 수가 없군.”

목숨보다 중요한 게 있는 사람들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충분히 미래를 생각해 계획을 준비한 툴레아조차 세계수를 담보로 잡겠다고 말했을 땐 미친 게 아닌가 싶었는데.

아예 동족들의 수명을 날려 버리려고 하는 주교의 행동은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 번 실패했어도 계속 묘목을 없애려 들지도 모르겠네요.”

엘라마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몇천 년 묵은 나무를 잘라내려 하는 시도 자체를 배신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야.”

난간에 기대 시선을 아래로 떨구자 웅성대는 두 무리가 대치 중인 게 보였다.

한쪽은 작업복과 정장을 착용한 젊은 엘프들.

다른 한쪽은 전통의상을 몸에 두른 노년의 엘프들.

전자는 툴레아와 뜻을 함께하는 카펠리노 디 드리아데의 장인들과 사원일 테고.

후자는 주교를 따르는 무리인 듯했다.

두 집단의 주위엔 다양한 형태와 색깔의 자그마한 정령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그들 역시 엘프들의 뜻을 따라 서로를 위협하고 있었다.

정령술이 정확히 어떤 힘인진 자세히는 모르지만 바람으로 승강기를 152층까지 올려보낼 수 있다면 사람을 해치는 것도 어렵지 않을 터.

두 집단이 충돌을 일으킨다면 유혈사태로 번질 위험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승강기 통로를 막은 바위가 돌파당했다간….”

“꼭대기 층에 보관 중인 묘목이 불타 없어지겠지.”

“…….”

“당연한 얘기지만 묘목이 없으면 대출은 불가능하다.”

“위에 있는 것 말곤 더 구할 수 없으려나요.”

“툴레아 씨는 저 두 그루가 마지막이라고 했다.”

대출도 대출이지만 아예 세계수의 엘프들이 멸종의 위기에 처할지도 모른다.

이미 다 자란 세계수는 이들의 인구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새 나무를 심지 못한다면 계속해서 머릿수가 줄어들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겠지.

내가 속한 집단이 아니더라도 다른 종족의 멸종을 지켜보는 건 썩 유쾌한 일이 아니다.

절벽으로 달려가는 레밍 무리와 그들의 발목을 붙잡는 다른 레밍들을 보는 기분.

아니, 그보다 일단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나 있긴 한가.

일촉즉발의 위태로운 분위기가 흐르는 1층.

출구로 나가려면 정령들을 데리고 무력시위를 시작하려 하는 위험한 노친네들 사이를 지나가야만 한다.

저들의 주된 타깃은 툴레아와 묘목인 것 같지만 툴레아의 협력자로 간주된 우리도 적대시되고 있을 터.

무기라곤 아까 던진 철판이 덧대어진 가발 말곤 없는 우리가 성난 군중을 뚫고 갈 수 있을까?

“…근데 가발에 쇠는 왜 들어 있는 겁니까. 무기로 쓰려고요?”

“강풍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그런 것 치곤 능숙하게 던지시던데요.”

“이런 일을 겪는 게 처음은 아니라서.”

“아까하고 말이 다르시지 않습니까.”

“네놈은 협상의 기술에 관해 전혀 모르고 있군. 교통사고를 당했을 땐 일단 경적 위에 죽은 듯이 엎어져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

하여튼 능구렁이 같은 인간 같으니라고.

내가 다칠 뻔했다고 화낸 게 연기인 건 알고 있었지만. 아까 같은 일을 겪은 게 처음이라는 말까지 거짓일 줄은 몰랐다.

“어쨌든, 네녀석이 다치지 않아 다행이다. 일단은 무사히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보기로 하지.”

“걱정해 주실 줄은 몰랐는데, 의외네요.”

“멍청하긴. 출장 나가서 부하가 다치면 누가 시말서를 써야 하는지 모르겠나?”

그럼 그렇지. 엘라마한테 조금이나마 인간미를 기대한 내가 바보였다.

“흠.”

그런 내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엘라마는 1층에 모인 군중과 손목시계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슬슬 출발하지 않으면 차원 관문이 닫히겠군. 서둘러야겠어.”

“저 환자복 차림인데요?”

“그게 어쨌다는 거지.”

“이 꼴로는 나갈 수 없습니다.”

“당연히 갈아입어야지.”

“뭘로요?”

엘라마는 대답 대신 들고 있던 수트 케이스를 열었다.

-덜컹

무슨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겉으로 보이는 크기보다 훨씬 많은 내용물이 들어 있는 가방.

마치 보이지 않는 커다란 주머니가 이어져 있는 것만 같았다.

“…뭔가 많이 들어 있네요.”

안에 든 물건은 다양했다.

소화기에 접이식 텐트, 그리고 곡괭이 같은 도구, 그리고 기타 등등.

차곡차곡 정리된 짐 중에는 적당한 사복 두 벌이 포함되어 있었다.

“경량화 처리와 공간 확장 처리를 마친 마도공학 가방이다.”

죄송하지만 엘라에몽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그런 게 있었군요. 저도 갖고 싶은데.”

“15김지안 정도로 판매 중이니 하나 사든가.”

“그건 무슨 단위입니까.”

“네놈의 연봉 15년 어치다.”

“다 좋은데 왜 저런 물건까지….”

“해외나 다른 차원으로 출장을 갈 땐 부득이하게 현지에 묵어야 하는 일도 있다고 연수원에서 가르쳐 주지 않았나?”

“전혀요.”

“이래서 실무 경험 없는 사내 강사들이 문제라는 거군.”

엘라마는 꺼낸 옷을 내게 건넸고 우린 재빨리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선글라스와 귀를 가리는 벙거지 모자, 그리고 마스크까지 착용하자 어느 정도 변장 효과가 있는 듯했다.

“뭔가 메이플스토리 아바타 같은데….”

“방금 뭐라고 했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복도로 나오자 툴레아가 우릴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밖으로 이어진 비밀 계단이 있습니다. 역까지 차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우린 툴레아의 안내를 받아 1층에 모인 늙은 엘프들의 눈을 피해 무사히 세계수 밖으로 나왔다.

주교를 따르는 무리가 전부 세계수 안에 있던 덕분에 변장을 들키는 일 없이 차에 타고 기차역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

“…….”

숨이 멎을 것만 같은 침묵.

한순간에 종족의 미래를 잃을 위기를 겪은 툴레아의 얼굴은 피부색이 옅은 다크엘프처럼 보일 정도로 흙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제 불찰입니다. 자금을 구할 방법이 생기면 주교도 납득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참담한 표정의 툴레아를 위로할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본점에 이번 사태가 알려진다면 기업여신부는 품의서에 도장을 찍지 않을 것이다.

가시적인 리스크가 있는 상황에서 1,300억이란 거액을 빌려주려 하는 은행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상대가 누구든 내가 맡은 대출을 망치게 두지 않을 거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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