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24화

세계수를 재료 삼아 가구를 만든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받은 충격은 결코 적지 않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아까 본 늙은 엘프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일족에게 생명력을 공급하는 이 거대한 나무를 신으로 모시고 숭배하고 있다.

만일 툴레아의 말대로 세계수를 토막 내 가구를 만든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

“고객님께서 담보로 잡으려는 건 세계수입니까, 아니면 일족의 목숨입니까?”

세계수 안에서 잠들지 못하면 이곳의 엘프는 생명력을 공급받을 수 없다고 들었다.

그런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될 경우, 엘프의 건강은 악화되고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죽게 된다.

세계수의 엘프는 대부분의 엘프보다 수명이 길지만, 나무를 잃게 되면 인간의 두 배 정도밖에 살지 못한다.

툴레아가 대체 무엇을 원하는 건지 나로선 이해가 가지 않을 따름이었다.

“걱정할 일 없습니다. 영맥에 심은 세계수는 평범한 땅에 심은 것보다 몇십 배는 빨리 자라니까요.”

“세계수, 평범한 땅에도 심을 수 있던 거군요.”

나는 그제야 과거 윌럼데포르메 행성을 수많은 세계수들이 채우고 있었다는 밀라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영맥이 없는 땅에 세계수가 자라나지 못했다면 그런 일은 불가능했겠지.

“예. 하지만 영맥이 아닌 곳에 나무를 심는다면 자랄 때까지 수백 년은 족히 기다려야 합니다.”

이제야 저 엘프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지 알 것 같았다.

“두 그루를 심고 30년을 기다리면 저희 일족이 전원 이주하고도 남을 공간이 생길 겁니다. 저희는 5년마다 한 번씩 새로운 나무로 동족들을 보낼 생각입니다.”

“그럼 세계수를 가구 재료로 쓴다는 건―”

“예. 처음엔 가지치기부터 시작해서 점점 위층이 빌 때마다 세계수의 일부를 잘라내 가구로 만들어 출시할 겁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방안이었다.

위층에 있는 사무실이나 방이 빌 때마다 세계수를 조금씩 잘라내 가구로 만들어 판매한다.

5년에 한 번씩 엘프들은 자라나는 새 세계수로 이주해, 30년이 지나면 모두가 두 그루의 나무로 이사를 마치게 된다.

그때가 되면 기존에 살던 나무의 뿌리까지 가구로 만들어 팔아도 생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5년에 한 번씩, 새로운 세계수 가구의 컬렉션을 발매하겠습니다.”

“총 여섯 번 제작되겠군요.”

“전부 판매가 끝나면 최소한 다음 천 년 동안은 구할 수 없을 겁니다.”

희소가치는 보장되어 있다.

그리고, 수천 년에 걸쳐 엘프들에게 생명력을 부여하던 신비한 거목으로 만든 가구엔 희소가치 이상의 무언가가 존재할 것이다.

그게 뭔지는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하나 분명한 게 있다면 세상의 호사가들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란 사실이다.

직감이 외친다.

상상할 수 없는 부를 지닌 이가.

작은 도시 하나를 통째로 살 수 있는 자가.

카펠리노 디 드리아데의 새로운 가구를 원해 마지않을 거라고.

“계획대로 판매가 진행된다면 경영 자금과 새로운 세계수를 위한 영양제와 비료를 구매해도 남은 판매대금으로 충분히 원금과 이자를 갚을 수 있을 겁니다.”

엘라마의 눈을 이채가 스치고 지나갔다.

경험 많은 뱅커인 그 역시 이 프로젝트가 돈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자신들이 지닌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신목을 잘라 만든 가구를 팔려 하는 엘프.

목재에 장인정신이 새겨지기 앞서 광기가 먼저 자리를 차지하려 하고 있다.

신성불가침한 영역을, 그어진 선을 넘어 부수는 시도.

통쾌함마저 느껴지는 툴레아의 대담무쌍한 결정은 우리의 상상력을 계속해서 자극했다.

고급 목재로 제작한 가구가 최고 수십억 굴덴의 가격에 낙찰되었다면.

모든 차원을 통틀어 단 한 그루밖에 존재하지 않는 특별한 나무를 정령들과 깎아 만든 가구는 과연 얼마에 팔릴까.

나는 은행에 취업하기 전 고급 가구에 관해 찾아본 적이 있었다.

캐리커처를 그리기 전, 한창 열심히 그림을 배우고 공부하던 시절 접한 아름다운 해외의 가구들.

18세기에 영국 귀족이 30명의 피렌체 가구 장인에게 주문해 장장 6년 동안 제작된, 지구에서 가장 비싼 가구인 ‘배드민턴 캐비닛’이 경매에서 400억 원에 낙찰되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비싼 가구가 400억.

정령의 도움을 받아 배드민턴 캐비닛 이상의 작품을 만들어 낸다면, 다양한 차원의 지성체들이 교류할 수 있는 환경에선 과연 얼마나 큰 수요가 몰릴까.

여러 차원에 사는 부자들이 돈을 싸 들고 올 테니, 1,300억의 대출 정도는 순식간에 갚을 수 있을 거다.

어째서 직무권능을 발동했을 때 저울이 크게 오른쪽으로 기울어 있던 건지 이해가 갔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계획이 성공한다면 분명 큰 이익이 발생할 테니까.

“세계수로 만든 가구, 분명 특별하겠죠?”

“가구의 개념을 바꾸는 시도가 될 겁니다. 겉모습부터 기능까지, 기존의 재료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작품이 탄생할 거니까요.”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까요.”

“카펠리노 디 드리아데가 기존에 만들었던 가구는 정령들이 저희의 작업을 도우는 데에 그쳤지만 이번엔 다릅니다.”

툴레아의 주위에 색색깔의 정령들이 나타나 자기들끼리 장난을 치며 놀기 시작했다.

“이번 컬렉션은 오로지 정령들의 힘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건가요?”

“같은 과정을 답습해도 기존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 낼 순 없는 법이니까요.”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톱으로 자르지 않고, 정과 끌로 깎지 않고, 망치와 못으로 잇지 않고.

어떻게 원목을 가구의 모습으로 가공해 낸다는 말인가.

정령이 혼자 무거운 목제 승강기와 그 안에 탄 사람들을 152층까지 쉽게 실어나르는 걸 봤지만 여전히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내 호기심은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나는 사진으로 배드민턴 캐비닛을 처음 봤을 때의 감동을 떠올렸다.

황금과 자개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옷장의 자태는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집에 있는 옷장과 그리 다르지 않은 기능을 지니고 있는데도 부조리할 정도의 호화롭게 장식된 가구.

오직 차고 넘치는 부유함과 장인의 노력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사치스러운 조형미의 극치.

몇 번이나 사진을 보고 따라 그리느라 옷이 더러워지는지도 몰랐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가구나 인테리어에 관심을 가질 정도의 재력은 예나 지금이나 없지만 한때나마 화가의 길을 걷던 사람으로서 아름다운 무언가를 눈에 새기고 싶다는 열정만큼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었다.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바로 그렇기에, 나는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제작한 가구 중 가장 위대한 작품의 대척점에 존재하게 될 정령이 만든 가구가 과연 어떤 모습일지.

자연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존재가 어떤 아름다움을 만들어 낼지.

우아함과 세련됨 같은 사람들의 기준이 없는 세계에 사는 저들이 완성한 가구가 어떤 기능미를 갖추고 있을지.

“저도 하나 갖고 싶군요. 은행원의 월급으로 감당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마음 같아서야 감사한 분들에게 선물하고 싶지만, 경영자로선 해선 안 될 일인지라.”

말이라도 한 점 줄 수 있다고 할 법한 상황인데 칼같이 자르는 걸 보니 오히려 더 믿음이 갔다.

“여신심사부가 뭐라 할진 모르겠습니다만, 이사회가 군침을 흘리겠군요.”

상상력을 자극받은 건 나만이 아니었다.

엘라마 역시 툴레아가 제시한 도박에 마음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예술과 금융 두 분야에 모두 통달한 프로.

엘라마가 나와 닮았다고 말한다면 그건 너무나도 오만한 생각이겠지만 두 세계에 발을 걸쳐 본 사람으로서, 지금 어떤 생각이 그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을진 쉽게 짐작이 갔다.

아무런 결과물이 눈앞에 없는데에도 이성은 물론이고 감정까지 설득당한 상황.

우리들의 눈엔 보이고 있었다. 아직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가구의 이데아가.

“후미진 장소에 있는 데에다 세계수의 엘프 외엔 그 누구에게도 가치가 없는 부동산이라면 담보 가치가 없겠지만, 가구의 역사를 뒤바꿀 작품의 재료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죠.”

앞으로 천 년 동안은 나오지 않을 걸작이 탄생하려 하고 있다.

한 그루의 나무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세계수를 다듬어 만든 가구라면, 역사에 기록될 만한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가구의 개념이 재발명되려 하고 있는 데에다, 은행은 그 과정에서 충분한 이득을 취할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가 돈을 빌려주면 천천히 멸종해 가던 세계수의 엘프가 새로운 터전을 찾을 수 있다.

인도적인 목적과 기대 수익, 감성까지 모두 만족하는 완벽한 대출 안건.

모든 차원에서 가장 가치 있고 완벽한 가구를 만드는 장인들의 새로운 프로젝트에 1,300억 굴덴을 베팅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몇 번이나 직무권능을 발동해 봐도 결론은 같다.

카펠리노 디 드리아데는 1,300억 굴덴을 충분히 상환 가능할 정도로 높은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담보의 현장 실사는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다음에 이곳을 찾을 땐 대출 기간과 금리 등에 관해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죠.”

엘라마의 표정에선 여신심사부와 이사회 양쪽을 모두 설득할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밀려오는 흥분. 은행원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담당하는 거액의 대출 안건.

돈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지만 올바른 사람의 손에 쥐어지는 순간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한 분야의 역사적 순간이 성사되는 것을 돕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마저 들고 있었다.

“돌아가면 바로 본점에 연락하겠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래층까지 모시겠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말했는데도 대표 이사 툴레아는 우리와 함께 승강기에 탑승했다.

엘리베이터를 움직이는 건 아까 본 새하얀 털 뭉치처럼 생긴 정령이었다.

녀석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자꾸 내 바짓가랑이에 몸을 비비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데려가서 하나 키우고 싶다. 생긴 건 햄스터를 닮았는데 하는 짓은 완전 개냥이다. 정령 왜 이리 귀엽냐.

“세계수의 엘프도 아닌데 정령이 달라붙는 걸 보니 네놈은 촌구석에서 자랐나 보군.”

차게 식은 얼굴의 엘라마가 목소리를 낮추고 중얼거렸다.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하세요, 그냥.”

말본새가 그따구니까 얘도 소장 거르고 나한테 붙는 거잖아.

만일 밀라가 이 아이를 보면 참지 못하고 껴안으려 들겠지.

연수원 시절에도 근처에서 황금 털을 가진 양이나 대주주님이 산책시키던 어린 케르베로스를 보곤 대뜸 달려가 쓰다듬고 난리 쳤을 정도였으니.

“음…?”

1층에 도착한 승강기 문이 열린 다음 순간, 그런 잡생각은 싸그리 날아가고 말았다.

1층 승강기 앞을 메우고 있는 수많은 늙은 엘프들.

모두가 사나운 눈초리로 우릴 쏘아보고 있는 거로 보아 그들의 목적은 위층으로 올라가는 게 아닌 듯했다.

“…….”

일단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왔지만 엘프들은 세계수 밖으로 향하는 길목을 막고 비켜 주지 않고 있었다.

“툴레아 대표님, 이건 대체―”

-저벅

툴레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노인들의 무리가 홍해처럼 갈라지며 길이 열리더니 아까 제단에서 기도하던 화려한 복장의 엘프가 그 사이에서 나타났다.

“아이야, 내가 그렇게 경고했건만 기어코 멋대로 결정을 내렸구나.”

우릴 노려보는 엘프는 왼팔에 자그마한 화분 두 개를 끼고 기세 좋게 타오르는 횃불을 오른손에 들고 있었다.

“네가 초래한 일이다. 받아들여라.”

노인은 묘목이 심긴 화분을 바닥에 내려놓더니 천천히 횃불을 가져다 댔다.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

1층에 울려 퍼지는 툴레아의 처절한 목소리.

그제야 나는 화분에 심긴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타탓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몸이 반응했다.

이곳의 엘프들에게 있어 세계수는 신앙의 대상.

새로운 나무를 심기 위해 그것을 베어 가구의 재료로 사용하겠다는 지도자에게 저들이 어떤 방식으로 저항할지 생각하지 못한 게 실수였다.

“불 치워 X발아!!”

정신을 차렸을 땐, 나는 엘라마와 함께 화분을 향해 전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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