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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23/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23화

건장한 골격의 사내의 뒤로 옅은 햇볕이 쏟아진다.

역광에 의해 그림자가 진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세계수를 봤을 때 느낀 감정을 다시 한번 느끼고 있었다.

조용하지만 무거운 존재감을 지닌 사내는 나무를 닮았다.

세계수와 교감하며 유구한 세월을 살아가는 고대 엘프의 후예.

겉모습만 보면 50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저 남자의 진짜 나이가 얼마나 될진 짐작도 가지 않았다.

“카펠리노 디 드리아데Cappellino di Driade의 그란데 마에스트로를 뵙습니다.”

요정의 모자를 뜻하는 사명社名, 카펠리노 디 드리아데.

마에스트로는, 카펠리노 디 드리아데의 장인 중에서도 하나의 가구를 처음부터 끝까지 제작하는 생산 책임자.

원목에 영혼을 새겨 나무를 예술 작품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거장에게 붙는 존칭이었다.

“차원신용금고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 소장, 슬리크 엘라마입니다.”

“김지안입니다.”

우린 최고의 존중을 담아 인사를 건네고 명함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든 엘프는 소파를 가리키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반갑습니다. 대표를 맡고 있는 감비안 툴레아입니다.”

경리부장이 호리호리한 체격이었던 데에 반해 툴레아의 몸은 상당히 건장했다.

짧게 다듬은 수염과 머리. 주름진 얼굴과 부풀어 오른 팔뚝에선 관록과 힘이 느껴졌다.

장인과 나무꾼을 합쳐 둘로 나눈 듯한 분위기.

하지만 커다란 체격에도 불구하고 쓸데없이 위압감은 발하지 않고 있다.

깊지만 유순한 인상의 이목구비. 완력만이 아니라 깨우친 정신 역시 갖춘 남자. 나이에 걸맞은 지혜가 눈동자에 불을 밝히고 있었다.

“오시는 길이 편하지 않으셨을 텐데,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그럴 리가요. 눈이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라이노밀 시민인 게 자랑스럽습니다.”

“제가 감탄한 건 세계수 쪽입니다.”

“더할 나위 없는 칭찬이군요.”

엘프 가발을 쓴 엘라마가 넉살 좋게 대답하자 툴레아가 웃으며 발을 두 번 굴렀다.

-고고고고

다음 순간, 나무 바닥이 파도치듯 움직이더니 떨어져 있던 원목 차탁을 이쪽으로 실어 날랐다.

엘리베이터가 전기 없이 움직인 것처럼 아마도 저것 역시 정령술의 응용이겠지.

“굉장하네요.”

다만, 정령술 이상으로 놀라운 건 차탁의 완성도와 디테일이었다.

우리가 앉은 소파 역시 상당히 독특한 디자인을 지니고 있었지만 방금 옮겨진 차탁에 새겨진 조각은 상상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음각으로 새겨진 작은 엘프들과 나무.

종족의 역사를 요약해 예술로 승화시킨 조각은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처럼 보였다.

사용된 목재 역시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뽀얀 색깔에 굉장히 비싸 보인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가구가 최소 억대의 가격에 거래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부자들의 돈지랄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완성품을 가까이에서 보니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기분이었다.

“이것도 정령들과 제작한 가구인가요?”

“정령술은 특별한 가구를 만들 때에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건 제가 도제 시절 연습으로 만든 아이입니다. 초심을 잊지 않도록 늘 곁에 두고 있죠.”

“아….”

“앉아 계신 소파는 시장에서 유통되는 아이입니다. 제 자신작인데, 편안하시죠?”

“네. 완전.”

정령술을 사용해 제대로 제작한 가구는 대단했다. 가죽과 쿠션을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푹신푹신한데 보아하니 특수한 성질을 지닌 목재를 사용한 듯하다.

하지만 그보다 인상적인 건 가구를 아이라고 부르는 그의 태도.

여기서 나는 툴레아 대표가 자신의 작품에 얼마나 큰 애착과 애정을 지니고 있는지 엿볼 수 있었다.

과연 직무권능이 1,300억 굴덴의 대출을 상환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남자다.

여신판단의 저울은 내가 개입할 필요가 있음을 알려 주고 있었지만 이만큼 자부심과 열정을 지닌 장인이라면 분명 큰일을 해낼 사람인 게 틀림없다.

“오늘은 저번 방문 당시 당행의 사정으로 듣지 못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듣고 싶습니다.”

한편, 내가 가구의 퀄리티에 감탄하는 사이 엘라마는 곧바로 본론에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아직 음료도 준비하지 못했는데, 바로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예. 언제든지요.”

엘라마의 말대로 우린 이들이 무엇을 위해 돈을 빌리려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세계수의 엘프들이 빌리려 하는 금액이 무려 1,300억 굴덴에 달한다는 것과 세계수를 담보로 잡으려 한다는 사실 뿐이다.

예상치 못한 거액의 대출 신청 탓에 대출금의 용도와 상환 계획 등에 관해선 전혀 듣지 못했다.

당시엔 몰랐지만 카펠리노 디 드리아데는 부유층 사이에선 꽤나 알려진 브랜드였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엘라마는 그들이 허튼 이유로 돈을 빌리려 들지 않았을 거라고 짐작하고 일단 돌려보낸 것이리라.

구체적인 대화에 앞서 본점이 1,300억의 대출을 감당할 수 있는지부터 알아본 건 상담 후에 빌려줄 수 없다고 거절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한 행동.

담보의 가치만 확실하면 대출이 가능하다는 본점의 답변을 얻은 지금은 훨씬 구체적인 이야기가 가능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는 땅을 살 생각입니다.”

“땅… 이라고 말씀하신다면, 부동산을 구매하기 위해 부동산을 담보로 잡아 대출을 받고 싶다는 말씀이신지요.”

“그렇습니다.”

“투자 목적인가요? 아니면 시설 확장?”

내가 묻자 툴레아는 고개를 저었다.

“부유해지고 싶다는 이유로 은행의 돈을 1,300억씩이나 빌린다면 그건 투기라고 부르는 쪽이 옳겠죠.”

부동산 영끌하려고 1,300억을 빌리는 거였으면 정령술이고 고대 엘프고 환멸했을 텐데 다행히도 툴레아는 정신머리가 똑바로 박힌 남자였다.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이 세계수는 별에 남은 마지막 한 그루입니다.”

“그런 소중한 나무를 어째서 담보로 잡고 땅을 사려 하시는 거죠?”

“다 자란 세계수가 생명력을 공급할 수 있는 엘프의 숫자는 2만 정도가 한계. 그리고, 저희 머릿수는 이를 넘어서려는 참입니다.”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이죠?”

“저희 종족은 일정 기간 동안 세계수 밖에서 잠들 경우 수명이 줄어들 정도로 나무의 힘에 의존하며 살아갑니다.”

마치 어제의 날씨에 관해 이야기하는 듯한 태연한 말투.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나는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수의 수용 한도 이상으로 인구가 늘어난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까.

“연약한 동족들을 위해 나선 지원자들이 나뭇잎 위에 임시 주택을 만들어 거주 중입니다. 일정 기간마다 교대 중이지만 서서히 건강이 악화되어 가는 중입니다.”

나는 그제야 툴레아의 굵은 목에 새파란 멍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남 일처럼 말하고 있지만 지원자 중에 툴레아 자신이 포함되어 있는 건 틀림없어 보였다.

“저희는 대책을 찾아야 했습니다. 세계수는 이미 끝까지 자라 더는 커지지 않으니까요.”

“땅을 사려 하시는 이유는, 혹시….”

“이 별에는 영맥이라고 불리는 특별한 땅이 존재합니다. 저희는 영맥 중 두 곳의 위치를 특정해 소유주와 교섭 중입니다.”

툴레아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영맥은 세계수의 능력과 성장 속도를 비약적으로 활성화시킵니다. 묘목을 두 그루 심으면 늦어도 30년 후엔 2만 명이 전부 이주하고도 남을 정도의 크기로 자라 줄 테죠.”

“투자를 위한 대출이 아니었군요.”

“동포들의 수명을 지킬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가장 큰 투자가 아닐까요.”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래. 툴레아가 말한 대로다.

결국 가장 중요한 투자는 누군가의 목숨을 구하는 게 틀림없다.

세계수를 담보로 잡으려는 건 생존을 위한 발버둥.

현재를 통째로 담보로 삼아 미래를 사려 한다는 점에선 투기와 다를 바 없는 행동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목적은 어디까지나 종족을 보존하고 살아남는 것.

동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위험에 내던지는 저 사내의 각오를 외면할 자신은 내겐 없었다.

“…어째서 대출을 신청하신 건진 잘 알겠습니다. 확실히, 서두를 필요가 있겠군요.”

엘라마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돈밖에 모르는 것처럼 굴어도 아직 사람의 마음이 남아 있었나.

아니, 어쩌면 저 표정 역시 연기일지도 모르지.

그래도, 대출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어서 다행이다.

입지가 나쁘긴 해도 이만큼 희귀하고 거대한 나무라면 같은 크기의 빌딩만큼은 값이 나갈 듯한데.

이젠 담보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보고서를 본점에 올리고 대출을 실행하면 되겠지.

직무권능으로 본 카펠리노 디 드리아데의 잠재력은 훌륭했으니 분명 아무 문제도 없겠지.

무엇보다 이건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다. 인도적인 관점에서 봐도 이번 안건은 반드시 심사를 통과해야만 한다.

“하지만, 1,300억의 대출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내 희망적인 관측은 이어진 엘라마의 대답에 의해 산산조각이 났다.

“어째서죠?”

“어째서죠?”

나와 툴레아가 동시에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김지안 대리, 너는 대체 어디 소속이냐….”

어이가 없다는 듯 쏘아붙인 것도 잠시. 엘라마는 한숨을 쉬고 툴레아를 주시하고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세계수가 지닌 희소가치라면 저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나무가 부동산으로서 얼마나 가치가 있을지는 의문스럽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교통이 불편하고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거대한 빌딩. 인테리어엔 신경을 쓰긴 했지만 구축이라는 단어를 쓰기 미안할 정도로 오래됐고요.”

엘라마는 멈추지 않고 툴레아에게 쏘아붙였다.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지만 쓸데없이 거대하고 누구도 오고 싶어 하지 않는 실버 타운. 제겐 그 외의 용도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세계수의 가치를 과도하게 평가 절하하시는 건….”

“친환경 건축이라는 것 외엔 그 어떤 이점도 찾아볼 수 없고요.”

“…….”

“여러분의 동포가 아닌 다른 종족이 이곳에 거주한다고 세계수의 도움으로 수명이 늘어날까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에겐 이 나무가 숭배의 대상이자 생명의 근원일진 몰라도 제겐 희소한 목재 이상으론 보이지 않습니다. 부동산 담보 대출이 아니라 목재 담보 대출을 신청해 보시죠.”

엘라마의 지적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엘프 외의 그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거목.

그는 현대의 가치관을 통해 고대의 핏줄과 그들의 쉼터를 전부 부정하고 있었다.

시대에서 도태되었다고, 누구도 당신들의 나무에 관심이 없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돌아갈 시간이다, 김지안 대리.”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문 툴레아.

엘라마는 먼저 소파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

여기까진가.

돈이 부족해서 힘든 정도가 아니라 죽음의 위험에 처한 이들이 눈앞에 있는데, 나는 돕지 못하고 있다.

알고 있다. 나는 은행원. 돌려받을 수 없는 돈을 빌려주어선 안 된다.

담보 대출을 신청한 건 엘프들이다.

그들이 준비한 담보가 충분한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면 대출을 실행할 순 없다.

1,300억이 엘프들의 생명줄인 것처럼, 은행이 대출에 사용하는 자금 역시 다른 고객들이 목숨만큼 중히 여기는 돈이기 때문이다.

나는 은행원으로서 저울의 양쪽에 많은 것을 두고 무게를 비교해야 하는 입장에 있다.

하지만, 돈을 빌리는 고객을 맡기는 고객보다 중요시하는 건 단언컨대 옳지 않은 일이다.

지금은 그저, 구할 수 있는 이들이 눈앞에 있는데 손을 내밀어 줄 수 없는 나의 무력함이 사무치게 원망스러울 뿐이다.

“그럼, 저희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목재 담보 대출을 상담하고 싶으시다면 언제든지 출장소를 찾아주시죠. 원하시는 금액을 전부 빌려드리는 건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차가운 어조로 말을 마친 엘라마가 정중히 인사를 마치고 돌아섰다.

아무리 내 직무권능으로 저들의 잠재력이 높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해도 당장 담보의 가치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본점 기업여신부를 설득할 순 없다.

하는 수 없이 일어나 그 뒤를 따라가려 하던 그때.

“죄송하지만 차원신용금고는 세계수의 가치를 과도할 정도로 평가 절하하고 계신 듯합니다.”

-턱

출구를 향해 가던 엘라마가 걸음을 멈췄다.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겠나요?”

“1,300억 굴덴의 원금과 10%의 이자를 확실하게 상환할 방법이 있다고 말씀드리는 중입니다.”

“…그건 흥미롭군요.”

자리에서 일어난 툴레아의 눈에는 비장함과 자신감이 함께 번득이고 있었다.

절벽 끝에 선 자가 품은 최후의 긍지가 발하는 불빛.

설득이 성공하길 간절히 비는 나와 엘라마를 번갈아 본 장인의 우두머리는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차분히 입을 열었다.

“이 나무가, 저희가 지닌 전부입니다.”

“그런 모양이군요.”

“우린 나무가 공급한 생명력으로 살아가고, 죽어서는 땅에 묻혀 양분이 됩니다. 저희에게 이 나무는 세계 그 자체이자 신입니다.”

“주관적인 관점이지만 이해하겠습니다.”

어째서 이 나무가 세계수라고 불리는지 역설하는 엘프와, 철저한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그것을 부정하는 인간.

충돌하는 가치관 사이에 타협은 없다.

과연, 툴레아는 이 난관을 타개할 수 있을까.

어떤 말로 엘라마와 나를 설득할 생각일까.

“귀사의 가구 중 빈티지 라인이 경매에서 높은 가격에 낙찰되고 있다는 건 들었습니다. 하지만 1,300억 굴덴을 쉽게 갚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여전히 단호하게 거부의 뜻을 밝히고 있는 엘라마.

가구 장인들이 제대로 된 상환 방법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은행은 절대로 금고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것이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경매 낙찰가까지 알아보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가구 회사가 빚을 상환하려면 당연히 가구를 파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지 않겠습니까.”

“정확히 보셨군요.”

“그럼 말씀해 주시죠. 대체 얼마나 대단한 가구를 팔아 1,300억을 상환할 생각이신지.”

“상환 방법에 관해서입니다만, 아까 목재 담보 대출을 신청하라고 말씀하셨던가요.”

“그렇습니다. 헌데 그 이야기를 어째서 지금….”

툴레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말씀하신 대로 세계수는 목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계수는 목재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 알 수 있었다.

가구 장인이 목재로 할 수 있는 일은 애초에 하나밖에 없다.

“그러니까 저는. 아니―”

나무는 엘프의 세계이자 그들을 가두는 감옥이자, 연약한 생명을 보호하는 껍질.

비좁고 오래된 울타리를 벗어나기 위해서.

알을 깨고 태어나려는 자들을 위해서.

“카펠리노 디 드리아데는 세계수를 사용해 가구를 제작할 겁니다.”

남자는 신도, 세계도 파괴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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