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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15/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15화

3초 내로 튀어오라는 지시대로 사무실로 들어간 난 지점장과 엘라마 차장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저어, 무슨 일로 부르신 건지 여쭤봐도….”

불이 꺼진 지점장실.

유일한 광원은 비스듬한 각도로 누운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뿐.

마치 누아르 영화 같은 불안감이 조성된 사무실의 공기.

어떤 새끼 미장센이냐 이거, 나라시 상태가 아주 가관이구만.

“질문은 이쪽이 한다.”

지점장의 책상에 기댄 엘라마 차장이 칼같이 내 말을 잘랐다.

지점장은 소속장 취급이라 부장급.

차장 나부랭이가 부장급 앞에서 저래도 되는 걸까 싶었지만 본점 실세라니까 뭐….

“우리, 저번에 만난 적 있지?”

동양인 느낌의 말끔한 얼굴이 인상적인 인간 미중년, 슬리크 엘라마는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고 내게 물었다.

매끄러운 스킨헤드. 문신이랑 귀고리만 있었다면 더 무서웠을 거 같다.

“네. 면접 때 뵈었습니다.”

“잘 기억하고 있네. 그래서, 왜 불려 온 건지 아직도 모르겠어?”

“…….”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았다.

나 왜 갈굼당하고 있는 거지.

면접은 분명 8개월하고 2주 전에 끝났는데 어째서인지 다시 압박 면접을 당하고 있다.

벗어날 수 없는 무한 루프에 갇혀 버리기라도 한 걸까.

“아.”

혹시, 지금 혼나는 거 역시 ‘그것’ 때문인가….

나는 최대한 머리를 굴려 문제가 되었을 만한 언행을 추려낸 다음 대답했다.

“남성형 탈모 환자를 싸잡아 악의 축처럼 이야기한 결과 엘라마 차장님을 비롯한 선량한 탈모인에게 너무나도 큰 상심을 끼쳐 드린 점 머리 숙여 사죄드립니다.”

나는 최대한 진지한 태도로 사과를 건넸다.

올바른 사죄의 예시로 자주 인용되는 모 재벌 3세의 사과문을 레퍼런스로 사용했으니 내 진심은 반드시 전달될 것이다.

“…….”

“…….”

하지만 지점장과 엘라마 차장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날 주시하고 있었다.

이게 아닌가.

“죄송합니다, 실언했습니다. 아까 제가 탈모인에 관해 한 발언은 절대 평소 해 왔던 생각이 아니고―”

“헛소리하지 말고 앉아.”

90도로 허리를 접어 사과하고 있던 나는 엘라마 차장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표정에 변화가 없다.

자세히 보니 딱히 화난 건 아닌 모양.

“어떻습니까, 엘라마 차장.”

“면접 볼 때도 느낀 거지만 재밌는 친구군요.”

둘은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고는 내 맞은편에 나란히 앉았다.

“김지안 계장.”

“예.”

“이건 탈모가 아니라 스스로 민 거다. 기억해 두도록.”

“…명심하겠습니다.”

화난 건 아니지만 신경은 쓰이는 듯하다.

그래서, 슬슬 궁금해지는데 이 사람은 대체 왜 날 불러낸 걸까.

“아직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지 못하는 듯하니 내가 알려 주지.”

엘라마 차장은 가방에서 결재판을 하나 꺼내 내게 건넸다.

“이건….”

그것을 열어 안에 있는 서류를 확인한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2022년 12월 28일

승진 내시內示

서부 포독스 지점 계장

김지안 귀하

주식회사 차원신용금고

은행장 오커스 디스파테르

내시

2023년 1월 5일부로 귀하의 서부 포독스 지점 계장 직위를 해제하고 대리로 임명합니다.

이 내시에 관해선 정식으로 사령辭令이 교부될 때까지 타인에게 누설하지 마십시오.

이상]

.

.

.

내시內示란 승진이나 인사이동 등을 공시公示하기 전 당사자에게 비밀리에 알리는 것을 뜻한다.

“2월이 아니라 1월…?”

그리고 여기에 적혀 있는 내용이 사실이라면 나는 반년의 수습 기간을 채우지 않고 다섯 달 만에 대리를 달게 된다.

아무리 계장에서 대리 되는 게 자동 승진이라고 해도 이게 가능이나 한 일인가.

-펑!

느닷없이 터져 나온 폭죽 소리.

델 몬테 지점장은 고깔 모양 폭죽을 들고 있었다.

쏟아져 나온 형형색색의 색종이와 컬러 리본이 하늘하늘 내 머리 위에 떨어지는 중.

지점장의 정수리 위로 튀어나온 미러볼은 경쾌한 음악과 함께 빙글빙글 회전하며 어지럽게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축하합니다. 김지안 대리.”

-축하 프로토콜을 종료합니다.

미러볼이 천천히 지점장의 머리에 수납되는 어지러운 광경을 지켜보는 동안 나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수습 기간은 6개월로 고정되어 있던 거로 알고 있었습니다.”

“인사권자의 허락이 있다면 예외도 존재하지.”

내 물음에 대답한 건 엘라마 차장이었다.

누군가는 고작 한 달 먼저 승진한 것 가지고 왜 호들갑을 떠느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폐쇄적인 조직에서 일하는 은행원에게 있어 반년의 수습 기간은 절대적인 것이다.

차원신용금고의 행원은 공채와 특채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 반년 동안 계장 직함을 달고 실무에 적응해야 한다.

인사권자가 인정할 정도의 영업 실적을 내는 등 몇몇 예외는 특별 승진이 인정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리를 단 다음의 이야기.

비록 한 달이긴 해도 수습 기간이 줄어드는 건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동기들보다 한 달 일찍 대리를 달았다.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있나?”

옅은 미소를 띤 얼굴로 엘라마 차장이 물었다.

이 인간, 면접에서 하도 나한테 지랄하길래 악의라도 있나 싶었는데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단지 그 자리에 있던 유일한 실무자라서 압박 면접을 했을 뿐. 그렇게 생각하는 게 타당하겠지.

“…2021년 하반기 공채, 특채를 통틀어 가장 주목받는 신입 행원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거참, 낯부끄러운 소리인데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하는구먼.”

엘라마 차장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뭐, 틀린 말은 아니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확실히 나는 5개월 동안 두 건의 큼지막한 실적을 올리긴 했다.

하지만 두 번째 실적은 순전히 내 공로로 취급하기 까다로운 유형의 사건이었다.

물론 내 활약이 인사고과에 잘 반영될 거란 지점장의 약속을 믿지 못했던 건 아니다.

헌데, 설마 수습 기간이 줄어드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줄이야.

“방금 말한 대로다. 본점과 이사회는 네게 주목하고 있어. 이유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겠지?”

내가 은행장의 낙하산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고객의 경제적인 잠재력을 꿰뚫어 보는 직무권능을 지닌 점이 높게 평가된 걸까.

어쩌면 둘 다, 일지도.

“여태껏 낸 실적 이상으로 저를 좋게 평가해 주시는 듯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입에 발린 말은 치워. 갓 일 배우기 시작한 햇병아리치곤 쓸 만한 건 나도 인정하고 있으니까.”

햇병아리, 인가.

하긴, 최연소로 차장 단 사람이 보면 나는 아직 미숙하기 짝이 없는 신입 행원에 지나지 않겠지.

“벌써 이만큼 해냈으니 앞으로의 행보에 기대가 크다, 이 말이야.”

지점장이 그저 흐뭇한 미소를 짓는 가운데 엘라마 차장은 두 팔을 벌리고 묘하게 연극배우 같은 톤으로 내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나는 짧게 대답하고 그의 얼굴을 주시했다.

엘라마 차장은 플랫 샤펜도라 못지않은 미중년이었지만 결이 달랐다.

플랫의 미소에는 늘 따뜻한 심성이 묻어 나오고 있었지만 슬리크 엘라마의 미소에선 사나운 맹수의 그림자를 엿볼 수 있었다.

오랫동안 캐리커처를 그리며 다양한 고객을 관찰해 온 내 직감은 상당한 믿을 만한 것이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다.

차원신용금고의 행원들이 하나씩 보유한 직무권능은 개개인의 잠재력과 재능을 초능력의 범주로 끌어올린 것이다.

이는 창업자와 대주주인 신들의 신성에 뿌리를 둔 힘.

내 입으로 말하는 건 부끄럽지만 내가 개인과 기업의 잠재력을 엿보는 능력을 갖추게 된 건 애초에 사람을 보는 눈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남을 쉽게 칭찬하는 타입은 아닌 것 같은데….’

엘라마 차장은 유능하지만 지독한 독불장군으로 보인다.

이런 사람이 자기 밑에서 일하는 부하도 아닌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데엔 분명 무언가 이유가 있을 터.

“엘라마 차장님.”

“질문을 허락한 적은 없다만.”

“실례를 무릅쓰고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그는 희귀한 곤충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읊어 봐.”

나는 심호흡을 하고 말을 이었다.

“일반적으로 승진과 인사이동에 관한 사전 연락은 인사부 행원이 당사자에게 구두로 전달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게 어쨌다는 거지.”

“하지만 엘라마 차장님께선 본점 기업여신부에서 근무 중이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차장님이 이걸 제게 전해 주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내가 묻자 엘라마의 입에 가느다란 미소가 걸렸다.

“…승진 내시 받았다고 좋다고 시시덕대는 녀석이었으면 없던 일로 하려 했는데. 네 녀석은 충분히 싹수가 있군.”

엘라마는 가방 안에서 또 다른 결재판을 꺼내 던졌다.

“자.”

결재판을 열어 본 나는 더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수 없었다.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다차원 출장소….”

안에 들어 있던 서류는 인사이동 내시서로 내 근무 장소가 서부 포독스 지점에서 다차원 출장소로 바뀔 거란 사실을 알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지점장이 나를 보고 윙크하는 게 보였다.

‘다른 점포에서 일하게 되어도 이것만은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어째서 비행기 안에서 지점장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젠 알 것 같았다.

“내 밑에서 일하려면 표정을 관리하는 법부터 배워야겠군. 세 살짜리 꼬맹이가 봐도 네 친구 중에 입 싼 인사부 행원이 있는 걸 알 수 있을 거다.”

“죄송합니다.”

“사과하지 않아도 돼. 이런 사소한 일로 문책할 생각은 없으니까.”

저번에 밀라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새로운 출세 코스인 다차원 출장소 근무자 후보로 날 추천한 게 누굴지 추측한 적이 있었다.

차원신용금고의 요직을 나눠 가진 세 파벌 중 은행장의 파벌에 속한 자일 거로 생각했는데.

보아하니 인사부에 날 추천한 건 델 몬테 지점장이고 그는 은행장을 따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된 거였군.’

아까 프레드 선배는 슬리크 엘라마 차장이 기업여신부의 실세이자, 은행장 파벌의 실력자라고 말했다.

델 몬테 지점장은 한창 주가가 급등하는 엘라마 차장에게 나를 소개했고 나는 나쁘지 않은 첫인상을 주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엘라마 차장이 두 개의 내시서를 내게 줄 수 있던 이유는 아마도―

“…앞으로는 차장님이 아니라 출장소장님이라고 부르면 되겠군요.”

-따악

손가락을 튕긴 엘라마가 품에서 명함을 꺼내 내게 건넸다.

차원신용금고 다차원 출장소 소장, 슬리크 엘라마.

“출장소장님이 아니라 소장님이다. 다섯 글자는 길어서 비효율적이니까.”

“알겠습니다.”

“대충 눈치챘겠지만 인사이동을 거부하는 순간 조기 승진은 없던 일이 된다.”

“그럴 일 없습니다.”

바라던 바다.

나는 위로 올라갈 거다.

내게 주어진 능력을 가장 올바르게 활용할 수 있는 곳에서.

더 큰돈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빌려줄 거다.

“질문이 있다면 하나만 받도록 하지.”

“출장소에서 일하게 되면 제게 어떤 일을 시키실 건지요.”

내가 묻자, 슬리크 엘라마는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우리가 향하는 곳은 금융의 최전선. 본점의 겁쟁이들이 발을 디딜 엄두도 내지 못하던 머나먼 전쟁터다.”

어두운 사무실에서 빛을 발하는 샛노란 눈동자.

“빌어먹을 삼류 은행 놈들이 차지한 고객과 예금을 약탈하는 게 네놈의 임무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엘라마의 얼굴은 흡사 지상에 강림한 악마와도 같이 보였다.

“내 허락 없인 퇴근할 수 없다. 출장소에 주말은 없다.”

협박 혹은 위협처럼 들리는 강한 어조.

“격무에 피를 토하고 쓰러져도 도움을 바라지 마라. 네 녀석이 뻗어 있는 사이 다른 두 파벌의 에이스가 실적을 가로채려 들 테니까.”

엘라마는 내부의 적과도 싸워야 하는 출장소의 현실을 감추는 일 없이 내게 알려 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각오해라. 나는 네놈을 개처럼 굴릴 거다.”

파악할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는 지옥으로 잡아끄는 것만 같은 목소리.

하지만 어째서일까.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그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피가 끓어오르는 건.

“지름길이 평탄하다고 생각하는 쪽이 잘못된 거죠.”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우린 오른손을 뻗었다.

손이 저릿해질 정도로 힘이 들어간 악수.

“죽을 각오로 일해라, 김지안.”

“김지안 대리, 입니다.”

그 등에 날개만 달려 있다면.

천사든 악마든, 나는 손을 잡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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